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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158/216)

158화

애슐리는 그저 코이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갑작스러운 긴장감에 코이는 금세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애슐리가 아무 얘기 안 하면 그냥 모른 체 가지 뭐 하러 말을 꺼내서 이런 분위기를 만들었을까.

하지만 애슐리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게 자신이라면 무시하고 가 버릴 순 없었다. 무엇보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던 코이에게 먼저 연락을 해 준 것도 애슐리고, 심지어 그는 바쁜 와중에 시간까지 내 줬다. 그런데 애슐리의 기분을 망쳐 놓고 나 몰라라 해 버린다면 정말 염치없는 짓 아닌가.

심각한 표정으로 긴장감을 견디며 애슐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동안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행복해, 코이?”

조용한 음성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코이는 난데없는 질문에 순간 당황해 잠시 머뭇거렸다. 왜 저런 걸 묻는 걸까?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의미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코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진심이었다. 요즘은 줄곧 좋은 일밖에 없었다. 살아오면서 이런 일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 얼떨떨한 기분으로 뺨을 꼬집어 볼 정도로. 동경하던 나사 직원과 친구가 됐고, 애슐리에게 먼저 연락이 왔으며, 함께 식사까지 했다. 애슐리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코이는 내내 행복했었다.

거짓의 자취라고는 없는 진실한 표정을 확인한 애슐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

코이는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지금 웃고 있는 게 맞는 건가? 분명히 입꼬리는 올라가 있고, 눈매는 가늘게 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코이는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애슐리는 웃고 있는 표정인데도 오히려…….

“내일 데이트도 아주 행복하게 성공하길 바라.”

마지막 인사를 한 후 애슐리가 버튼을 눌렀다. 철컥, 하고 잠금 기능이 해제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 차도 역시 그런 기능이 있었던 거구나. 코이는 어렴풋이 떠올렸다.

적막이 흘렀다. 애슐리는 작별 인사를 했고 코이도 이쯤에서 돌아서야 한다. 하지만 어째선지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코이는 머뭇거리며 차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가 그대로 멈췄다. 결심을 하고 돌아본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너는, 애쉬?”

애슐리가 코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간 그를 마주 보며 코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행복해?”

그리 길지 않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코이의 머릿속에는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당연히 행복하겠지. 애쉬는 누가 봐도 성공한 인생이야. 다 가졌잖아. 세상 사람들 누구나 애슐리 밀러를 부러워 할걸.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잖아.

자신의 안에서 작은 항의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10여 년 전, 코이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때 애슐리의 표정은 결코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줄곧 코이의 발목을 붙잡았다. 만약 자신에게 단 한 번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민 없이 그날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그때 자신이 했던 말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자신이 우주 비행사가 되는 것보다 더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것뿐이지 않은가.

애슐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얼굴은 무표정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침묵은 무한정 길게만 느껴졌다. 코이는 또다시 후회가 밀려왔다.

“미, 안해.”

문득 가슴이 꽉 메어 와 목소리가 절로 갈라져 그만 단어가 끊어지고 말았다. 코이는 큰 숨을 들이켜고 빠르게 덧붙였다.

“내가 주제넘은 질문을 했어. ……그만 갈게, 안녕.”

황급히 주워섬기듯 내뱉고 급히 몸을 돌렸다. 곧장 차의 손잡이를 잡아당겨 이 공간에서 벗어나려 했을 때.

갑자기 애슐리가 손을 뻗어 코이의 팔을 붙잡았다.

“……!”

무슨 일인지 깨닫기도 전에 끌려가 그대로 입술이 겹쳐졌다. 순간 코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인식하지 못했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숨마저 멈췄지만 애슐리는 그런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혀로 문질러 열고 입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친구끼리는 키스하지 않아.

코이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간신히 떠올렸다. 입 속을 휘젓는 두꺼운 혀는 곧이어 엉거주춤 주저하고 있는 코이의 혀를 휘감았다.

입술을 비비는 것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멍하니 떠올렸던 코이는 이내 깨달았다.

혀를 넣는 건 정말로 친구끼리는 하지 않는 거야.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키스는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코이는 차마 애슐리를 밀어내지 못한 채 그가 하는 대로 그냥 몸을 맡기고 있었다.

동부는 다른 건지도 몰라.

어렴풋이 그는 생각했다. 벌써 눈은 반쯤 감기고, 정신은 몽롱해진 채였다. 아, 마침내 두 눈을 감고 코이는 떠올렸다.

애쉬와 키스하고 있어.

수시로 키스를 하고 입을 맞췄던 기억이 되살아나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처럼 달콤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키스였다.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그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입 안을 핥으며 혀를 물어 대는  키스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이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둘은 친구가 되기로 했다든가, 이런 건 에리얼의 매뉴얼에 없다든가 하는 생각은 접어 두었다. 어느새 그는 배운 대로 애슐리의 키스에 응하고 있었다. 열심히 그의 혀에 자신의 혀를 문지르고, 입술이 떨어지면 바로 쫓아가 키스를 계속했다. 떨리는 손이 뺨을 쓰다듬었다가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목, 어깨, 가슴을 따라 손을 움직이며 그는 멍하니 떠올렸다.

변호사끼리는 친구라도 이런 키스를 하는 건지도…….

하지만 한껏 양보해 보았던 코이도 애슐리가 셔츠를 난폭하게 열어젖히고 가슴을 쓰다듬자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애쉬는 친구가 어떤 건지 나보다 더 잘 알아.

그런데 이 키스는 대체 뭘까.

친구라면 결코 이런 키스는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애슐리가 몸을 숙였다. 더 깊이 맞물린 입술에 애슐리의 등으로 손을 돌렸던 코이는 잠깐 입술이 떨어진 찰나 자신도 모르게 깊은 탄식을 뱉어 냈다.

다시 이어진 키스는 이전과 다르게 훨씬 부드러웠다. 마치 참새가 모이를 쪼듯 짧게 쪽, 쪽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떨어진 입술에 코이는 그만 애가 타 앓는 것처럼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문득 애슐리가 웃은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눈을 떠 확인할 새도 없이 다시 입술이 겹쳐지고, 당연하게 혀가 들어와 코이의 윗니를 슬쩍 두드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파닥거렸다. 코이는 떨리는 숨을 어쩌지 못하고 겹쳐진 애슐리의 입 안에 조심스럽게 불어 넣었다.

넓은 밴이 터무니없이 좁게 느껴졌다. 코이의 위로 올라오려던 애슐리는 콘솔박스에 몸이 걸려 그만 거친 욕설을 뱉어 내고 말았다.

잔뜩 흥분한 것은 코이도 마찬가지였으나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코이의 웃음에 전염이라도 된 듯 애슐리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술을 겹쳤다.

아, 짧은 탄식을 사이에 두고 다시 키스를 나누며 코이는 등에 머물러 있던 손을 움직였다. 긴장이 풀리자 몸은 본능대로 움직였다.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는 그대로 이동한 손 아래로 탄탄한 근육질의 몸이 느껴졌다.

들뜬 숨결을 어쩌지 못한 채 코이는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애슐리의 커다란 손이 그의 셔츠 사이로 거침없이 들어와 가슴을 쓰다듬고 젖꼭지를 쓸어내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비틀었다. 순간 숨을 들이켰으나 아픔보다 다른 감각이 더 컸다. 코이는 동시에 용기를 얻어 그대로 손으로 움켜쥐었다.

갑자기 애슐리가 입술을 떼더니 훌쩍 뒤로 물러났다. 코이는 난데없는 상황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조용한 차 안에 둘의 거친 숨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코이는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왜 저런 얼굴로 날 보고 있을까?

답은 잠시 뒤에 깨달았다.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애슐리가 물었다.

“지금, 뭘 한 거야?”

코이는 어째서 그가 저렇게 놀라 자신을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키스를 할 땐 엉덩이를 잡는 거잖아.”

네가 가르쳐 준 대로 했을 뿐인데.

왠지 억울해졌다. 자기는 키스를 할 때마다 그렇게 코이의 엉덩이를 주물러 놓고 코이가 겨우 용기를 내어 가르쳐 준 대로 했더니 기겁을 하며 저런 표정을 짓다니.

하지만 애슐리의 생각은 달랐다. 걸핏하면 코이의 엉덩이를 만졌던 건 자신이 맞지만 코이는 그때마다 부끄러워서 몸을 꼴 뿐 감히 똑같이 따라 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는데 지금 이건 대체 뭔가.

10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아.

코이도 어른이 됐고 많은 걸 경험했을 것이다.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인정하지 못했던 걸까.

하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처럼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째선지 잔뜩 일그러뜨린 얼굴로 코이를 바라보며 애슐리가 속삭였다.

“내가 이래서 널 만나고 싶지 않았어.”

순간 코이는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건 대체 무슨 말이지?

당황한 코이의 반응을 보고도 그는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다시 친구로 돌아갈게. 갑자기 키스해서 미안해.

애슐리는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내일 데이트는 취소하는 게 좋겠어.”

“……왜?”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가 손을 뻗었다. 갑자기 입술에 닿은 엄지손가락에 코이가 흠칫 놀라자 애슐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부었는데 뭐라고 변명할 거야?”

거울을 보고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애슐리의 손가락이 닿은 곳이 욱신거리는 걸 보니 사실일 것이다. 코이는 머뭇거리다 중얼거렸다.

“벌레한테 물렸다고 하면…….”

입술을 쓰다듬던 엄지손가락이 멈칫하더니 곧 그가 손을 떼었다.

“이젠 날 벌레라고 하는구나.”

“아, 아냐,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

코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으나 애슐리는 여전히 무덤덤하게 말했다.

“좋을 대로 해. 데이트에 나가고 안 나가고는 네 마음이지.”

코이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걸로 네가 행복해진다면야.”

코이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뭔가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불안했다. 애슐리의 표정을 살피며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애쉬, 정말로 내 행복을 바라고 있는 게 맞아?”

“물론이지. 그건 절대 변하지 않아.”

그것은 너무나 진심이었다. 그 때문에 애슐리는 주저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10년 전부터 내 유일한 바람은 그것뿐이었거든.”

그의 얼굴 어디에도 거짓의 자취는 없었다. 코이는 애슐리의 속내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으나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내일 약속은, 취소할게.”

“그래.”

머뭇거리던 코이가 결국 털어놓자 선뜻 고개를 끄덕인 애슐리가 갑자기 지갑을 꺼냈다. 의아해하며 바라보는 코이에게 카드를 꺼내 내민 애슐리가 말했다.

“그녀에게 선물이라도 해. 비싼 걸 사 주면 금방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약속이 깨진 것 따위는 금세 잊어버릴걸.”

순간 코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리는 두 눈을 보면서도 애슐리는 여전히 카드를 내민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서서히 코이의 두 눈이 반짝거리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언제나 솔직하기 그지 없는 그의 얼굴 가득히 실망과 당혹스러움과 또 다른 감정이 온통 뒤엉켜 드러나는 것을 애슐리가 보았을 때, 코이는 자동차 문을 열고 곧바로 차에서 내려 버렸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애슐리는 코이가 그냥 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사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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