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안녕하십니까, 밀러 씨. 좋은 저녁입니다.”
문을 연 도어맨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애슐리는 별다른 말 없이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그의 앞을 스쳐 갔다. 몇 개의 쇼핑백을 팔에 걸고 손에는 작은 화분을 든 애슐리는 홀을 가로질러 전용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최상층에 멈춰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벤자민, 방문객이 있었나?”
“네? 아.”
도어맨이 황급히 달려와 그의 옆에 서서 대답했다.
“어제 함께 오셨던 손님이 잠깐 외출했다 오셨습니다. 어제 뵈었던 분이라 올려보내 드렸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보는 도어맨에게 애슐리는 별말 하지 않고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 코트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그는 한 손으로 안에 든 지폐를 집어 내밀었다. 도어맨은 당황하면서도 기뻐하는 얼굴로 100달러짜리 지폐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밀러 씨.”
곧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애슐리가 걸음을 옮겼다.
“저.”
엘리베이터 안에 멈춰 선 애슐리에게 도어맨이 말을 걸었다. 과연 자신이 이 말을 해도 좋을지 망설이는 것처럼 눈치를 보며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은 그, 동행하셨던 분이 좀 다치셔서요…….”
도어맨을 바라보는 애슐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 * *
약국에서 사 온 반창고를 마지막으로 붙였을 때, 엘리베이터의 소리가 났다. 코이가 급히 어질러 놓은 약품들을 봉투에 쓸어 담고 주변을 정리하는데, 곧이어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넓은 홀을 가로지르는 빠르고 무거운 구둣발 소리에 코이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다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사이 문이 열렸다 닫히고 다시 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애슐리가 자신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코이는 심호흡을 한 뒤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애쉬, 왔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다음 방을 향해 걷고 있던 애슐리의 넓은 등이 움칠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애슐리와 코이의 눈이 마주치자 코이는 어색하게 웃었고 애슐리의 얼굴에선 핏기가 빠져나갔다.
곧바로 코이를 향해 뛰듯이 빠르게 걸어온 애슐리가 다짜고짜 그의 팔을 붙잡고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이랬어?”
예상했던 것보다 격한 반응에 코이는 당황해 눈을 깜박거렸다. 당연히 놀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는 서둘러 말했다.
“괘, 괜찮아. 많이 다친 건 아냐, 보이는 것만 요란하지…….”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고, 말해!”
그는 정말로 미친 것 같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금빛으로 뒤덮이고, 차가웠던 얼굴은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눈앞에 그 녀석이 있다면 당장 목을 졸라 죽여 버릴 듯한 기세였다.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 코이는 다급하게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애, 애쉬, 애쉬. 괜찮아. 정말이라니까. 보기에만 이런 거야. 화내지 마, 진정해…….”
제발, 코이가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애슐리의 현란하게 일렁이던 금빛 눈동자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평소처럼 보라색 눈동자로 돌아온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조용하면서 차분한, 어딘지 억눌러 참는 듯한 음성으로.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코이는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가 어렵게 웃어 보였다.
“앉아서 얘기해도 돼?”
그 말에 애슐리는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코이를 안아 들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애슐리의 목을 끌어안고 만 코이가 저기, 하고 말을 꺼냈으나 애슐리는 묵묵히 보폭을 크게 해 걸으며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휴게실로 보이는 그곳의 한 쪽 벽에는 술이 뺴곡이 채워져 있는 미니바가 있었고 주변에는 여러 가지 안락한 가구가 놓인 채였다. 애슐리는 그중에서 편안히 몸을 누일 수 있는 완만한 물결 모양의 라운지 체어 위에 코이를 내려놓았다.
앉아서 얘기하자고 했는데…….
왠지 상담을 받으러 온 환자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 애슐리가 몸을 일으켰다.
“또 필요한 건?”
조용한 음성에 코이는 일단 그의 감정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판단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심해서 고개를 젓자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음료수는? 괜찮아?”
“어…….”
잠깐 생각했던 코이는 술이 가득 찬 진열장을 보고 대답했다.
“저, 진저에일에 위스키를 조금 타 줄 수 있을까?”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왠지 민망해져 구차하게 덧붙였다.
“예전에 빌이 만들어 줬었는데 아주 맛있었거든. 저기, 귀찮으면 굳이…….”
말을 하는 도중에 애슐리는 돌아서더니 진열장으로 향했다. 코이는 그 자리에 누운 채 멀뚱거리며 애슐리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
“고마워.”
애슐리가 건네준 글라스를 받은 코이는 반가운 마음에 즉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막 음료를 입에 넣으려는데, 애슐리의 음성이 귀를 가로질렀다.
“위스키는 뺐어. 당분간 술은 마시지 마.”
간발의 차이로 음료가 입 안으로 들어갔다. 알코올이라고는 전혀 없는 단순한 진저에일이었다. 기대한 만큼 실망하고 만 코이가 글라스를 내려놓는데, 얼음도 넣지 않은 위스키를 단번에 들이켜는 애슐리의 모습이 보였다. 왜 넌 되고 난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었다. 눈치라고는 먹고 죽을 만큼도 없는 코이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자, 코이.”
빈 잔을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 봐, 전부.”
몇 걸음 떨어진 위치의 소파에 앉은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내가. 왜 멋대로 나간 거야? 그 상처는 어떻게 된 거고?”
갑자기 신문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코이는 반도 마시지 않은 진저에일이 든 글라스를 두 손으로 쥐고 배 위에서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니까…….”
애슐리의 질문을 떠올리며 순차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아냐. 아니, 맞긴 한데 거기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어…….”
애슐리는 더 이상 다그치지 않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언의 압박에 밀려 코이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사장한테서 연락이 오긴 했는데, 전에 우리가 처음 다시 만났을 때 기억하지? 그 때 내가 경찰서에 잡혀 있었잖아…….”
꾸역꾸역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애슐리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짧은 부연설명을 끝내고 코이가 현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 차를 아직 안 찾아왔더라고. 사장이, 내가 놓고 온 거니까 가져오라고 하면서 아니면 나한테 줄 돈에서 그걸 제하겠다고…….”
코이가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자 애슐리는 그제야 질문을 했다.
“그래서 넬슨의 집에 간 거야? 어떻게?”
이동 수단에 대해 묻는 그에게 코이는 솔직히 대답했다.
“전철도 타고 버스도 타고…… 히치하이킹도 했어.”
애슐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뚫어져라 코이를 바라보던 그가 조용히 물었다.
“별일은 없었고?”
“어? 응. 아무 일 없었어. 다친 건 다른 일 때문에…….”
드디어 본론이 나올 때가 됐다. 애슐리는 이미 다음 얘기를 짐작한 듯했지만 코이는 그래도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넬슨의 집에 갔다가 좀 다퉜어. 상처는 그래서 생긴 거야. 하지만 괜찮아, 차는 찾았거든. 트럭도 돌려주고 수표도 받아 왔어. 그게 다야.”
코이는 이제 모두 해결했다는 듯 입을 벌려 웃으려다 그만 아, 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찢어진 입술이 아려 와 급히 손을 가져갔던 그는 손가락에 묻어난 선명한 피를 보고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애슐리가 슈트의 상의에 꽂혀 있던 행커치프를 꺼냈다.
“고, 고마…….”
자신에게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직접 코이가 누워 있던 라운지 체어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코이의 입술을 행커치프로 눌러 주었다. 엉거주춤 허공에 멈춰 버리고 만 손을 어색하게 내리자 지혈을 위해 지그시 힘을 주어 입술을 누르고 있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다는 건 알겠어.”
조용한 음성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코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심 궁금해하기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하면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애슐리가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코이, 네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면 지금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았을 거야.”
그 말에 코이는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거렸다. 일단 진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주변에는 애슐리에게서 퍼져 나온 페로몬이 짙게 깔려 있었으나 코이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애슐리의 보라색 눈동자에 설핏 어리는 금색이 약간이나마 그의 분노를 전해 줄 뿐이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변호사에겐 아무것도 숨겨선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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