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216)

173화

애슐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래쪽에서 코이가 종알거렸다.

“넌 알파니까 오메가와 섹스하는 게 당연하잖아. 지금껏 그랬을 거고…… 그런 얘기는 그냥 습관이라서 한 거였겠지, 난 신경 쓰지 않아. 괜찮아.”

코이는 뭔가를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슐리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대체 코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최소한 애슐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말들은 전혀 아니었다.

“코이.”

“어, 응.”

열심히 되는대로 주워섬기던 코이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애슐리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하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겠는데, 어제 우리가 뭘 했는지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아?”

경계하듯 가라앉은 목소리에 코이는 마른침을 삼킨 뒤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꾸며 내 대답했다.

“당연히 잘 알고 있어. 우리 관계가 어떤 건지도. 걱정 마, 네게 좋은 사람이 생기면 난 서부로 돌아갈게.”

자신에게 장점이 있다면 주제 파악을 잘하는 거라고 그는 예전부터 생각해 왔다. 지금은 더더욱 그럴 때다.

괜히 들떠서 선을 넘으면 안 돼.

코이는 자신에게 경고했다. 둘은 친구다. 애슐리는 둘의 관계를 이미 명확히 했다.

단지 애슐리에게 섹스 상대가 필요하니까, 특정한 누군가가 생길 때까지만 섹스‘도’ 하는 친구가 된 것뿐이다. 그런 사람이 생기면 코이는 두말 않고 다시 평범한 친구로 돌아갈 것이다. 아예 눈에 띄지 않게 서부로 가 버릴 각오도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는 옆에 있어도 되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코이는 급히 숨을 억눌렀다. 애슐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은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애슐리는 뭐라고 반응할까?

“……그래?”

한참 만에 애슐리가 물었다. 차분하고도 조용한 음성에 흠칫 놀랐던 코이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이 나오기까지 있었던 묘한 침묵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의심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코이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황급히 덧붙였다.

“그래, 정말 괜찮아. 몸도 아무렇지 않아. 말했잖아, 난 알파들하고도 자 봤다고…….”

이건 진심이었다. 저리고 힘이 풀려 제대로 몸을 가누기 어려웠으나 신기하게도 애슐리가 경고한 것처럼 밑이 찢어졌다거나 배 속이 엉망이 돼 버린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내가 그런 쪽으로 타고난 건 아닐 텐데.

코이는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애슐리가 자신을 걱정해 괜히 과장된 말로 겁을 준 것이라고.

다정한 애쉬, 역시 넌 정말 착해.

그에 대한 감사와 감동으로 코이는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애슐리에게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스스로가 기특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을 때였다.

“……아!”

애슐리가 코이의 허리를 안은 채 배를 쓰다듬던 손에 힘을 줬다. 배에 전해지는 압박감에 저절로 짧은 숨과 함께 비명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애슐리는 힘을 풀기는커녕 더 세게 배를 눌렀다.

코이가 자신도 모르게 버둥거렸으나 애슐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강하게 눌러 댔다. 그의 손이 배 한쪽을 세게 누른 순간, 코이는 그만 놀라 온몸이 굳어졌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고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애슐리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있잖아, 여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완전히 늘어진 채 헐떡거리는 코이를 잠자코 내려다봤던 애슐리가 갑자기 그를 안아 들었다. 코이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숨만 쌔근거렸다.

애슐리는 엉망이 된 침대를 지나쳐 다른 방으로 향했다. 누구도 사용한 흔적이 없는 깔끔한 침대 위에 코이를 내려놓은 애슐리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 이마에 키스를 한 후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방에서 나간 애슐리가 곧바로 샤워를 끝낸 뒤 출근 준비를 했다. 화이트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는데 휴대 전화의 벨 소리가 들렸다. 비서의 전화였다.

- 밀러 씨, 괜찮으십니까? 시간이 지났는데 출근을 하지 않으셔서요.

익숙한 음성에 애슐리는 귀와 어깨 사이에 휴대 전화를 낀 채로 대답했다.

“별거 아냐, 러트가 왔었어.”

- 네? 지금은 기간이 아니실 텐데요.

비서가 흔치 않게 놀란 음성을 냈다가 황급히 사무적으로 되돌렸다. 애슐리는 커프링크스를 고르며 말했다.

“그래, 기간도 짧고 러트 후에 의식을 잃는 시간도 아주 짧았지. 하지만 러트가 맞아.”

그 감각을 착각할 수 있을까? 벌써 10년을 넘게 경험해 왔는데.

이상한 것은 너무나 갑작스레 찾아온, 예기치 않은 이상 증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기간도 짧고 으레 있는 후유증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 클리닉에 예약을 해 둘까요?

비서가 물었다. 아마도 스케줄을 뒤적이며 확인하고 있을 게 분명한 그녀이기에 애슐리는 쓸데없는 수고를 미연에 방지했다.

“그냥 둬, 별거 아냐.”

정말 사소한 일이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예기치 않은 러트 따위가 아니었다.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후 지시를 내리며 출근 준비를 마쳤다. 에스프레소를 뽑아내 손에 든 애슐리가 거실을 가로질러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말했다.

“오늘 저녁 파티는 가지 않겠다고 전해. 기부금은 100만 달러 내고.”

- 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했을 때 애슐리는 버튼을 눌렀고, 곧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애슐리는 커피를 마시며 바뀌는 숫자판의 번호를 응시했다.

섹스 프렌드라니.

화가 치밀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어디서 그런 못된 말을 배워 와서는.

고속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지상에 당도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큰 보폭으로 아파트의 홀을 가로지르며 애슐리는 생각했다.

다시 내 귀여운 코이로 되돌려 놓겠어.

“잘 다녀오십시오.”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도어맨의 뒤로 애슐리는 보지도 않고 빈 컵을 던져 버렸다. 에스프레소가 담겨 있던 컵은 멋지게 휴지통 안으로 골인했다.

* * *

“으으으으…….”

저절로 흘러나오는 앓는 소리에 정신이 조금씩 깨어났다. 코이는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걸 알고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겨우 눈을 뜨자 또다시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아까까지 있었던 방보다는 작지만 이 역시 크고 넓었으며 감탄할 만큼 비싸 보이는 가구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가 보송보송하니 잘 말라 있다는 걸 확인하고 코이는 잠시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애슐리 말고는 이렇게 해 줄 사람이 없다. 곧이어 마지막 기억이 되살아나 자신도 모르게 배로 손을 가져갔다. 아까의 통증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런 걸까?

도무지 애슐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애슐리가 말한 친구의 선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어째서 화를 내는 걸까.

괜히 서러워져 침울한 표정이 되어 버린 코이는 늘어져 있던 어깨를 펴고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내가 기분을 상하게 한 게 있었겠지. 물어보면 애슐리는 대답해 줄 것이다. 코이는 그를 믿고 있었다.

아침보다는 나아진 몸을 일으켜 간신히 복도로 나온 그는 믿을 수 없는 적막감에 무심코 숨을 죽였다. 가만히 귀를 곤두세웠으나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면에 보이는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환한 빛은 지금이 한창 일할 시간이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자신도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한가함이라니 왠지 얼떨떨했다.

코이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계속되는 고요함은 코이가 혼자라는 사실을 뚜렷이 알게 해 줬다. 일단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정리해 둔 그가 뒤늦게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메시지는 한 건이었으나 가장 강력했다.

[어떻게 됐어? 결과 알려 줘.]

에리얼의 문자를 본 코이는 잠깐 망설였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언제 시간 돼? 전화할게.]

답은 즉시 돌아왔다.

[지금 당장 해.]

순간적으로 달아나고 싶어졌으나 에리얼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코이는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내쉰 후 전화를 걸었다. 3초도 지나지 않아 에리얼이 전화를 받았다.

- 어떻게 됐어? 그 개자식은 만났니?

다짜고짜 묻는 말에 코이는 당황해 더듬거리며 말했다.

“개자식이라니…… 애쉬를 그렇게 말하지 마.”

작게 나무랐지만 돌아온 건 코웃음뿐이었다.

- 바로 알아듣는 거 보면 개자식 맞네.

할 말이 없어져 코이는 그래도, 하고 작게 웅얼거리기만 했다. 그런 코이를 내버려 둔 채 에리얼이 말을 이었다.

- 만난 거지? 어떻게 됐어? 당연히 맡겠다고 했을 거고.

“뭐, 뭐라고 말한 거야? 애쉬가 직접 전화했던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자 에리얼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 진심으로 코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면 협력하라고 했지.

아, 하고 코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슐리가 그에게 했던 말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친구가 되자는 말도 마찬가지로 진심이었겠지.

감사한 한편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나마 자신이 섹스 프렌드라도 하자고 제안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쉬의 호의를 이용한 것 같지만…….

“난 수임료도 못 내는데…… 애쉬는 비싸잖아.”

- 괜찮아, 걘 평생 펑펑 쓰고도 남을 만큼 돈이 많은데 뭐가 어때서? 변호사로서 좋은 일도 한 번은 해야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 결론만 빨리 말해 봐, 얼른.

성급하게 재촉하는 말에 코이는 눈을 질끈 감고 고백했다.

“자…… 잤어, 애쉬랑.”

건너편에서 싸늘한 침묵이 느껴졌다. 몇 초의 공백이 이어진 후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 지금 뭐라고 했어? 잤다고? 애슐리 밀러랑 너랑?

“으…… 으응.”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하자 잠시 조용하던 에리얼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 그 망할 새끼가 수임료를 몸으로 내라던?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7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