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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미 업 이프 유 캔-183화 (183/216)

183화

“꽃은 잘 자라고 있어?”

에피타이저를 먹은 뒤 다음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는 사이 코이가 물었다. 오, 하고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에리얼이 대답했다.

“미안해, 역시 난 뭘 키우는 데는 재주가 없나 봐.”

“어, 아냐. 괜찮아, 나도 감당을 못 해서 준 건데 뭘…….”

코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뒤에 그런 일이 없었던 걸 보면 역시 그 꽃향기가 원인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꽃이 진 것은 아쉽지만 혹시 그 꽃 때문에 에리얼이 코이가 그랬듯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더 큰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모른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 버렸다.

한편 에리얼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코이가 발현한 게 아닐까 잠깐 걱정을 했었지만 그 뒤로 같은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고 향기도 여전히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페로몬이 맞는다면 제일 먼저 애슐리가 눈치를 챘을 텐데 그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역시 그냥 감기였던 모양이구나.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무심코 웃음이 나와 그녀는 물을 마시는 척 표정을 감췄다. 그때까지 애슐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코이와 반갑게 말을 나누고 있던 에리얼은 그의 수상한 침묵에 내심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음흉한 자식이 또 무슨 꿍꿍이지?

“저,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잘 해결됐어, 둘이 애써 줘서.”

마침 코이가 감사의 말을 했다. 에리얼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애초에 왜 그렇게 밀리게 놔뒀느냐고. 진작 따졌어야지.”

당연한 지적에 코이는 그게, 하고 난처해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만두고 그래서 사장도 많이 힘들어했으니까…… 몇 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모아 둔 돈이 있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다. 동부의 살인적인 물가를 우습게 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코이에게 에리얼이 엄하게 일렀다.

“대부분 사람들은 코이, 임금이 한 주만 밀려도 고소하든가 그 일을 그만둬.”

“맞는 말이야.”

뜻밖에도 그때까지 별다른 말이 없던 애슐리도 동의했다. 둘은 서로에게 반목하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뜻을 함께했다.

“그렇게 호의를 베풀어 봤자 너만 손해라고.”

에리얼의 말을 애슐리가 이어 받았다.

“지나치게 좋은 사람인 것도 좋지 않아.”

에리얼은 흘긋 그를 보며 맞아, 하고 덧붙였다.

“적당히 나쁠 줄도 알아야지. 넌 너무 나쁘고.”

“칭찬 고마워.”

역시 둘은 사이가 좋았구나.

티격태격하며 비꼬는 말을 주고받는 애슐리와 에리얼을 보며 코이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시로 애슐리에 대해 험담을 하는 에리얼과 그런 그녀를 썩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던 애슐리였지만 막상 함께 있으니 저렇게 뜻이 잘 맞지 않는가. 물론 코이를 꾸짖는다는 공통된 주제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코이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동창 셋이 모여서, 그것도 코이가 가장 좋아하는 동창 둘과 함께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흐뭇하게 웃고 있는 코이를 보고 에리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거 아냐, 착각하지 마.”

에리얼의 경고에 애슐리는 무심히 말했다.

“내버려 둬, 눈앞에서 너와 내가 나이프로 서로를 찔러도 코이는 우리가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할걸.”

에리얼은 미간을 찡그렸으나 안타깝게도 애슐리의 말이 맞았다.

“설마,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코이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하고 둘을 번갈아 보는 그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기까지 했다. 지금껏 주위의 분위기 따위는 아랑곳없이 혼자 행복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코이도 이제야 조금 눈치가 생긴 모양이었다. 코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려 에리얼이 멈칫한 찰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지. 앨이 나를 찌르는 일은 있어도 난 그렇게 하지 않을 테니까.”

“저엉마알?”

에리얼이 단박에 비꼬듯 단어를 길게 늘여서 물었다. 애슐리가 와인글라스를 들어 보이며 피식 웃었다.

“난 변호사야. 말로 끝낼 수 있는 싸움에 굳이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아.”

저기요, 넬슨이 지금 입원해 있는데요.

에리얼은 즉시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삼켰다. 코이가 그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괜히 말을 꺼냈다가 이 교활한 혓바닥에 넘어갈지도 모르니 그냥 덮어 두는 게 나았다.

“맞아, 애쉬는 폭력은 쓰지 않아.”

코이가 한 술 더 떠 악덕 변호사를 거들기까지 했다. 그렇지, 주먹을 쓰는 일은 아주 드물지. 에리얼은 생각했다. 저 세 치 혀로 법정에서 사람을 사회적으로 죽여 버릴 뿐이니까.

그런데 저 자식이 넬슨을 그렇게까지 때리다니.

다른 의미로 신기했다. 에리얼은 와인을 마시는 척하며 흘끔 애슐리를 훔쳐보았다. 그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라고는 없었고 이후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가끔 한마디 하게 되면 여지없이 에리얼을 비꼬았고, 에리얼 또한 지지 않고 그에게 반격했다. 셋이 함께하는 자리를 기쁘게 받아들인 건 코이뿐이었다.

마침내 식사가 거의 마무리되고, 디저트만 남겨 놓았을 때 코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나 잠깐만.”

화장실을 의미하고 몸을 일으킨 그는 슬쩍 둘을 번갈아 보았다. 괜찮지? 확인이라도 하듯 멈춘 시선에 에리얼은 걱정 말라는 것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코이가 테이블을 떠나자 직원이 곧 뒤따라왔다. 처음 왔을 때 직접 코이를 화장실로 안내해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던 직원의 친절을 떠올리고 코이는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직원은 미소를 짓더니 먼저 걸음을 옮겨 화장실로 향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간 코이에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화장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안으로 들어간 코이에게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밀러 씨가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의아해하며 받아 든 코이에게 직원이 설명을 한 후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코이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작은 쇼핑백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예쁘게 포장이 된 작은 상자와 메시지 카드가 놓여 있었다.

‘이걸 입어.’

“아.”

〈뭐든지 할게.〉

전날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린 코이는 메시지 카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들어 있는 건지 궁금해하며 상자를 꺼내 열었다.

안에 있던 물건은 그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점차 크게 떠진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상자 바닥에 또 한 장의 메시지 카드가 있는 게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그걸 꺼내 든 코이는 그만 헉, 하고 소리 내어 숨을 삼키고 말았다.

* * *

두 번째로 주문한 와인을 거의 다 마셔 가고 있었다. 직원이 따라 준 마지막 와인을 입으로 가져가는 애슐리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지금쯤 코이는 상자 안의 물건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당황할지를 상상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다음에는 내 눈앞에서 입는 걸 봐야겠어.

사실 처음 계획은 올 때부터 바지 안에 입혀서 나오는 것이었지만 그는 곧 생각을 바꿨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코이는 저녁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시종일관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방심하다가 허를 찔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에리얼과 식사 내내 행복하게 웃고 떠들었으니 이제 충분하겠지.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마시는 그를 보고 에리얼은 의심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저 자식이 왜 혼자 웃지? 기분 나쁘게.

“너,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거야?”

코이가 없으니 더 이상 숨길 이유도 없다. 직선적인 물음에 애슐리는 흘긋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냐는 듯이. 에리얼이 참고 있었던 말을 끄집어 냈다.

“넬슨이 전치 16주나 나온 거 알고 있어? 그거, 네가 한 짓이지? 왜 그랬어?”

확신을 가지고 물은 에리얼에게 애슐리는 느긋한 말투로 대답했다.

“정당방위였어. 넬슨이 먼저 나를 때렸거든.”

뜻밖에도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에리얼은 애슐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본 뒤 다시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많이 다친 거 같진 않은데?”

야유하듯 물은 말에 애슐리가 피식 웃었다.

“네가 때린 게 더 아프긴 했어.”

그러자 에리얼은 만족스러운 듯 마주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라면 더 세게 때려 줄 수 있는데.”

“사양하겠어, 너한테는 이미 충분히 맞았거든.”

정중한 말투였으나 빈정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째선지 기분이 좋아져 농담처럼 말을 받고 있었지만 만약 심사가 뒤틀리기라도 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에리얼 역시 웃음을 거둔 채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넌 변호사잖아.”

앞서 그가 했던 말을 반복해 묻자 애슐리가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섬뜩한 냉소에 에리얼이 멈칫했을 때, 애슐리가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제 법대로 할 거야.”

“아직도 넬슨한테 볼일이 남았어?”

에리얼이 질렸다는 듯이 묻자 그는 대답 대신 그저 웃음만 지어보였다. 기가 막혀 그를 바라보는 에리얼에게 애슐리가 느릿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오늘 유독 적대적인데, 설마 넬슨을 좋아하고 있었던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에리얼의 속을 뒤집어 놓는 그에게 에리얼은 아니, 하고 폭탄선언을 했다.

“너, 코이와 잤다면서?”

와인을 마시던 애슐리가 움직임을 멈추고 에리얼에게 시선을 향했다. 에리얼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코이는 베타야. 그런데 너하고 잤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넌 정말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개자식이야. 어떻게 베타랑 잘 수가 있어? 그것도 코이는 남잔데, 정말 진심으로 코이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빠른 말투로 그를 비난하는 에리얼은 애슐리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심상치 않은 침묵에 에리얼이 말을 멈추고 그를 노려보자, 애슐리의 얼굴에 서서히 만족감이 퍼져 나갔다.

“넌 모르고 있구나.”

속삭이듯 흘러나온 음성에 에리얼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뭐지, 저 자식?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에리얼이 덤벼들듯이 물었으나 애슐리는 그저 와인을 입에 가져갔을 뿐이었다. 빤히 그런 그를 바라보던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네가 넬슨을 그렇게 때린 건 코이 때문이지?”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리얼이 계속해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 코이가 넬슨한테 맞고 와서 열받았던 거잖아, 안 그래?”

애슐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침묵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긍정이었다. 에리얼은 강한 어조로 그를 다그쳤다.

“이제 인정해, 코이를 아직 좋아하고 있다는 걸. 변호사인 네가 죽도록 사람을 때렸을 정도로.”

지난번에 했던 미친 소리도 이 기회에 철회하라고 에리얼은 덧붙였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애슐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왜?”

“뭐라고?”

에리얼이 미간을 찌푸리자 애슐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난 내 마음을 한 번도 부정한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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