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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165/216)

165화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텅 빈 욕실 안에 홀로 서서 코이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현실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 주는 도어맨이라든지, 한쪽 벽에 가득 찰 정도로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는 홀이라든지, 사방이 어두운 반투명 유리로 덮인 엘리베이터는 물론이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하 전체가 들어가고도 남을 넓은 거실과 목이 꺾어질 정도로 높은 천장,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복층 구조의 넓고 넓은 실내까지.

애슐리의 안내로 욕실까지 들어왔지만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이게 전부 다 꿈인 건 아니겠지?

멍한 눈을 깜박거렸던 코이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세게 쳤다. 찰싹, 소리에 이어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작게 앓으면서 뺨을 감싸 쥐고 말았다.

꿈은 아닌데.

아직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현실을 간신히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씻을 준비를 시작했다. 넓은 욕실 정면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욕조가 있었는데, 맞닿은 벽엔 커다란 창이 있어 야경을 내려다보며 목욕을 즐기기에 충분한 구조였다. 거기다 유리 벽으로 나뉘어 있는 샤워룸 벽은 온통 크고 작은 천연석이 가득 박혀 있어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화려하고 깨끗한 욕실은 처음이야.

애슐리의 호의에 감사해하면서도 차마 욕조를 쓸 용기는 나지 않았다. 가볍게 샤워만 하려 했으나 막상 옷을 벗자니 놓아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어디에 올려놔도 자신의 더럽고 낡은 옷 때문에 욕실이 더러워질 것 같아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욕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자 곧이어 애슐리가 문을 열었다.

“코이? 괜찮아?”

“어? 아, 응.”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그를 애슐리는 짧게 훑어보았다. 아직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는 걸 확인한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들고 온 옷을 세면대 옆 빈 공간에 올려놓았다.

“씻고 갈아입어. 내 잠옷이라 좀 크긴 할 텐데 이것밖에 없어서.”

“아, 응. 고마워.”

코이가 감사의 말을 하자 애슐리가 나가기 전에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어?”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없어, 괜찮아.”

애슐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렸다. 그대로 나가려는 애슐리를 코이가 뒤늦게 불러 세웠다.

“저기, 애쉬!”

걸음을 멈춘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코이는 상기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벗은 옷은, 어디에 둬?”

애슐리는 세면대 밑을 가리켰다. 커다란 라탄 바구니를 발견한 코이가 아, 하고 고개를 들자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애슐리가 보였다. 아직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더 필요한 게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저, 저기…….”

코이는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샤워기, 어떻게 사용하는지 좀 알려 줄 수 있어? 저런 건 처음 봐서…….”

말꼬리가 점차 사그라져 침묵으로 이어졌다. 코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욕실의 시설은 전부 처음 보는 것이라 대체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건 사용하지 않으면 되는데 샤워기만은 그렇지 않았다. 온수와 냉수로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닌 걸 보면 대충 돌려서 온도를 조절하는 걸 텐데 도무지 물을 어떻게 트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슐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몰라 내심 애가 타는데, 흘긋 욕조로 시선을 향한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샤워보다는 목욕을 하는 게 낫지 않아?”

“어? 어…….”

물론 그렇다. 하지만 다짜고짜 욕조에 몸을 담그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 같았다. 괜찮아, 하고 말하려 했으나 애슐리는 그런 코이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코이, 난 네가 내 집에 온 이상 마음 편히 쉬다 가면 좋겠어.”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게 나로서도 마음이 편해.”

이건 친구로서 말하는 걸까 아니면 의뢰인에게 말하는 걸까.

문득 떠올렸을 때, 애슐리가 놓아둔 새 옷이 시야에 들어왔다.

〈의뢰인을 보호하는 게 변호사의 의무야.〉

“……다른 의뢰인들한테도 이렇게 했어?”

말을 하고 나서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속으로 했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버리다니. 당황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애슐리가 말했다.

“코이, 착각하지 마.”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코이에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 의뢰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남들이 절대 못 찾을 만한 은신처를 열 개도 넘게 가지고 있어.”

……어?

뜻밖의 말에 눈을 깜박였으나 애슐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먼저 몸을 움직여 욕조로 향했다.

“이리로 와, 코이.”

“아, 응.”

당황해 쫓아간 코이에게 애슐리가 욕조의 사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걸 이쪽으로 돌리면 온수, 이건 냉수, 이건 밸브, 또 이건…….”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을 코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화려한 욕조에는 그만큼이나 많은 기능이 있었다.

애슐리가 욕조의 기능을 일일이 설명하는 동안 코이는 어느새 넋을 놓고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만난 후 애슐리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전에는 웃기도 자주 하고 시답잖은 농담도 수시로 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애슐리는 말수가 너무 많이 줄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차에 이렇게라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기분이 좋아졌다. 무심코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불현듯 애슐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코이, 듣고 있어?”

“어, 어?”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이자 보라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코이는 급히 현실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응. 전부 들었어. 고마워, 설명해 줘서.”

이제 그만 나가도 된다는 의미였으나 애슐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코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불신이 가득했다.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거 맞지?

소리 없는 물음을 들은 것 같아 코이는 허둥지둥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이건 내가 혼자 할 수…….”

웃으며 버튼을 눌렀을 때였다. 분명히 욕조에 고일 거라고 생각했던 물은 난데없이 천장에서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으, 으악!”

당황한 코이가 비명을 지르자 애슐리가 재빨리 물을 잠갔다. 질끈 감았던 눈을 간신히 떠 위를 본 코이는 잠시 넋을 잃었다. 천장에 달려 있는 해바라기 샤워기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미, 미안.”

정신을 차린 코이는 눈앞의 흠뻑 젖어 있는 남자를 확인하고 당황해 소리쳤다. 애슐리는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잘 빗어 넘겼던 머리칼은 마구 헝클어졌고, 주름 한 점 없던 셔츠는 살갗에 달라붙어 속살이 그대로 내비쳤다. 거기다 전신을 적신 물은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망이 되어 버린 동부 최고의 변호사를 앞에 두고 코이는 사색이 되어 버렸다.

어떡하지.

이대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다. 수임료도 내지 못하는 주제에 짐만 되고 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할 판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도저히 애슐리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을 때였다.

“코이.”

조용한 음성에 코이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간신히 마주 본 애슐리의 얼굴은 아까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조마조마해하며 기다리는데, 애슐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젖은 채로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어?

예상치 못한 말에 코이는 반응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내버려 둔 채 애슐리가 직접 손을 움직여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코이는 그가 욕조에 걸터앉아 물속에 손을 넣고 온도를 확인하며 레버를 돌리는 모습을 그저 보기만 했다.

애슐리는 슈트의 재킷을 벗고 화이트 셔츠에 넥타이를 맨 차림새였다. 막 샤워를 하려던 참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전에 코이에게 갈아입을 옷을 전해 주러 온 거였겠지.

이런 일을 애쉬는 나와 헤어진 동안 다른 사람과도 했을까.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마침 물의 온도를 확인하고 손을 뺐던 애슐리가 고개를 들더니 의아해하며 그를 불렀다.

“코이? 왜 그래?”

코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를 보기만 했다. 입 안에 가득 찬 말을 한사코 삼키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애쉬.

자신을 응시하는 애슐리를 마주 보며 코이는 꽉 막힌 속을 어쩌지 못한 채 입 안으로만 되뇌었다.

나와 헤어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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