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감은 눈꺼풀 너머로도 느껴지는 환한 햇살에 코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두덩이 붓고 부석거려 눈을 뜨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지만 몇 차례 눈꺼풀을 움칠거린 후 겨우 조금씩 눈을 뜰 수 있었다.
“아윽…….”
불쑥 배 속이 저릿하게 떨려 왔다. 자신도 모르게 으윽, 신음 소리를 냈던 코이는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허리에 둘러져 있는 묵직한 감각을 느낀 것은 그다음이었다. 천천히 내린 시야에 자신의 벗은 몸이 들어오고, 이어서 허리를 안고 있는 두꺼운 팔이 보였다.
아, 그만 입 밖으로 탄성이 나오고 말았다. 뒤늦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기억해 냈다.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귀가 화끈거렸다. 코이는 반사적으로 귀를 움켜쥐었다가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 아냐.
등 뒤로 느껴지는 체온은 너무나 확실했다. 그의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의 주인도 누군지 그는 알고 있었다.
애쉬랑 잤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정말이다. 진짜로 애슐리와 잤다. 드디어, 마침내!
애슐리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고르고 평온한 숨결이 목뒤로 느껴져 코이는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움직였는데도 온몸이 삐걱거렸다. 입가로 새는 신음을 어쩌지 못하고 코이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
순간적으로 비명이 나올 것 같아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배 속에서 뭔가가 쑥 빠져나가 생각지 못한 허탈함과 함께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해졌다. 뒤늦게 코이는 깨달았다. 애슐리의 성기가 그때까지 자신의 안에 있었다는 걸.
잠들기 전까지 그렇게 집요하게 자신을 안았던 애슐리는 깊이 잠든 채였다. 평소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머리칼은 이마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감고 있는 눈의 긴 속눈썹도, 곧게 일어선 콧대도, 넓고 긴 입술까지도 흡사 천사처럼 아름답고 선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코이는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문득 찬 바람이 어깨를 스쳤다. 무심코 몸을 떨었던 코이는 그때까지 창문이 열려 있었음을 깨달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걸핏하면 감기에 걸렸던 애슐리가 떠올라 그는 온몸이 쑤시는 것을 참고 어기적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으억.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주저앉았다. 도무지 허리를 펼 수도, 일어설 수도 없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코이는 그 상태로 두 팔을 짚고 상체를 숙인 채 한동안 버텼다. 간신히 엉덩이를 들어 개처럼 네발로 기어가려는데.
“히…….”
몸을 일으킨 순간 배 속에서 뭔가가 흘러나왔다. 다급하게 한 손으로 입을 막아 비명 같은 숨소리를 틀어막은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그 자리에 멈췄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아래쪽에서는 자꾸만 체액이 새어 나왔다. 애슐리의 성기는 빠져나갔지만 대신 그 자리엔 다른 것이 가득 차 있었다.
애슐리가 코이의 배 속에 얼마나 많이 사정을 했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것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배 속을 빈틈없이 틀어막았던 감각도 아직 생생했다.
알파는 항상 이런 섹스를 하는 걸까.
코이는 절감하며 느릿느릿 몸을 움직였다. 자신의 옷은 복도에 던져 놨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대신 애슐리의 셔츠를 주워 어렵게 팔을 꿴 뒤 대충 단추를 채웠다. 다행히 바지는 자신의 것을 주워 입은 뒤 비틀거리며 창으로 향했다. 커다란 창의 손잡이 잡고 팔에 온 힘을 다한 뒤에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아아…….
창틀에 기대서서 깊이 숨을 들이켰던 코이는 슬슬 창을 닫으려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시야에 끝없이 펼쳐진 새파란 하늘만큼이나 거대한 공원이 들어왔다.
처음 동부에 왔을 때 들러 봤던 넓은 공원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어 신기하고 재미있어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공원을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기다 함께 시야에 들어오는 도시의 정경은 화려하면서도 오밀조밀하게 잘 짜여 있어 경탄을 자아냈다. 서부와는 달리 매캐한 공기에 이따금씩 목이 따가워졌었는데, 여기는 공기마저 상쾌했다.
코이는 눈을 크게 뜬 채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시야에 벅찬 감동마저 느꼈을 때.
……어?
문득 들어온 광경에 코이는 그대로 눈을 고정하고 말았다. 비스듬히 보이는 같은 높이의 건물 창에는 코이가 서 있는 곳과 동일한 구조의 발코니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발코니에 나와 있는 남자의 모습까지도,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남자가 발코니의 난간에 앉아 있다는 것 말고는.
거기다 완벽한 나체였다.
코이는 그만 정신이 멍해졌다. 눈앞에 들어온 정경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천사다.
그는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저런 곳에서 저런 모습으로, 저렇게 태연하게, 게다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건 인간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햇빛에 반짝이는 은발은 부드럽게 바람에 휘날렸고, 반쯤 뜬 눈매는 길고 깊었으며, 단정한 콧대와 살며시 열린 붉은 입술까지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다. 거기다 크림처럼 하얗고 투명한 살결은 한번 만져 보고 싶을 만큼 부드러워 보였다. 한 손은 난간을 짚고 남은 손에 든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마저도 성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
정말 천사가 내려와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게 아닐까?
입술을 둥글게 모아 들이마신 연기를 천천히, 길게 내뱉는 모습을 보며 코이는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구름을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으악!”
갑자기 누군가 허리를 낚아채 끌고 갔다. 창틀에 기대어 있는 것도 힘들 정도였던 코이는 낙엽처럼 간단히 그의 품에 안겨 버렸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여기서?”
조용한 음성이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코이는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체온을 느끼며 뒤늦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애슐리가 깬 모양이었다.
“창문을, 닫아 주려고…… 너, 감기에 자주 걸리잖아.”
애슐리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심 조마조마해하고 있는데, 애슐리가 고개를 숙이더니 코이의 목에 코를 묻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는 괘념치 않고 몇 번이나 그렇게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한 팔로 허리를 안은 채 남은 손으로 코이의 배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
어리둥절해하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어제 내가 심하게 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음성에는 후회나 씁쓸해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오히려 웃음을 머금은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목소리에, 코이는 눈을 깜박이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와 함께 지난 기억이 일시에 밀려왔다. 애슐리가 자신을 끌어안고 했던 말도.
〈임신시켜 줄게.〉
그리고 또.
〈임신 축하해, 코이.〉
말도 안 돼.
코이는 당황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자신은 베타인데 어떻게 임신을 한단 말인가.
애쉬는 러트가 왔었어.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거였겠지.
아니면 혹시 나를 오메가라고 상상하면서 섹스를 했던 걸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꾸만 배를 쓰다듬는 손에 더욱 마음이 복잡해졌다.
섹스 프렌드를 하겠다고 한 건 나잖아.
코이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애슐리가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 나도 거기에 맞춰야지.
“어제…… 괜찮았었어?”
코이가 조심스럽게 묻자 애슐리는 웃음이 섞인 음성으로 코이의 가마에 입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주 좋았어.”
다행이다.
코이는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씁쓸함은 남았지만 애슐리가 만족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지 못했다면 그는 언제고 다른 사람과 자러 가겠지.
제대로 된 오메가와.
“코이.”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줘 바짝 끌어당기며 애슐리가 속삭였다. 얇은 바지의 천 너머로 묵직한 성기가 느껴졌다.
그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코이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지난밤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워져 코이는 질끈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애슐리가 여전히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어제,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고 있어?”
순간 얼굴은 귀까지 달아올랐으나 가슴 한구석에는 씁쓸함이 퍼졌다.
“어, 으, 으응.”
더듬거리며 대답하는 와중에도 머리는 미친 듯이 움직였다. 애슐리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뭘까? 나한테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그야 뻔하지.
코이는 애슐리가 말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 말을 꺼냈다.
“걱정하지 마, 그냥 한 소리라는 거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린 그냥 섹스만 했을 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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