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여기야, 코이.”
에리얼이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가게의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던 코이는 곧 그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에리얼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또 다른 여성을 뒤늦게 확인하고 코이는 내심 한숨을 삼켰다.
“인사해, 코이. 이쪽은 사라. 사라, 얘가 코이야. 내가 얘기했지?”
코이가 의자를 빼서 앉는 것을 기다렸던 에리얼이 양쪽을 소개했다. 사라가 먼저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코이는 어색하게 마주 인사를 한 뒤 에리얼에게 물었다.
“늦어서 미안, 많이 기다렸어?”
미안해하는 그에게 에리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마침 사라가 아주 재밌는 얘기를 해 주었거든. 사라, 아까 그 얘기 다시 해 주지 않을래?”
에리얼이 말하자 사라는 곤란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코이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
“어…… 그런데 이걸 재밌어할지 모르겠네. 이번에 발견한 소행성에 관한 얘기거든요.”
“소행성이요? 핸슨 박사가 발견한?”
갑자기 코이의 귀가 번쩍 뜨였다. 자신도 모르게 묻자 사라는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눈을 깜박였다. 둘의 반응을 확인한 에리얼은 재빨리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사라는 나사에 재직 중이거든. 코이도 우주에 아주 관심이 많아. 그렇지?”
“나사라고요?”
확인이라도 하듯 코이에게 물었으나 코이는 에리얼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재차 사라에게 물었다. 곧이어 그들은 열성적으로 새로 발견한 소행성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해 온갖 화제를 꺼내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에리얼은 흐뭇해하는 얼굴로 둘을 지켜보다 잠깐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 입을 열었다.
“그럼 난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 주문은 내가 하고 갈 테니까 계속 얘기 나눠, 괜찮지?”
코이가 순간 당황해 그녀를 바라봤으나 에리얼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라에게 시선을 향했다. 사라는 에리얼에게서 눈을 떼 코이를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뇌까지 섹시한 남자라니, 최고네요.”
코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확인한 에리얼은 짧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떴다. 그들의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간단한 점심 식사를 대신 주문한 그녀는 음식값은 물론 팁까지 지불한 뒤 가게에서 나갔다.
이번만큼은 코이도 잘 해낼 수 있겠지.
흐뭇한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벌써 몇 번째 만남을 주선했는지 모른다. 코이는 외모에서는 크게 점수를 땄으나 실제 데이트에서는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잘생기고 좋은 사람이지만 적극적이지 않다든지, 자신에게 별다른 흥미가 없는 것 같다든지 이유는 많았지만 결론은 코이가 너무나 숙맥이고 서툴다는 얘기였다. 물론 코이의 입장에서야 그건 데이트라기보다는 ‘친구가 소개한 또 다른 친구 사귀기 프로젝트’에 가까웠으나 매번 실패라니 에리얼은 속이 좋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결과까지 애슐리가 예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코이의 연애를 성사시켜 애슐리 외의 다른 상대를 이어 주고 싶었다.
이번엔 성공하겠지?
하다못해 개럿의 인맥까지 동원해 찾아낸 인재였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둘의 모습에 확신까지 느끼며 에리얼은 가벼운 걸음으로 거리를 걸어갔다.
*
♬♪♩♪♪♬♩♪…….
코이가 휴대 전화의 벨 소리를 알아챈 것은 벌써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걸려 온 뒤였다. 실로 오랜만에 취향이 맞는 상대를 찾아 좋아하는 소재로 얘기를 이어 가다 보니 전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벌써 그들이 마주 앉아 얘기를 한 지 4시간이 되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하자 놀라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미안해요, 잠시만요.”
황급히 사과한 코이는 서둘러 전화를 받고 짧게 내뱉었다.
“내가 다시 전화할게, 미안.”
곧이어 전화를 끊고 건너편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었던 코이가 말했다.
“그만 나갈까요?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아서.”
“아, 그러네요. 오래 있긴 했죠.”
사라가 서둘러 일어나는 것을 보고 먼저 계산을 하려 했던 코이는 이미 에리얼이 모두 값을 치렀다는 걸 알고 그저 멀거니 서 버렸다.
“에리얼이 미리 돈을 냈대요. 팁까지.”
뒤따라 나온 사라에게 말하자 그녀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코이가 머뭇거리자 사라가 눈치 빠르게 먼저 제안했다.
“그럼 다른 곳에서 얘기를 더 할까요? 식사를 하는 것도 좋고요.”
벌써 저녁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지난번에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만 그때 코이는 눈치 없게 거절하고 상대와 헤어졌다가 에리얼에게 등짝을 맞았다. 한 번의 호된 경험이 있었던 데다 사라와의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 코이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데이트에 성공했다.
* * *
집에 도착한 코이가 샤워를 끝내고 나와 보니 에리얼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코이가 다시 전화를 하자 그녀는 다짜고짜 물었다.
- 어떻게 됐어? 잘 끝났어? 사라는 바래다줬고?
빠르게 이어지는 질문에 코이는 한 차례 숨을 들이켠 뒤 대답했다.
“점심 고마워. 사라랑은 저녁까지 먹고 헤어졌고, 전철 타고 간다고 해서 역까지 바래다줬어.”
- 하긴, 첫 데이트에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하면 좀 과하긴 하지.
멋대로 납득한 에리얼이 다시 밝은 음성으로 물었다.
- 어땠어, 사라는? 말도 잘 통하고 괜찮았지? 성격도 좋더라.
“아, 응. 고마워. 정말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
코이의 대답에 에리얼이 멈칫했다.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물었다.
- 코이, 설마 저녁 식사를 더치페이 한 건 아니지?
“아냐.”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코이가 덧붙였다.
“네가 점심을 샀잖아. 거기다 네가 소개한 친군데, 내가 내야지.”
핀트가 어긋났지만 어쨌든 결과는 좋았으니 됐다. 에리얼은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 아무튼 됐어. 다음 약속은 잡았고?
“아, 응. 일요일에.”
에리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 왜 일요일이야? 토요일엔 뭐 하고?
이왕이면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다 만났으면 좋겠다는 욕심에 묻자 코이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어, 저기…… 애쉬를 만나기로 해서…….”
- 애쉬라니?
갑자기 에리얼의 음성이 돌변했다. 음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당황한 코이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카페에서 나오기 전에 전화가 왔었는데, 내가 이따 한다고 그러고 끊었거든. 일행이 있는데 다른 사람과 통화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자리를 옮겨서 저녁 먹으러 갔는데, 잠깐 화장실 갔을 때 내가 전화했었어. 부재중 전화가 두 통이나 더 와서 급한 일인가 했거든.”
- 그래서? 애쉬 반응은 어땠는데?
에리얼의 빠른 말투에 코이는 의기소침해 대답했다.
“당연히 안 좋지, 전화를 계속 안 받았는데.”
그래서가 아닐 것 같은데.
에리얼은 생각했지만 굳이 알려 주지 않고 다음 말을 재촉했다. 코이는 주저하다 덧붙였다.
“주말에 시간 있느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토요일에 보자고 했어. 그런데 헤어질 때 사라랑 다시 만나려고 보니까 애쉬랑 약속이 먼저 잡혀서 일요일에 만나자고 한 거고.”
- 그랬구나.
이 정도면 코이의 수준에서 꽤나 선방한 셈이다. 에리얼은 심호흡을 해 감정을 가다듬고 물었다.
- 애쉬는 갑자기 왜 전화한 거야? 그것도 세 번이나.
“어…….”
코이는 망설이다 정정했다.
“정확하게는 여섯 번이야. 그 전에 카페에서 부재중 전화가 세 통 더 와 있었거든.”
- 허.
에리얼이 소리 내어 기가 찬 탄성을 뱉어 냈다.
- 행복하길 빈다더니 무슨 스토커 같은 짓을 한대? 그 자식은.
“내, 내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걱정이 돼서 다시 한 거겠지. 스토커는 아냐.”
- 물론 아니겠지. 어련하시겠어.
역시나 애슐리의 편을 드는 코이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에리얼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 토요일이라고 했지? 저녁 먹기로 한 거야?
“응. 저번에 갔던 레스토랑에 또 가기로 했어.”
선뜻 나온 대답에 에리얼은 “그러니?” 하고 다정하게 운을 뗐다.
- 그럼 코이, 애쉬랑 만나면 이렇게 해 주지 않을래?
“어?”
갑작스러운 말에 코이가 자신도 모르게 묻자 에리얼은 한층 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 부탁이야.
물론 주문은 즉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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