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애쉬는 잘못한 게 없어.”
코이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못한 건, 나야. 내가…… 애쉬에게 상처를 줬어.”
“10년도 전에 말이지. 그래서 네가 줄리에게 키스도 못 하고 물러난 이유가 뭔데? 그 자식이 너한테 뭐라도 한 게 아니면…….”
거기까지 말한 에리얼이 멈칫했다. 점차 둥그렇게 커지는 그녀의 눈에 코이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 반응을 본 에리얼이 확신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세상에, 너 애쉬와 만났던 거구나.”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 코이는 그저 고개만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에리얼은 하, 하고 탄식처럼 한숨을 뱉어 내더니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넘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떻게 만났어?”
“그게…….”
코이는 어렵게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에리얼은 코이가 입을 다물자 그제야 말을 꺼냈다.
“그럼 애쉬하고는 그게 다야?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는 거?”
“어, 응.”
고개를 끄덕이자 에리얼이 미간을 모으고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코이?”
“응?”
코이가 눈을 깜박이는 것을 보고 에리얼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넌 애쉬를 만나겠다는 마음 하나로 10년이나 노력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그걸로?”
“어…….”
진심으로 걱정하는 친구의 얼굴에 코이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어, 어쩔 수 없지. 네 말대로 10년이나 지난 일이잖아. 애쉬가 나한테 화를 내지도 않고 다시 친구로 지내자고 한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코이.”
점차 끊어지던 말을 결국 맺지 못하고 말았다. 당황한 에리얼이 황급히 종이 냅킨을 여러 장 뽑아 그에게 건네주었다. 코이는 그제야 자신이 또 울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눈을 꾹꾹 눌러 눈물을 찍어 냈다.
“미안해.”
“괜찮아.”
코이의 사과에 에리얼은 선뜻 말을 받았다. 잠시 그를 바라보기만 하던 그녀는 마침 지나가던 직원을 불러 맥주를 추가했다.
“너는? 필요한 거 없어?”
에리얼이 묻자 코이는 그냥 고개만 저었다. 직원이 자리를 떠난 뒤 에리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애쉬한테 말했어? 네가 그 애를 만나려고 10년을 넘게 죽도록 일만 했다는 걸.”
“그런 말을 왜 해.”
당황한 코이가 화들짝 놀라 부정했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에리얼은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단번에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히 했어야지, 애쉬도 네가 그만큼 고생했다는 걸 알아야 할 거 아냐.”
“굳이 그럴 필요는…….”
“말했어야 했다고.”
여전히 뒤로 물러나기만 하는 코이에게 에리얼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애쉬한테 말했다면 네가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 애도 알았을 거고, 그랬으면 친구가 어쩌고 하는 개소리도 안 들었을 테니까.”
에리얼의 태도는 강경했으나 코이의 생각과는 달랐다.
“그건 안 돼.”
코이는 흔치 않게 단정적으로 말했다.
“몇 년이 걸렸건 여기 온 건 내 선택이고 의지야. 애쉬가 굳이 그것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낄 이유도 없고 그러길 원하지도 않아. 생각해 봐, 벌써 오래전에 끝난 상대가 10년 넘게 돈을 모아서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얼마나 질리겠어? 나라도 소름 끼칠걸.”
상상만으로도 두렵다는 듯이 재차 고개를 가로젓는 코이를 보고도 에리얼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아직 그 애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면 애쉬도 바뀔 수…….”
“절대 들키지 않을 거야.”
코이는 이번에도 강하게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애쉬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데 내가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고 하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
“코이.”
“애쉬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진 상대는 없을지 몰라도 누군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만약에 그렇다면 난 정말 방해만 될 뿐이잖아.”
그는 에리얼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을 이었다.
“날 생각해서 얘기해 주는 거 알아. 정말 고마워, 앨. 하지만 난 친구만으로도 충분해. 그렇게 말해 준 애쉬에게 감사하고 있어.”
진심이야, 하고 미소를 짓는 코이의 눈가는 아직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에리얼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다행히 직원이 맥주를 가져다줬다. 차가운 맥주를 벌컥거리며 들이켠 에리얼은 빈 병을 테이블 위에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용서 못 해.
에리얼은 화가 치밀어 무서운 얼굴로 코이를 바라보았다. 감히 내 자매를 울게 해?
거기다 분한 건 또 있었다. 코이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애슐리는 대학을 졸업할 즈음 약혼을 했다가 파혼한 경험이 있다. 그들의 관계가 얼마만큼 깊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애슐리는 코이와 헤어진 뒤 누군가와 결혼하려고 했었고 그만큼의 관계는 맺은 게 확실하다.
반면 코이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오직 애슐리 하나뿐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그렇다 쳐도 졸업 후에도 돈만 버느라 다른 짓은 엄두도 못 냈다. 점차 외모가 변해 가면서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도 분명 있었을 텐데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줄리와의 데이트를 엉망으로 망쳐 버린 것만 봐도 뻔했다. 분명 코이가 눈치없는 짓을 저질렀을 것이다.
당연하지. 뭘 경험해 봐야 눈치가 생기지.
코이는 이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못해 봤는데 애슐리는 헤어진 동안에도 할 건 다 했다고 생각하자 에리얼은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코이.”
“어, 응.”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코이는 화들짝 놀라 바로 대답했다. 에리얼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코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
코이의 얼굴이 단박에 밝아졌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에리얼이 자신에게 ‘부탁’을 하다니.
“물론이지, 뭐든 말해.”
코이는 냉큼 대답했다. 지금 당장 네 간이 필요해, 라고 말하면 주저 없이 일어나 에리얼보다 먼저 침대에 누워서 수술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 같은 기세였다. 에리얼은 ‘그렇게 속없이 굴지 좀 말라고!’ 하며 코이의 목을 잡고 딸딸 흔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꾹 참고 대신 다정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고마워. 우선 줄리한테 먼저 연락해서 사과해 줘. 네가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건 알고 있지?”
“아, 응. 물론이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코이는 솔직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얼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그녀가 말을 꺼냈다.
“줄리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아니지? 너도 데이트라는 건 인지하고 나갔을 거 아냐.”
“어…… 응.”
코이는 망설이다 정직하게 털어놓았다.
“처음엔 몰랐는데, 애쉬가 그건 데이트라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잘 다녀오라고 옷까지 사 줬단 말이지.
애슐리의 이름을 말하면서 다시 눈물을 그렁거리는 코이를 보고 재빨리 종이 냅킨을 뽑아 건네준 에리얼은 무심코 혼잣말을 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그 개자식은.”
“그, 그런 거 없어.”
용케 애슐리를 욕하는 말을 알아들은 코이가 황급히 말했다. 저 꼴로 애슐리의 편을 드는 코이를 보자 에리얼은 심사가 뒤틀렸다.
“솔직히 말할게. 애슐리 밀러는 속이 시커먼 뱀 같은 녀석이야.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고.”
“아냐, 애쉬는 사람을 속이거나 하지 않아. 배신하고 그런 짓 안 해.”
이게 진짜.
결국 참다못한 에리얼이 이를 갈며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코이, 그 개자식은 나랑 사귀고 있는 와중에 너한테 반했다고 날 차 버린 놈이야.”
갑자기 코이의 눈에서 눈물이 사라지고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삽시간에 하얗게 질려 버린 코이가 더듬거리며 다급하게 사과했다.
“미, 미안해. 미안해, 앨.”
“너한테 사과하라는 게 아니잖아.”
거듭된 사과에 에리얼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잘못한 건 그 녀석인데 엉뚱하게 코이가 사과하고 있으니 그것도 화가 치밀었다.
후, 한숨을 내쉬고 감정을 추스른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알았어. 그건 그렇고, 그럼 다음 부탁을 할게.”
“어, 응.”
코이는 서둘러 자세를 바로하고 들을 준비를 했다. 에리얼이 몇 개를 말하건 모두 다 받아들일 모양새였다. 그런 코이의 눈가에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본 에리얼은 그를 향해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 네 눈에선 피눈물이 흐르게 해 주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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