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거짓말하지 마.
애슐리의 음성이 들려온 것 같아 코이는 금세 불안해져 청새치를 자르는 척 접시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정말이야. 너랑 헤어지고 나서, 서부에 있을 때 몇 명 사귀었었어. 그러니까 데이트에 대한 코치는 굳이 해 주지 않아도 돼. 나도 알 만큼 알고 있으니까.”
말을 맺자마자 자른 생선을 입에 넣었다. 역시나 입 안 가득히 퍼지는 고소한 맛은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으나 아쉽게도 그걸 음미할 여유는 없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생선 살을 씹었던 코이가 그것을 목으로 넘기고 와인까지 마시는데, 그때까지 말이 없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 10년이나 지났으니 그럴 수 있지.”
여전히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말한 그는 코이를 바라보며 짧게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무례했네. 당연히 너도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텐데.”
아냐.
순간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진실을 털어놓을 뻔했다.
실은 그런 거 전혀 없었어. 너 아니면 누가 날 상대해 주겠어. 난 코너 나일즈라고.
자신이 이런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바로잡을 기회는 사라졌다. 애슐리는 벌써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식사를 계속했고, 표정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제 와서 자신이 괜한 허세를 부렸다고 실토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코이는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억누르고 대신 꾸역꾸역 생선을 목으로 넘겼다.
남은 식사를 계속하는 동안 애슐리는 평범한 화제를 이어 갔다. 이따금 미소를 짓기도 하고 코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는 줄곧 다정한 태도로 코이를 대했다. 코이는 안전한 화제에 안도하는 한편 거짓말을 했다는 양심의 가책에 마음 한구석이 내내 무거웠다.
* * *
“오늘 고마웠어.”
만났던 장소에 차를 세운 애슐리에게 코이가 인사를 했다. 코이는 한 병의 와인을 그가 거의 다 마셨다는 걸 레스토랑에서 나와 차에 올라타기 직전에 깨달았지만 애슐리는 아무렇지 않게 운전대를 잡았다. 음주 운전은 안 돼, 코이는 사색이 되어 떠올렸으나 애슐리는 전혀 취한 기색이 없었다. 직원들 또한 그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차의 키를 주는 모습에 코이는 반신반의 해 조수석에 앉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레스토랑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멀쩡하게 코이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저기…….”
“코이, 뒷좌석에 있는 쇼핑백 좀 꺼내 볼래?”
술 먹고 운전하는 건 위험하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말했다. 타이밍을 놓쳐 버린 코이는 얼떨결에 시키는 대로 했다. 팔을 뻗어 커다란 쇼핑백을 붙잡은 코이가 다시 자세를 바로 하자 애슐리가 말했다.
“가져, 네 거야.”
“어?”
애슐리에게 쇼핑백을 내밀려던 코이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무슨 소린지 몰라 그저 보고만 있는데,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내일 데이트 갈 때 입어. 사이즈는 눈대중으로 맞췄는데 아마 맞을 거야.”
난데없는 얘기에 코이는 그저 놀라 눈만 깜박거렸다. 코이의 표정을 본 애슐리가 웃음을 지었다. 오늘 하루종일 보았던 그의 웃는 얼굴이 어딘지 낯설게 느껴졌을 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지금 입은 옷은 나 같은 친구를 만날 때나 입는 거지, 여자를 만날 때는 다르잖아.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는 것처럼 촌스러운 짓은 없어. 그런 남자와 함께 다니는 건 그녀를 창피하게 하는 거 아닐까?”
“아…….”
애슐리의 말이 옳다. 코이는 충분히 납득 했으나 이해 가지 않는 게 있었다. 코이는 주저하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기, 그렇다고 해도…… 왜 이런 선물을 하는 거야?”
예전에 애슐리가 코이에게 옷을 사 준 건 둘이 사귀기 전, 서로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애슐리의 입으로 둘은 친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이런 걸 선물하는 걸까.
자신감 없는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선뜻 말했다.
“당연히 네 데이트가 성공하길 바라서잖아.”
“그러니까, 왜?”
코이는 한 번 더 물었다. 이번에는 그의 진심을 듣고 싶었다. 왠지 긴장하는 자신을 느끼며 귀를 곤두세우는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똑바로 코이를 바라보며.
“난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이 이상 진심을 담을 수는 없다는 듯이. 멍하니 그를 마주 보는 코이에게 애슐리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아주 많이. 최고로.”
그리고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게 너이길 바라.”
코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누구도 애슐리를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는 정말, 너무나도 진심이니까.
“고마, 워.”
왠지 목이 막혀 와 코이는 더듬거리며 겨우 중얼거렸다. 쇼핑백을 품에 안고 차에서 내린 코이가 인도에 서서 뒤를 돌아보자 애슐리가 그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곧 차를 출발시켰다. 금세 차는 자리를 떠나고, 코이는 혼자 남아 멀어지는 차를 지켜보았다.
애슐리는 룸미러를 통해 코이가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여전히 그는 애슐리가 준 선물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그래, 진심이야.
애슐리는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아 속도를 올렸다. 난 네가 행복하길 바라,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의 입가에 냉소가 깃들었다. 오늘 종일 코이에게 지어 보였던 미소와는 판이한 것이었다.
행복의 정점에 있어야 그날이 왔을 때 네 심장이 더 아프게 갈가리 찢어지겠지.
* * *
다음 날 줄리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코이는 약속보다 15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전날 애슐리에게 선물받았던 옷은 놀랍도록 지금 그의 사이즈에 딱 맞았다. 게다가 첫 데이트에 어울리도록 과하지도 않은 단순하고 깔끔한 디자인의 셔츠와 바지에 코이는 이번에도 감탄과 동시에 침울함을 느꼈다.
여기서도 애슐리의 능숙함은 여과없이 흘러나왔다.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게, 하지만 데이트라는 목적을 잃지 않은 아슬아슬한 선을 너무나 잘 지킨 옷을 보자 저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게다가 애슐리의 말대로 치수까지 완벽해 시험 삼아 입어 본 코이는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애쉬가 이런 일에 얼마나 익숙한지 되새기면서 상처받아 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어.
코이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스스로에게 우린 친구라는 말도 잊지 않고 반복했다. 절대 애슐리의 호의에 과한 기대를 품거나 선을 넘어선 안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슐리가 사 준 옷을 그대로 입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줄리는 10분 전에 도착했고, 곧바로 코이를 발견하고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안녕, 코이. 잘 지냈어요?”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줄리에게 마주 인사를 한 코이는 먼저 봐 둔 영화의 리스트를 읊었다. 줄리가 고른 영화는 공교롭게도 가장 인기가 많아 겨우 구한 회차는 4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식사를 먼저 하는 게 어때요?”
줄리의 제안에 코이는 선뜻 동의하고 주변의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캐주얼한 식당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는 동안 코이는 그녀의 기사를 화제로 꺼냈다. 전날 애슐리가 조언해 준 대로 줄리의 최근 기사를 몇 개 골라 읽고 나왔던 코이가 그것을 언급하자 줄리는 놀라워하면서도 기뻐하며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덕분에 둘의 분위기는 금세 가벼워져 영화가 시작할 즈음에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가 됐다.
“역시 팝콘은 캐러멜이지.”
음료와 함께 캐러멜 팝콘이 든 상자를 안고 줄리가 윙크를 했다. 코이는 마주 웃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 극장으로 들어갔다.
줄리가 고른 것은 액션 영화였다. 컴퓨터 그래픽을 쓰지 않고 맨몸으로 고층 빌딩에 오른다거나 비행기에 매달리는 것으로 유명한 배우가 나오는 최신 영화로, 빈자리가 없이 좌석이 전부 차 있었다.
“이걸 보려고 어젯밤에 전편을 전부 몰아서 다 봤다니까.”
줄리의 말에 코이는 대강 웃는 얼굴로 답을 얼버무렸다. 극장은 비싸기 때문에 최신 영화는 본 적이 없다. 시리즈물이라고는 해도 딱히 전편을 꼭 봐야 하는 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때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영화는 시작부터 아주 흥미로웠다. 블록버스터 영화답게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스케일에 코이는 금세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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