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갑자기 켜진 실내등에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고작해야 어두운 스탠드 불빛이 전부였던 실내에 불이 가득 차자 애슐리는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두 눈을 손으로 덮었다. 그늘 아래에서 눈을 깜박이며 빛에 적응하고 있는 그에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보고차 왔습니다만, 이대로 진행할까요?”
사무적인 음성은 예전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 뿐 달라진 게 없었다. 간신히 빛에 익숙해진 애슐리가 천천히 손을 내리자 흐릿했던 시야가 점차 명확해지며 물체의 상이 뚜렷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중년의 여성은 예상과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비서였던 그녀는 아버지가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의 비서로 일하고 있다. 그녀의 충성심은 오로지 높은 연봉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스스로 말했었지만 그녀를 아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지 돈 때문에 그 정도로 충성을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녀의 돈에 대한 욕망이 그만큼 어마어마하다는 건데, 횡령이나 기타 범죄에 손을 대지 않고 30년이 넘는 시간을 헌신했다는 건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그 모든 가능성에 대해 애슐리는 굳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유가 무엇이건, 혹시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를 배신한다 해도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그는 평생, 줄곧, 매일매일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애슐리’가 죽기라도 했어?”
애슐리의 무심한 음성에 비서는 변함없이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아뇨, 아직은.”
애슐리의 입에서 하, 하고 기가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비서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자살 시도나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습니다.”
“혼자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살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가볍게 빈정거렸던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여전히 그는 아버지가 안아서 옮기겠지?”
비서는 단조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아시는 대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할 정도니까요.”
질문을 한 쪽이 바보스러워지는 답변이었다. 예상했던 말에 애슐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낫는 걸 아버지는 바라지 않을 테지.”
자신을 바라보는 비서의 시선에 애슐리는 짧게 웃었다.
“들었거든, 주치의와 얘기하는 걸.”
그것은 아직 어렸던 애슐리가 집을 떠나 서부로 가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무서웠고, 언제나 집 안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가 죽도록 공포스러웠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달아났는데.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떠올리자니 허탈함에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비서는 흘긋 애슐리가 한쪽 팔을 기대고 있는 테이블 위를 보더니 걸음을 옮겨 빈 글라스에 위스키를 따랐다.
“뭘 말씀이십니까?”
반쯤 채워진 잔을 입으로 가져간 애슐리는 단숨에 그것을 들이켜고 말했다.
“그가 죽지 않을 만큼의 치료만 하고 있다는 얘기.”
다시 텅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그는 말을 이었다.
“감마가 변이하고 애까지 낳으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건 상식이야. 그가 설마 모르고 그랬을까?”
“당연히 알았겠죠.”
애슐리의 말에 장단을 맞추는 건지 무의미한 부정은 안 하는 게 낫다는 판단인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애슐리의 말에 동의했다. 다만, 하고 비서는 소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운에 기대다니 밀러 씨답지 않은 선택이었다고는 생각합니다.”
“자기 곁에 둘 수 없다면 죽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지금껏 보아 온 아버지의 ‘애슐리’에 대한 집착에 비추어 보면 타당한 추론이었다. 비서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애슐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죽는다면 아버지는 시체를 박제할 거야.”
다시 술을 따라 마시는 그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비서가 입을 열었다.
“밀러 씨에 대한 건 큰 변화가 없습니다. 이미 아시는 바 그대로, ‘애슐리’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습니다만 살아 있긴 하니까요. 아직은.”
불미스러운 단어를 덧붙인 그녀는 곧 화제를 돌렸다.
“밀러 씨에게 주니어의 상태를 제가 보고 느낀 그대로 전달해 드려도 될까요?”
“내가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할 건 아니잖아.”
애슐리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비웃었다. 평생 그녀는 도미니크의 명령에 따라 애슐리를 감시해 왔고, 아마 굳이 애슐리를 통해 듣지 않더라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전부 그녀를 통해 도미니크에게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입막음을 하려고 돈이라도 줄 것 같아?”
애슐리가 빈정거리자 그녀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보수는 충분히 받고 있습니다.”
정중히 거절한 비서는 다시 말을 이었다.
“밀러 씨의 전언입니다. 페로몬을 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애슐리가 조롱하듯 손가락을 V 자 모양으로 만들어 까딱이며 빈정거렸다.
“내가 그 ‘빌어먹을 파티’에 빠짐없이 가고 있다는 걸 잘 알 텐데?”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애슐리의 냉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서가 말했다.
“파티에 가는 것과 페로몬을 빼는 것은 별개의 얘기니까요. 요즘 그 아이와 다시 만나고 있죠?”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애슐리의 태도가 달라졌다.
“코이는 베타야.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이제까지 매사에 관심이 없는 듯 빈정거리기만 하던 그의 말투가 미묘하게 변했다는 걸 알면서도 비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네, 그래서 대체 왜 만나는 건지 궁금합니다. 뇌에 이상이 생겨서 자학하는 취미라도 생겼나요?”
그녀의 질문은 무례하기 그지없었으나 말투는 마치 보고서를 읽듯이 평이해서 호기심이나 조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일부러 술을 따르며 시간을 끈 애슐리는 잔을 입에 가져갔다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아니, 그저 내 인생을 걸고 아주 유치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중이랄까.”
비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으로 본 감정적인 행동이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비서가 다시 물었다. 애슐리는 피식 웃더니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글쎄, 하지만 나한테 남은 건 이것뿐이야.”
비서는 더는 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선을 넘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미니크의 당부를 전한 그녀가 나가고 난 뒤, 드디어 애슐리는 혼자 남았다.
여전히 불은 환하게 밝혀진 채였다. 비서는 굳이 다시 실내등을 끄지는 않았다. 애슐리는 아까와는 다르게 밝은 실내에 혼자 앉아 위스키 병을 기울였으나 글라스를 반도 채우지 못하고 바닥이 났다. 자신이 지금껏 위스키를 두 병이나 해치웠다는 걸 떠올렸으나 그 사실이 무색하게도 그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페로몬.
발현하고 난 뒤 그는 어떤 술을 먹어도 취하는 법이 없었다. 모든 극알파들이 그렇듯이 일반적인 약물이나 술, 마약까지도 그에게는 듣지 않았다. 아무리 마시고 또 마셔도 정신은 맑아지기만 하고 도무지 잠들 수가 없다. 가끔 그는 발현하기 전에 술을 마셔 봤으면 좋았을걸,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랬다면 취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었을 텐데, 발현해 버리는 바람에 평생 알 수가 없게 됐다.
밤은 끝도 없이 길었고, 그는 또다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 *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것은 코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사라에게는 일찌감치 약속을 취소하는 메시지를 보낸 뒤였다. 당일 취소는 정말로 최악이므로, 제법 늦은 시간이지만 코이는 용기를 내어 메시지를 보내는 쪽을 택했다.
다행히 사라는 깨어 있었고, 코이의 사과를 너그럽게 받아 주었다. 대신 코이는 다음 번에 그녀에게 근사한 식사를 사기로 약속했다. 차마 몸이 좋지 않다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지만 고맙게도 그녀는 깊이 캐묻지 않았다.
참 좋은 사람들이 많아.
코이는 그녀에게 감사해하며 씻고 화분에 물을 준 뒤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자 곧이어 애슐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드를 내밀며 했던 말이 생각나자 또다시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순간 코이는 그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껏 몰랐던 10년의 세월이 갑자기 눈앞에 들이밀어진 기분이었다. 예전의 애슐리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약속이 취소되면 미안해하며 상대의 기분을 맞춰 주려 노력하는 게 보통 반응이 아닌가?
예전의 애슐리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 약속을 깨 놓고 돈으로 무마하려 하다니, 거기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에 코이는 충격을 받았다.
그건 애쉬가 아냐.
코이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두서없는 잠에 빠져들면서 그는 어렴풋이 어릴 때의 꿈을 꿨다.
〈좋아해, 코이.〉
밝게 웃으며 키스하던 애슐리, 거침없이 빙상 위를 질주하던 그의 모습, 파이널을 장식하고 코이를 향해 달려오던 그, 마지막으로 키스와 함께 고백했던 진심까지.
“으응…….”
꿈속을 헤매면서 코이는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날 밤 그의 온몸에서 지독하게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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