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216)

174화

놀란 코이는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아, 아냐, 그런 게. 정말 아냐.”

- 아니면 뭔데? 왜 갑자기 얘기가 그렇게 됐느냐고. 어제 있었던 일 말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에리얼의 시퍼런 서슬에 밀려 코이는 띄엄띄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코이가 조금이라도 대강 얼버무리려하면 에리얼은 즉시 그를 다그치며 솔직히 다 말하라고 위협을 했다. 결국 코이는 저녁 식사로 각자 뭘 먹었는지까지 시시콜콜 다 털어놓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둘이 어떻게 해서 자게 됐는지에 다다르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은 쿵쾅거리고 손과 발이 저려 와 제대로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런 코이의 상황을 눈치챈 에리얼이 선수를 쳐 말했다.

- 그러니까 그 자식이 널 덮쳤다는 얘기지?

“아, 아냐.”

코이는 화들짝 놀라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상황이 어쩌다 그렇게 됐어. 그러니까, 분위기가 그랬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무슨 얘긴지 알지?” 하고 묻자 에리얼이 건너편에서 가차없이 내뱉었다.

- 분위기에 휩쓸린 건 너겠지. 그 자식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으니까.

“아냐, 애쉬도 그랬어. 우리 둘 다 그랬다니까? 알잖아, 애쉬는 날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고.”

코이는 열심히 에리얼의 말을 부정했으나 그녀는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다. 자기 발로 애슐리의 소굴에 굴러들어 가다니, 설마 그 자식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거기다 코이가 자기 집에 들어가자마자 홀라당 잡아먹을 줄이야.

내가 방심했어.

에리얼은 이를 갈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귀는 내내 키스밖에 안 했다고 해서 설마 했는데, 하루 만에 모든 진도를 다 빼 버릴 줄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코이가 그와의 관계를 친구라고 굳건히 믿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에리얼과의 약속은 잘 지켰다. 아직 기회는 있다. 둘은 섹스만 했을 뿐이니까.

이상한 건 베타인 코이가 어떻게 관계를 했느냐는 것이다. 그냥 알파도 아닌 ‘극알파’와.

에리얼은 궁금했으나 섹스 과정까지 말하라는 건 지나친 요구였고 변태 같았다. 코이에게 그런 수치심을 안겨 줄 생각도, 거기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코이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지 않은 걸 보면 애슐리가 적당히 선을 지킨 모양이었다. 적당히만 한다면 알파와 섹스를 못 할 것도 없으니까.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야.

에리얼은 최대한 냉정하게 생각을 굴렸다. 일단 상황을 지켜볼까? 코이는 지금 둘의 관계가 친구라고 굳건히 믿고 있으니까 당장 급할 건 없어. 애쉬 그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부터 확인해야겠어.

- 코이, 확실히 말해 두겠는데 친구끼리는 섹스하지 않아.

코이는 다른 때와 달리 머뭇거렸다. 심상치 않은 침묵을 눈치챈 에리얼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 왜 대답 안 해?

“어, 그게, 하지만…….”

코이는 주저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하고 빌은 했잖아…….”

이 자식이.

눈앞에 코이가 있었다면 목을 잡고 딸딸 흔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너네랑 같아? 같냐고!

하지만 여기서 차이점을 지적할 수는 없었다. 그들 역시 어쩌다 분위기상 그렇게 된 건 맞지만 그전에 먼저 미묘한 감정이 오가고 있었고 섹스를 통해 사귀는 사이로 확정이 된 것이었다. 둘은 친구니 뭐니 하면서 가식을 떨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 그런 얘기를 했다가 괜히 엉뚱한 가능성을 열어 버릴 순 없었다. 둘이 섹스를 한다고 해서 꼭 사귀게 되는 건 아니니까. 에리얼은 주먹을 꽉 쥔 채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 내가 전에 당부한 건 다 그대로 했지?

“응. 애쉬는 내가 예전에 사귄 사람이 많은 줄 알아. 알파와도 잤다고 했더니 믿더라고.”

퍽이나 그걸 믿겠다.

코이는 자신있게 말했으나 에리얼은 터지는 속을 참기 위해 다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자기 전이라면 몰라도 자 버렸으니 그 계획은 폐기다. 에리얼은 플랜B로 방향을 바꿨다.

- 코이, 언제까지 거기 있을 예정이야? 애쉬가 그건 뭐라고 얘기 안 해?

코이는 나름대로 추측을 해봤다.

“어…… 아마도 돈을 받을 때까지 아닐까?”

- 최대한 빨리 해 달라고 해. 너 돈 없는 건 그 자식도 알고 있으니까 솔직하게 방세 낼 돈도 부족하다고 얘기하고.

“알았어.”

차릴 체면도 자존심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코이는 순순히 대답했다. 에리얼이 계속해서 말했다.

- 그리고 돈 받게 되면 나하고 애쉬한테 식사 한 번 사 줘. 따로 사면 돈 두 배로 드니까 한꺼번에 셋이 만나면 되겠다.

“어, 아, 그래. 당연하지,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어.”

둘 덕분에 받게 되는 돈이니만큼 당연히 사례해야 한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저, 정말 괜찮겠어? 애쉬와 함께 만나도.”

- 괜찮아, 오랜만에 옛날 얘기나 하지 뭐.

흔쾌히 돌아온 말에 코이는 안도하며 그녀에게 깊이 감사했다. 친구의 주머니 사정까지 고려해 상대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접어 준 우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워, 앨. 항상 감사하고 있어.”

- 그건 알고 있으니까 됐고, 적당히 해. 섹스하다 응급실 실려 가고 싶지 않으면.

마지막 충고에 코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한편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머뭇거리다 작게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애쉬와 자지 말라고 할 줄 알았어…….”

코이의 말에 에리얼은 코웃음을 쳤다.

-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안 잘 거야? 잘 거잖아.

코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역시나, 하고 에리얼은 생각했다. 코이는 그 자식을 아직도 좋아하고 있으니 당연히 이건 기회겠지. 애슐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최악의 경우 둘이 연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주도권은 코이가 가져야 한다. 절대 그 거만한 자식이 우위에 서는 꼴은 봐줄 수 없었다.

문제는 코이가 밀당이라는 걸 죽어도 못 한다는 사실이었다. 쉬운 거짓말조차 제대로 못하고 그대로 속을 드러내는 코이가 상대를 주무르며 연애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리얼은 그런 코이를 잘 알았고, 그래서 다른 방법을 썼다.

- 지난번에 사라하고 약속 깼던 건 어떻게 됐어? 앞으로 만날 예정은 없어?

“아, 물론 다시 만나고 싶어. 돈을 받게 되면 그다음에…….”

코이가 황급히 대답하자 에리얼은 부드러운 말투를 꾸며 내 말을 이었다.

- 일단 연락이라도 해, 아무 얘기도 안 하면 그쪽에서 오해할 테니까. 그냥 바빠서 연락 못 했다, 미안하다 정도로 하고 시간 언제쯤 되는지 물어봐.

당장은 만나기 어렵다는 말을 하려는 코이에게 에리얼이 덧붙였다.

- 꼭 돈이 있어야 데이트를 하는 건 아니잖아? 애쉬한테 물어봐, 걘 동부 토박이니까 아는 것도 많을걸. 널 다시 만나기 전에 데이트도 많이 했을 테니까.

에리얼은 슬쩍 말을 흘렸다. 코이는 애슐리가 결혼 직전까지 갔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어…… 응, 그렇겠지. 맞아.”

코이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사귀던 사람도 있겠지, 물론.”

흐리멍덩한 중얼거림에 에리얼은 그가 아직 모르고 있다고 짐작했다. 일단 이 카드는 다음에 쓰기로 하고 그녀는 말을 돌렸다.

- 그럼 잊지 말고 사라한테 메시지 넣어 줘. 소개한 나나 개럿의 입장도 있는 거니까 부탁해.

“물론이지. 미안해, 매번…….”

- 괜찮아. 그럼 내일 또 통화하자.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알았어.”

때마침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전화를 끊고 확인하자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와 있었다. 전부 애슐리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에게 전화하기 전에 먼저 다른 메시지를 확인했던 코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사장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떨리는 마음에 심호흡을 한 후 메시지를 확인한 코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가 이내 당혹감으로 굳어졌다. 메시지 내용을 몇 번이나 반복해 읽었던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떡하지.

고민에 잠겨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고민을 거듭했다. 다른 방법은 없다. 그냥 하는 수밖에.

결심을 했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라 황급히 화면을 확인한 코이가 당황해 아, 하고 탄식을 뱉었다. 애슐리에게서 온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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