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빨리 나와 있던 코이는 저 멀리 보이는 벤테이가를 보고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차가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서둘러 조수석에 올라탄 코이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 애쉬. 일찍 왔네.”
뒤늦게 차의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간보다 10분이 빨랐다. 코이가 반갑게 말을 꺼내자 애슐리는 인사 대신 흘긋 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는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그 옷은 뭐야? 새로 옷을 사 주지 않았던가?”
아, 코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대답했다.
“그건 데이트할 때 입어야지.”
네가 말한 건 착실히 지키고 있어, 코이는 마음을 담아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우린 친구니까 이건 데이트가 아니잖아, 그렇지?”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코이는 다짐을 거듭했다.
“걱정하지 마,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절대 선 넘지 않을게.”
두 눈에 가득히 우정을 담아 그를 바라봤지만 애슐리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 * *
화려하고 밝은 프렌치 레스토랑의 실내에서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코이는 와인을 마시는 척하며 맞은편에 앉은 애슐리를 흘긋 훔쳐보았다. 그는 지난번에 함께 여기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값비싸 보이는 슈트를 빈틈없이 갖춰 입고 화려한 백금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야말로 성공한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라고 하면 코이 또한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애슐리와의 차이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이게 제일 나은 거니까.
가지고 있는 좋은 옷이라고는 10년이 훌쩍 지나 사이즈가 제대로 맞지 않는 것들뿐이다. 그나마 애슐리가 새로 사 준 옷은 한 벌뿐인 데다 데이트를 할 때 입는 용도라 오늘 입을 수는 없었다.
애쉬는 우리 둘 사이가 친구라고 분명히 못 박았잖아.
그 때문에 코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옷을 지적했을 때 내심 긴장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예전부터 애슐리는 코이가 뭘 입건 상관없이 친절히 대해 줬고 지금도 역시 그랬다. 코이는 그의 평범한 태도에 확신을 가졌다.
역시 애쉬는 변하지 않았어.
식사가 생선 요리로 넘어가자 코이는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먼저 연락 줘서 고마워. 바쁠까 봐 전화 못 하고 있었거든.”
“그런 것 같아서 전화한 거야.”
애슐리는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으나 코이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거기까지 코이를 생각해 주다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뒤이어 애슐리가 말했다.
“걱정이 되기도 했고.”
“걱정? 나를?”
코이가 깜짝 놀라 묻자 애슐리는 여전히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계속 연락이 없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했지.”
친구라면 당연히 할 만한 걱정이었다. 코이도 애슐리도 그렇게 생각했다. 애슐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시 네가 일을 하다 다친 걸지도 모르고.”
“설마!”
“오랜만에 전화를 했는데 안 받으니까 정말 그런가 싶어서 몇 번 더 해 본 거지.”
이것도 물론 친구니까 할 만한 일이었다. 애슐리가 자신을 그렇게 걱정해 줬다는 생각에 코이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별일 없었어.”
“괜찮아. 데이트하는 도중에 전화를 건 내가 나빴던 거니까. 혹시 방해를 한 건 아니지?”
애슐리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코이는 ‘그랬던가?’ 하고 잠깐 생각했다가 곧 대답했다.
“아냐, 금방 끊기도 했고 다음에 내가 한 전화는 화장실 갔을 때 잠깐 했던 거니까.”
“화장실.”
코이가 뱉은 단어를 애슐리가 반복했다. 코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볼일 보러.”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와인을 마셨다. 다시 식사가 계속됐다. 다음 음식이 나오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생겼을 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데이트는 많이 했고?”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한 건도 없었다. 그나마 아주 많이 봐줘서 사라와의 만남 정도는 간신히 그렇게 봐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코이는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곧바로 에리얼이 했던 ‘부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코이, 만약에 애쉬가 네 데이트 진행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물어보면 무조건 잘되고 있다고 해.〉
코이는 에리얼이 예를 들어 정해 준 대답을 그대로 옮겼다.
“계속 만나고 있어. 마음이 맞는 사람이 몇 있어서 주말마다 약속을 잡았거든. 네가 전화를 줬을 때 마침 주말이 비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다. 에리얼이 이런 거짓말을 하라고 당부 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행복하길 그렇게 빌고 있는데 제대로 안된다고 하면 애쉬가 속상해할 거 아냐. 그렇지?〉
에리얼이 말로는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애쉬를 생각해 주고 있구나.
코이는 그녀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준비된 말을 덧붙였다.
“세상엔 멋진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고. 앞으로 더 많이 만나 보려고.”
“……다행이군.”
애슐리가 말을 했을 때 마침 직원이 다음 음식을 가져왔다. 단둘이 남고 나자 애슐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만났던 상대는 어땠어? 내가 전화했을 때 만나던 사람.”
“아, 사라?”
코이는 금세 두 눈을 반짝이며 그녀와 나눴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별 이야기, 우주에 관한 이야기, 우주 비행사와 우주선에 관한 얘기를 시작하자 끝도 없이 길어졌다.
잠자코 듣기만 하는 애슐리의 반응을 뒤늦게 깨달은 코이는 흠칫 놀라 말을 멈췄다. 침묵이 흐르고, 그제야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잘 맞는 사람을 만났던 것 같네.”
“응, 아주.”
코이는 상기된 얼굴로 덧붙였다.
“같이 있으니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 그날 네가 전화했을 때도 카페에서 4시간이나 떠들고 있었다니까. 네 전화 덕분에 자리를 옮겼는데,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그렇고 헤어질 때까지 얘기를 해도 모자랐어.”
“헤어지는 게 아쉬웠겠군.”
“응.”
애슐리의 짧은 반응에 코이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너랑 먼저 약속을 정하지 않았다면 오늘도 만났을 거야. 우주에 대한 최신 뉴스를 바로 접할 수 있다니, 정말 굉장하지 않아? 다음에 파티에 초대해 주겠다는데, 그때 나사에 다니는 직원들을 소개해 준다고 했어. 괜찮은 남자도 많다고 하더라고.”
애슐리가 고기를 자르던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
“응.”
코이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 매력적일 거야. 사라만큼 멋있는 사람들이 잔뜩 있겠지? 상상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사라 같은 사람들을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잔뜩 소개받을 수 있다니.”
취미가 같은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겠다는 의미였으나 애슐리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행복해 보이네.”
이것도 에리얼이 준비해 준 매뉴얼에 있는 답안이었다. 코이는 그대로 읊었다.
“응, 아주. 고마워, 애쉬. 네 덕분이야.”
일부러 1, 2초의 공백을 두는 것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동부에 오길 정말 잘했어.”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애슐리는 고작 절반을 먹은 스테이크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코이는 깜짝 놀라 물었다.
“왜 그래? 더 안 먹고?”
“적당히 먹었어. 신경 쓰지 말고 식사 계속해.”
그렇게 말한 애슐리는 직접 와인을 따라 마시더니 곧 직원을 불러 와인을 한 병 더 추가했다. 그리고 별다른 말 없이 세 병의 와인을 더 마셨다.
*
특별한 대화 없이 식사가 끝났다. 마지막 와인을 비운 뒤 애슐리는 직원을 불러 계산을 했다. 조마조마해하며 눈치를 보던 코이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아, 내 몫은 내가 낼게.”
둘은 친구니까 당연하다. 데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니 돈을 한쪽이 낼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이곳은 코이가 충분히 낼 수 있을 정도의 가격대라 부담도 적었다.
애슐리는 별말 없이 코이가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둔 돈과 함께 자신의 카드를 그대로 트레이 위에 놓았다. 직원이 그것을 들고 가 버리는 모습을 본 코이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걸 다 팁으로 주는 거야?”
너무 많다는 생각에 물었으나 애슐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직원이 가져온 카드를 집어넣은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이 또한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줄곧 침묵을 고수했다.
“애쉬.”
코이가 마침내 말문을 연 것은 애슐리가 차를 세운 다음이었다. 코이를 차에 태웠던 장소에 멈춰서 막 시동을 껐던 애슐리가 흘긋 그를 보자 코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난 눈치가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알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코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뭐라도 잘못했어?”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