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이러면 안 돼.
코이는 황급히 마음을 다잡았다. 애슐리가 그나마 친구라도 해 주겠다고 하잖아.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친구도 감지덕지지, 서운하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너무 염치없잖아, 코너 나일즈.
스스로를 한껏 꾸짖은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눈앞의 애슐리에게 집중했다. 바쁜 애슐리가 이렇게 시간을 내 줬는데 의기소침해서 대충 지나갈 수는 없었다.
기껏 회원제 레스토랑까지 왔는데 정신 차려.
다시금 자신에게 다짐한 코이는 애슐리를 따라 접시의 정체 모를 음식을 포크로 고정하고 조심스럽게 나이프로 썰었다. 함께 장식되어 있는 허브와 함께 입에 넣었지만 씹히는 질감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당연하지만 향은 느껴지지 않았고, 맛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식감은 나쁘지 않아 천천히 입 안에서 굴리고 있는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관자를 쪄서 익힌 거야. 소스를 발라서 먹어 봐.”
내가 맛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걸 잊은 걸까?
코이는 떠올렸지만 곧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10년이 훌쩍 지난 일이다. 자신에 대한 소소한 것들을 기억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마음을 고쳐 먹고 코이는 응, 하며 시키는 대로 남은 관자를 잘라 접시 위에 뿌려져 있는 소스에 문질렀다. 애슐리가 당황하지 않도록 멋지게 연기를 해낼 생각이었다. 물론 자신은 없었지만.
……어?
제법 진지한 각오를 하고 관자 요리를 입에 넣었던 코이는 순간 멈칫했다. 아까와는 분명히 달랐다. 맛이 느껴졌다. 코이는 무심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천천히 씹는 동안 맛은 아쉽게도 사라졌으나 처음 입에 넣은 순간에는 분명히 그도 알 수 있었다.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소스와 관자의 맛을.
“맛있어…….”
얼떨떨해하며 말하자 테이블 건너편에서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떻게 된 걸까?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자신의 관자를 자르며 말했다.
“일행의 미각이 둔한 편이니 맛을 더 강하게 내 달라고 했어. 천연 재료를 썼고 염도나 당도도 지나치게 높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으니까 건강에도 나쁘지 않을 거야.”
애슐리의 설명에 코이는 또 한 번 놀랐다. 여전히 멍한 시선을 어쩌지 못한 채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가 특별히 나에 맞춰서 식사를 준비하도록 미리 얘길 해 뒀단 말이지……?”
“그래.”
너무나 선뜻 흘러나온 대답에 코이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왜?”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지 않은지 두려워졌다. 간신히 한 마디만 내뱉자 애슐리는 당연한 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함께 식사를 하러 왔는데 상대가 즐기지 못한다면 이쪽도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그 말에 코이는 확신했다. 더 이상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 없었지만 그는 참지 못하고 입술을 뗐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흘러나온 말에 애슐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관자를 썰어 입에 넣었을 뿐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라는 양.
가슴이 먹먹해져 코이는 황급히 시선을 내려 관자를 먹는 척했지만 급히 코를 훌쩍이는 것만은 어쩌지 못했다.
이제 우린 친구야.
그는 슬그머니 선을 넘으려는 자신을 꾸짖었다. 애슐리는 분명히 이런 걸 예상하고 내게 미리 경고를 한 것이다. 내가 괜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둘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고 지금 애슐리가 코이에게 줄 수 있는 건 고작 우정이 다라고.
친구로서 배려해 준 것뿐이야. 착각하면 안 돼.
남은 관자 요리를 꾸역꾸역 억지로 삼킨 뒤 포크를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이 다가와 양쪽의 빈 접시를 치웠다. 손님의 식사가 지연되지 않도록 그들이 벽에 붙어 서서 레스토랑 곳곳을 매의 눈으로 관찰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런 우아하고 격조 있으며 서비스가 좋은 식당은 처음이라 코이는 얼떨떨해졌다.
다음 음식은 금방 나왔다. 이번에도 직원은 접시를 내려놓은 뒤 능숙하게 설명을 덧붙이고 물러났다.
“거위의 간이야.”
단둘이 남자 이번에도 애슐리가 짧게 설명을 해 줬다. 코이는 말로만 듣던 요리를 눈앞에 두고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이게 그 지방간이야?”
“하하하.”
갑자기 애슐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깜짝 놀라 눈을 깜박이자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Bon appétit.”
이번 프랑스어는 아는 것이었다. 코이는 썩 좋지 않은 발음이었으나 용기를 내어 그의 말을 따라 한 뒤 푸아그라를 잘라 입에 넣었다. 이것도 역시 코이의 입 안에 새로운 맛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때?”
“맛있어.”
애슐리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하자 그는 엷은 미소를 짓더니 식사를 재개했다.
애슐리의 웃음소리를 들은 뒤로 코이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덩달아 웃음을 지은 코이는 다시 음식을 먹는 데 전념했다. 그러고 다음 요리가 나오기 전, 짧은 공백이 생겼을 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데이트 상대는 어떤 사람이야?”
데이트가 아니라고 다시 정정하고 싶었지만 부질없는 짓일 게 뻔했다. 코이는 충동을 참고 대답했다.
“기자라고 하던데, 앨하고 아는 사이라더라고.”
간단히 그녀를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데 잘 구워진 청새치 요리가 나왔다. 그걸 앞에 두고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줄리라고? 혹시 줄리 로빈슨?”
“알아?”
코이가 깜짝 놀라 물은 말에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꽤 유명한 기자야, 좋은 기사를 많이 썼지. 나한텐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덧붙이는 말과 함께 조소를 짓는 애슐리를 보고 코이가 멈칫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조심스럽게 묻자 애슐리는 별다른 감정 없이 말했다.
“‘가진 자들의 수호 악마, 애슐리 밀러’라는 기사가 기분 좋을 리 없잖아.”
“아…….”
그제야 납득한 코이가 멍한 탄성을 흘리자 애슐리는 다시 피식 웃었다.
“진실은 꽤 아픈 법이거든.”
그는 웃었으나 코이는 따라 웃지 못했다.
정말이야, 애쉬? 기자들이 하는 말, 나쁜 소문들,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접시로 시선을 내렸던 코이는 애슐리의 청새치와는 다른 소스가 뿌려져 있는 자신의 요리를 내려다보며 침울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넌 여전히 이렇게 다정하잖아.
바쁜데도 자신을 위해 이렇게 시간을 내 주고, 일부러 찾아와 감옥에서도 빼 줬다. 회원제인 레스토랑에 와서 특별히 코이를 배려한 요리까지 준비시키다니, 어딜 봐도 예전의 애슐리 그대로였다.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던 그 애슐리 밀러가 지금 눈앞의 남자가 아니라면 대체 지금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녀가 쓴 기사는 안 읽어 봤어?”
애슐리의 물음에 정신이 든 코이는 무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본 애슐리가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가장 최근에 썼던 기사라도 읽어 보지 그래? 도움이 될 테니.”
“무슨 도움?”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애슐리는 선뜻 대답했다.
“그런 의미로 만나는 게 아니라도 상대에 대해 잘 알고 나가면 대화를 나누기도 좋잖아.”
“아…….”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그럴듯했다. 멍하니 감탄사를 흘린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처음엔 그럴 생각이 아니었어도 만나다 보면 마음이 생기는 경우도 많으니까 여러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게 낫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얘기였다. 하지만 수긍하고 나자 곧바로 기분이 나빠졌다. 예전에도 애슐리는 코이와 사귀기 전에 이미 여러 명의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코이보다 훨씬 능숙한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어드바이스를 받는 게 그리 좋은 기분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애슐리가 이렇게 태연히 막힘 없이 술술 데이트 요령을 읊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왜 나한테 그런 얘길 해 주는 거야?”
나와 헤어진 뒤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만났던 걸까.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굳이 그걸 이렇게 드러내지 않아도 될 텐데, 생각했지만 코이는 알고 있었다. 애슐리는 일부러 과시하는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몇 마디라는 걸 알지만 그래서 더 언짢아졌다. 차라리 잘난 체하는 거라면 좋았을 텐데.
의기소침해져 말하자 애슐리는 여전히 무심하게 대답했다.
“네 첫 데이트가 성공하길 바라니까.”
그리고 그는 너무나 태연히 덧붙였다.
“친구로서 조언한 것뿐이야.”
당연히 그렇겠지. 코이는 생각했으나 그에 대한 야속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충동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나, 나도 여자친구 있었어.”
코이가 성급히 내뱉자 애슐리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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