소설리스트

릭 미 업 이프 유 캔-193화 (193/216)

193화

“코이!”

“앨!”

얼굴을 보자마자 덥석 끌어안고 기쁨을 나눈 둘은 꼭 한 번 더 힘주어 안은 뒤 서로를 놓아줬다. 코이는 환한 얼굴로 에리얼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그동안 연락 못 해서 미안해.”

“괜찮아, 나야말로 이런 일로 불러서 미안해.”

미간을 모으며 사과한 에리얼이 코이를 아파트 안으로 들여보냈다. 거실에 멈춰 서서 기다린 코이에게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이 안 돼서 말이지.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괜찮아,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더 잘됐지.”

코이가 흔쾌히 말하며 웃자 에리얼은 미안해하는 얼굴로 마주 웃은 뒤 먼저 주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가리킨 싱크대를 본 코이는 물을 틀어 배수를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심하게 막힌 건 아니고, 아래를 분해해서 뚫으면 될 거 같은데…… 좀 지저분해질 거야. 못 쓰는 수건이나 옷 같은 거 있어? 좀 줄래?”

“어, 잠깐만.”

급히 들어간 그녀가 천 뭉치를 한아름 들고 나왔다. 싱크대 주변에 수건을 깔고 일을 시작하는 코이를 지켜보며 에리얼은 식탁의 의자에 앉았다. 조용하면서도 능숙하게 손을 움직이는 코이를 보자 문득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려, 쟨 내 자매라고.

속으로 자신을 꾸짖은 에리얼은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에 프로인 남자에게 매번 끌리곤 했다. 개럿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이내 씁쓸해졌다.

“개럿이 있을 때는 걔가 이런 걸 다 했었는데 좀 아쉽긴 하네.”

“어디 갔어?”

취재라도 떠났나, 하고 별생각 없이 물은 코이에게 에리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헤어졌어, 우리.”

놀란 코이가 손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에리얼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같이 살다 보면 안 맞는 구석도 있고 그렇잖아. 지난주에 남은 짐도 모두 가져가서 완전히 끝났어.”

“그, 그렇구나.”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코이는 머뭇거리다 고작 그렇게만 말했다. 에리얼은 걱정 말라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별거 아냐, 만나다 보면 헤어지기도 하고 또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하는 거지 뭐. 또 좋은 사람을 만나겠지.”

물론 그럴 것이다. 에리얼은 언제나 남자 친구가 있었고, 그녀가 싱글이 됐다고 하면 환영할 남자들이 세상에 널렸을 테니까. 코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에리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문제는 방세야. 개럿하고 나눠서 낼 때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는데 나 혼자 여기 집세를 감당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 말에 코이는 무심코 집 안을 둘러보았다. 방이 세 개에 욕실이 두 개인 아파트는 제법 크기도 크고 교통도 좋아서 상당히 가격이 비쌌다. 이런 곳에서 혼자 지내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다.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 저절로 드러난 코이에게 에리얼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걱정 마, 하우스 셰어를 하든가 방법은 많으니까. 그보다 넌 어때? 그 녀석하고 아주 잘 지내는 모양이지?”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코이는 화들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금세 홍조가 올라오고,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급하게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보고 에리얼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널 보자마자 알았으니까 그렇게 놀랄 거 없어. 너한테서 그 녀석 페로몬 향이 아주 질리도록 넘쳐나고 있으니까.”

“저, 정말?”

코이는 황급히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알 턱이 없었다. 그런 코이를 보며 에리얼은 짓궂게 말을 이었다.

“대체 얼마나 붙어 있으면 베타한테서 극알파 향이 나니? 네 눈동자 색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네가 극알파인 줄 알았을걸. 올 때는 괜찮았어? 오메가들이라면 반응을 했을 거 같은데.”

“어…….”

코이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괜찮았어. 저기, 프론트에서 택시를 준비해 줘서 그걸 타고 왔거든…….”

아주 자연스럽게 동거하고 있구나.

에리얼은 애슐리의 거만한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여우 같은 놈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코이가 홀딱 넘어가서 얼렁뚱땅 일이 진행된 게 분명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코이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그사이 코이는 일을 끝냈다. 다시 배관을 연결하고 물을 흘려 확인한 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리얼 또한 기뻐하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 코이. 정말 금방 끝났네.”

“별로 심하지 않았어.”

쑥스러워하는 코이를 보고 에리얼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더 있다가 갈래? 차하고 과자를 좀 준비해 올게.”

곧이어 한 차례 코이를 훑어본 그녀가 덧붙였다.

“좀 씻을래? 옷이 지저분해졌는데, 개럿이 두고 간 셔츠가 있어. 버려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걸 줄게.”

“아, 그래. 고마워.”

코이를 욕실로 안내한 에리얼이 셔츠를 건네준 뒤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아 옷을 벗은 코이는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얼이 그의 벗은 몸을 봤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곳곳에 깨물고 빨아들인 흔적이 역력한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던 그는 서둘러 몸을 씻고 셔츠를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오자 에리얼은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찻물을 내리고 있던 그녀는 코이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요즘 내가 푹 빠진 차야. 마셔 볼래? 아니면 다른 걸 줄까?”

“괜찮아, 나도 이걸로 할게.”

코이의 대답에 그녀는 선뜻 찻잔을 놔준 뒤 테이블 세팅을 했다. 과자를 놓고 마주 앉은 에리얼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이제 말해 봐, 그 녀석하고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어? 어…….”

코이의 얼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친구 사이에 연인과 어떻게 지내는지를 묻는 건 흔한 일이다. 에리얼은 개럿과 헤어졌다는 얘기도 아무렇지 않게 했는데 코이는 어떤지 궁금해할 수도 있는 거니까. 다만 그에겐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자…… 잘 지내고 있어, 아주.”

코이는 찻잔에 시선을 멈추고 작게 대답했다. 점점 얼굴이 뜨거워지고, 급기야 심장이 폭발할 것 같은 두근거림을 느끼며 겨우 자백했다.

“우리, 서로 좋아하고 있었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에리얼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코이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저기…… 얼떨결에, 좋아한다고 했거든. 그랬더니 애쉬가…….”

부끄러워 더 말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인 그를 보고 에리얼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가증스러운 개자식이 어떻게 세 치 혀를 놀렸을까 내심 애를 태우며 기다리는데, 간신히 코이가 입을 열었다.

“평생 나를 사랑했다면서, 앞으로도 나밖에 없다는 거야. 줄곧 나만 사랑하고 있었대.”

와, 그 사기꾼 새끼.

에리얼은 기가 막혀 입이 떡 벌어졌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는 코이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자 더 어이가 없었다. 순진한 코이를 꼬드겨 낼름 잡아먹어 버리다니. 너무나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코이가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을 때 애슐리에게 그걸 말한 에리얼의 책임이 가장 컸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꼴이잖아.

에리얼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해졌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떠돌았으나 입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코이는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던 것이다.

코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버텨 왔는지 에리얼은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안쓰럽게 보였던 친구가 이제야 행복해졌다는데 그걸 깨뜨리는 게 과연 옳을까?

애쉬에겐 결혼하려던 여자가 있었고 매주 페로몬 파티에 갔어.

에리얼은 자신이 아는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만약 이걸 안다면 코이는 얼마나 상처받을까?

어쩌면 지난 일이라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이성이란 언제나 감정과 따로 노는 법이다. 코이는 분명히 마음이 쓰일 것이고 더 이상 예전 같은 행복은 없을 게 분명하다.

코이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라고 했잖아.

에리얼은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다. 애슐리가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건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설마 그것도 거짓일까? 순간 불안해졌으나 곧 그녀는 부정했다. 애슐리가 코이를 상대로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어떤 이득도 찾을 수 없는 일에 뭐 하러 이런 수고를 할까.

하지만 여전히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면…….

애슐리가 했던 불길한 말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갈팡질팡하고 있는 에리얼에게 코이가 말을 이었다.

“저기, 그래서…… 애쉬가 일을 소개해 준다고는 했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도 모르겠고 하니까 따로 아르바이트를 할까 생각 중이야.”

“응? 아르바이트?”

급히 정신을 차리고 묻자 코이는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반지를 사려고.”

“반지?”

이번에도 그의 말을 되묻고 만 에리얼에게 코이는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하지만 당당하게 선언했다.

“애쉬한테 청혼해야지.”

그 말에 에리얼은 그만 턱이 쑥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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