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여, 여보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와 급히 헛기침을 하자 애슐리가 물었다.
- 괜찮아?
“어? 응. 그냥 목이 좀 갈라져서.”
사실대로 말하자 애슐리는 사이를 뒀다가 입을 열었다.
- 몸은 괜찮냐고.
“아.”
그제야 의미를 파악한 코이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어…… 응, 괜찮아. 고마워.”
코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두드려 댔다. 바보 멍청아! 고맙다는 말은 왜 해! 찰싹거리는 소리가 들렸는지 건너편에서 미심쩍어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 왜 그래? 무슨 소리야?
“어? 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정말로, 진짜 아무것도 아냐.”
같은 말을 반복하며 부정하자 애슐리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 사장과는 얘기 끝냈어. 너한테 직접 연락한다고 했는데, 받았어?
“아, 메시지 왔었어. 고마워.”
이번에는 제대로 된 대답을 했다. 말을 하고 보니 그에게 급여에 관한 상담을 한 게 바로 어제 일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거기다 애슐리가 오늘 출근하자마자 이 일을 처리했다고 해도 고작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빨리 해결이 됐어……?”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동부 최고의 변호사라는 말이 갑자기 머리를 스쳤다. 그의 수임료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도. 코이의 멍한 목소리에 애슐리가 대답했다.
- 고작 전화 한 통이면 끝나는 일이니까.
웃음을 머금은 음성에도 여전히 코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에겐 그렇게 막막했던 일이 애슐리에게는 이렇게 간단하고 쉬웠다니.
“이러니까 다들 널 최고라고 말하나 봐…….”
멍한 음성과 대조적으로 애슐리는 명료하게 말했다.
- 난 변호사야. 설득하는 것이 내 직업이지.
여유 있는 남자의 목소리에 코이는 심장이 두근, 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멋있어, 애쉬.”
저도 모르게 황홀한 음성으로 말하자 건너편에서 애슐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여서, 코이는 마음이 풀어졌다. 여전히 웃음의 여운이 남은 음성으로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 식사는 했어? 냉장고에 샌드위치가 있을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인터폰을 눌러서 데스크에 얘기하면 돼, 뭐든 가져다줄 테니까.
“아, 응. 고마워. 저기, 너는? 점심 먹었어?”
벌써 오후가 돼 버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 보았던 코이가 묻자 애슐리는 대답했다.
- 비서가 준비 중이야. 회의를 하면서 먹을 거거든.
“아…….”
회의 중간에 잠깐 쉬는 틈을 타 코이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코이는 바쁜 와중에 애슐리가 결과를 알려 주려 몇 번이나 전화했다는 걸 알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쁠 텐데 그만 끊을게, 신경 써 줘서 고마워.”
- 천만에. 메시지를 받았는지 확인하려고 했을 뿐이야.
아, 그렇지.
애슐리의 말에 잠깐이나마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인사를 마무리하고 통화를 끝내려는데, 애슐리가 그를 불렀다.
- 코이.
“어, 응.”
황급히 다시 휴대 전화를 귀로 가져가자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 저녁엔 일찍 갈게. 지루하더라도 참아.
“응, 걱정하지 마. ……저기, 몇 시 정도에 와?”
코이는 시계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글쎄, 8시쯤?
다행이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막 인사를 하려는데, 애슐리가 덧붙였다.
- 코이, 오늘은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쉬어. 할 수 있지?
코이는 그래, 하고 통화를 끝냈다. 후,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메시지를 확인했다. 방금 전 애슐리가 당부했으나 코이는 그 말에는 따를 수 없었다.
이 정도는 내가 해결해야지.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나갈 준비를 했다.
〈할 수 있지?〉
막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 찰나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할 수 있지?’라고 물은 걸까? 고개를 갸우뚱했을 때 마침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코이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 *
단 한 번 왔던 길을 되짚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사장에게 전화해 다시 주소를 받아 버스와 전철을 몇 번 갈아탄 뒤 히치하이킹까지 한 뒤에야 비로소 목적지에 다다랐다.
[돈은 주겠다. 하지만 그 전에 네가 버리고 온 그 차를 찾아와. 그러지 않으면 그 차 값을 제하고 돌려줄 거야.]
사장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코이는 심호흡을 했다.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저택은 지난번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저택 앞에 여러 대의 승용차가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는 모습까지도 그대로였다. 다만 코이가 타고 왔던 회사 트럭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코이는 마음을 다잡고 벨을 눌렀다. 가늘고 단조로운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곧 문이 열리고 고용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한 차례 전신을 훑어본 남자의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며 코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 전에 여기 수리를 하러 왔다가 그, 사고가 나서 경찰서에 갔었는데요. 그때 트럭을 두고 가서 지금 가지러 왔습니다.”
준비했던 말을 꺼내자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일단 들어와요. 알아보고 올 테니.”
감사의 말을 한 코이가 저택에 들어와 홀에 멈춰 서자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코이는 내심 불안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휴대 전화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예정보다 많이 늦었다. 애슐리가 돌아오기 전에 집에 들어가 있어야 걱정하지 않을 텐데.
‘할 수 있지?’
애슐리의 말이 또다시 떠올라 그만 초조해졌을 때였다. 멀리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마른침을 삼킨 뒤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예상했던 얼굴이 보였다. 넬슨이었다. 자다 일어난 듯 잠옷 위에 실내 가운을 걸친 데다 얼마 있지도 않은 머리칼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코이는 표정이 굳는 것을 느끼며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야, 찐따.”
넬슨이 이죽거리는 얼굴로 그를 불렀다. 넬슨의 뒤를 따라왔던 남자는 코이가 주인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곧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비켰다. 급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흘긋 보았던 코이가 다시 넬슨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는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어딜 감히 내 앞에 나타나?”
“내, 차를 가지러 왔을, 뿐이야.”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 더듬어지고 몸이 떨렸다. 넬슨을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전혀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에게 수시로 얻어맞던 코너 나일즈로 순식간에 되돌아간 자신을 열심히 격려하며 코이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넬슨에게 그는 그저 자신의 샌드백이나 다름없던 동급생일 뿐이었다.
“야, 이 병신 새끼야.”
곧바로 넬슨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다행히 슬리퍼를 신은 발이라 큰 타격은 없었지만 방심했던 터라 코이는 그만 비틀거리고 말았다. 그런 코이를 보며 넬슨은 만족스러운 듯 히죽거렸다.
“구정물이나 만지는 자식이, 어디서 감히 나불나불 지껄여 대?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아, 알아.”
코이는 어색하게 정강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넬슨은 그를 내려다보며 만족감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얻어맞기 싫으면 알아서 기었어야지. 어? 확, 그냥.”
보란 듯이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머리를 감쌌다. 넬슨이 캬하하하하, 신경에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꺾어 가며 웃던 넬슨이 코이의 다리를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야, 너 엎드려.”
“어?”
코이가 멈칫하자 그는 다리를 쩍 벌리고 명령했다.
“기어 봐, 네발로. 꿀꿀거리면서.”
고등학교 때 몇 번이나 당했던 짓이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인데도 기억이 생생했다. 코이는 금세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으나 거역할 수가 없었다. 몸이 굳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혹시 그를 거슬렀다가 차를 돌려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어서 돌아가야 돼.
지난번과는 다르다. 지금은 넬슨과 단 둘이 있으니 코이가 마음 먹으면 예전처럼 당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능성 없는 쪽에 배팅을 하는 것보다 코이는 확실하고도 더 손쉬운 쪽을 택했다.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지나가는 게 뭐가 대수란 말인가.
코이는 딱딱해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바닥에 손을 댔다. 넬슨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흥미진진하게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코이는 개처럼 네발로 엎드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막 머리가 그의 다리를 지나가는 찰나, 넬슨이 폭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너 같은 병신이랑 어울려다니는 걸 보면 애슐리 그 자식도 그냥 찐따 새끼라니까.”
순간 코이가 멈칫했다. 넬슨은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멋대로 떠들어 댔다.
“지가 잘난 척해 봤자지, 덜떨어진 새끼. 너랑 어울릴 정도면 얼마나 찐따인 거야? 그 새끼도 돼지처럼 기어 다니냐? 너처럼?”
꿀꿀, 꿀꿀, 돼지 소리를 내며 넬슨이 키득거렸다. 그대로 굳져 있던 코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귓가에 넬슨의 웃음소리와 돼지 울음소리가 뒤섞여서 들려왔다. 그는 참지 못하고 넬슨의 다리를 잡아 세게 끌어당겼다.
“어억?”
괴상한 소리를 내며 넬슨이 휘청거렸다. 우당탕, 하고 볼품없이 나동그라진 그의 모습에 곧바로 몸을 일으킨 코이가 내뱉었다.
“애쉬를 모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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