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잠시 말이 없던 애슐리가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머뭇거리던 코이가 셔츠를 내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저기, 난 그만 잘게…….”
애슐리는 별다른 말 없이 그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코이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날과는 달리 애슐리의 아나콘다를 엉덩이로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다. 허겁지겁 가 버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애슐리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주변의 페로몬은 한층 더 진하게 퍼져 있었다.
감히 코이가 저런 생각을 하다니.
저렇게 괘씸한 발상은 코이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절대 아니었다. 머릿속에 유력한 얼굴이 스쳤을 때, 급히 나갔던 코이가 돌아와 문 너머로 얼굴만 내밀고 물었다.
“저, 혹시 내일 시간 있어? 저녁에.”
불안해하는 얼굴에 애슐리는 페로몬을 누그러뜨리고 표정을 풀었다.
“그래. 왜?”
지난 며칠 내내 저녁 식사를 함께했는데 이렇게 굳이 확인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표정으로 보아 나쁜 일은 아닐 것 같아 애슐리는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확인한 코이 역시 안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다행이다. 그럼 나가서 식사해도 될까? 내가 살게, 이번에 도와준 거 답례로.”
그때까진 나쁘지 않았다. 곧이어 코이가 방심하고 있던 애슐리에게 어퍼컷을 날렸다.
“앨도 함께.”
애슐리가 대답을 하기까지는 몇 초의 공백이 생겼다.
“……앨도.”
낮은 한 마디에 깔린 불쾌한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코이는 여전히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앨한테도 신세를 졌으니까 식사를 사려고 했더니 너랑 다 같이 먹으면 돈도 아끼고 좋지 않냐고…… 앨이 그래서…….”
말을 하다가 뒤늦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코이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꽤나 빠르군. 애슐리는 내심 빈정거리며 코이를 바라보았다. 문 뒤에서 얼굴만 내민 코이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취소할까……?”
둘은 사이가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헤어지고도 여전히 친구로 지낸다고 여겼던 코이의 생각은 틀린 모양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애슐리의 무표정한 얼굴은 빈말로라도 좋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눈치를 보던 코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취소할게…….”
기운 없이 손을 늘어뜨리고 돌아서며 에리얼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코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창끼리 저녁 식사라니 정말 기뻤었는데…….
“코이.”
문 너머로 부르는 소리에 고작 두어 걸음을 뗐을 뿐인 코이가 화들짝 놀라 급히 돌아섰다.
“어, 응.”
황급히 다시 모습을 드러낸 코이에게 애슐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자.”
“어?”
잠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이자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저녁 식사 하자고, 에리얼과 함께.”
“어…….”
천천히 그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코이는 이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정말이야? 그래도 돼?”
“그래.”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동창과 저녁을 먹는 것도 괜찮겠지.”
“내 생각도 그래……!”
코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애슐리 역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코이와 같은 감정은 결코 아니었지만 코이는 멋대로 그렇게 받아들였다.
“잘됐다, 그럼 저, 우리가 갔던 그 레스토랑 괜찮을까? 내가 가진 돈으로 갈 수 있는 데는 거기가 제일 좋아서…….”
“물론이지, 얼마든지.”
애슐리는 인심 좋게 대답했다.
“네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 가도 좋아. 내 이름을 대면 예약이 가능할 테니까.”
코이가 그런 곳에 함께 갈 사람이라면 고작해야 앨 정도겠지.
애슐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코이의 주변 사람들 정도는 전부 꿰뚫고 있었다. 이전 회사는 그만둔 데다 끝이 좋지 못했으니 거기 직원들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몇 번 만나던 여자들도 대부분 한두 번이 끝이었고, 지금 만나는 상대는 없다. 그런 상황이니 코이에게 남아 있는 상대는 그나마 에리얼뿐이었다.
게다가 에리얼이 그를 전혀 남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건 고등학교 때부터 변함이 없었다. 에리얼에게 코이는 기껏해야 ‘자매’ 혹은 ‘남동생’ 정도였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코이는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애슐리의 생각 따위는 짐작도 못 한 채 감사의 말을 했다.
“고마워, 애쉬. 그러지 않아도 너한테 물어보고 싶었는데…….”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코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애슐리는 절대 대가 없이 뭔가를 제공하지 않았고, 그건 악덕 변호사로서의 기본 덕목이기도 했다.
“대신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응, 얘기해. 뭐든지 다 할 테니까.”
정말 저 버릇 좀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애슐리는 입가가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엉덩이를 때려서 가르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코이의 엉덩이는 그의 다리만큼이나 애슐리가 좋아하는 것이었으니까.
둥근 엉덩이를 때리는 상상을 하자 한쪽 허벅지가 묵직해졌다. 그의 성기가 부풀어 오른 탓이다. 애슐리는 여전히 무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날 얘기할게.”
그리고 애슐리는 한 번 더 강조했다.
“뭐든지 다 한다고 했던 거 잊지 마.”
“응, 물론이지.”
코이는 자신이 뭘 하게 될지 상상도 못 한 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코이를 보며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만 방심해 속마음이 밖으로 나와 버렸다.
“레스토랑에 갈 때 하면 되겠다.”
실수였지만 애슐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역시나 코이는 그래, 하고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몇 번 당하고 나면 저 버릇이 고쳐지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아쉬워졌지만 곧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코이라면 백 번을 당해도 못 고칠 거야.
꽤 근거 있는 확신을 가지고 애슐리가 다정하게 말했다.
“잘 자, 코이. 내일이 무척 기대되는군.”
“응, 나도.”
코이는 기쁘게 말한 뒤 손을 흔들고 다시 문 뒤로 사라졌다. 한결 가벼운 발소리가 이어졌다.
애슐리는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고 미소 띤 입술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이제 날짜가 다 됐다. 마침 벼르고 있던 날과 겹치다니 우연치고는 재밌군.
에리얼이 어떤 농간을 부리더라도 애슐리에게는 막강한 카드가 있다. 그래 봤자 코이는 그의 손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코이는 식사를 무척 기대하고 있겠지만 애슐리가 기대하는 건 그다음이었다. 레스토랑에 가는 게 바로 내일이라니 정말 다행이었다. 그 이상은 정말로 기다릴 자신이 없었으니까.
애슐리는 느긋하게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혼자가 된 방 안에서 흥분한 자신의 성기를 익숙하게 문지르며 생각했다.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 * *
“앨!”
“코이!”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 안았다. 둘의 관계를 아는 애슐리에게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자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잘 지냈어, 코이? 세상에, 얼굴이 핼쓱해 보인다.”
직원이 꺼내 준 의자에 앉은 에리얼이 곧바로 걱정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떤 개자식한테 죽도록 괴롭힘당하고 있는 건 아니니?”
코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응? 아냐, 사장은 그 정도로 심하게 안 했었고 이제 그만뒀는걸…….”
애슐리가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었다. 눈치라고는 먹고 죽으래도 없는 코이에게 당하는 건 애슐리만이 아닌 것이다. 에리얼은 그런 그를 모른 체하고 선뜻 말을 바꿨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여기는 애쉬가 소개해 줬니?”
코이가 선택한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급스럽고 우아한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애슐리가 그를 데리고 왔던 곳이 여기일까? 에리얼의 짐작을 확인시켜 주듯 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번에 같이 왔던 곳인데 회원제라고 해서 애쉬가 도와줬어. 언제든 애쉬의 이름을 대고 와도 된다면서.”
“아하, 그렇구나. 저엉말 잘됐다, 그렇지?”
거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었으나 그것을 코이가 꺠닫건 말건 상관없었다. 나중에 문자로 얘기해 주면 되는 거니까. 역시나 코이는 애슐리를 보며 환한 얼굴로 말했다.
“응, 정말로. 고마워, 애쉬.”
애슐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와인을 마셨다. 곧 겉으로는 즐거운 분위기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물론 실제로 즐거운 것은 코이뿐이었지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