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붐비던 도로를 빠져나와 외곽을 한참 동안 달린 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을 즈음 차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나무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을 느끼며 정면을 보고 있던 코이는 키가 큰 나무 너머로 높이 솟아 있는 건물의 흐릿한 음영에 미간을 모았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이 점차 가까워지는 건물은 생각지도 못했던 외형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만 코이를 흘긋 본 애슐리가 말문을 열었다.
“프랑스에 있던 성을 사서 여기로 옮긴 거야. 벽돌 하나까지 전부 운반해 왔다고 하더군.”
이런 게 가능하구나.
코이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다가오는 건물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사진에서나 보았던 프랑스의 고성이 실제로 눈앞에 있었다. 차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보자 그냥 모양만 본뜬 게 아니라 어딘지 낡고 오래된 느낌이 들었다. 애슐리의 말대로 300년이 넘은 고성이 그대로 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팻말을 확인한 코이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나 비쌀까.
이런 신기한 건물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자신의 가난뱅이 근성에 한숨이 나왔지만 현실은 어쩌지 못했다. 급히 머릿속으로 그가 챙겨 온 현금을 떠올려본 코이는 레스토랑의 화려함에 기가 죽으면서도 내심 각오를 되새겼다.
이날을 위해 여지껏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거잖아. 오늘 내 전 재산을 모두 잃어도 좋아.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코이는 애슐리를 돌아보았다. 발렛 서비스를 위해 직원에게 차의 키를 건네준 애슐리는 코이가 성을 밖에서 천천히 구경할 수 있도록 기다리며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갈까?”
“응.”
코이는 단단히 결심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슐리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전에 또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그는 드디어 발을 움직였다.
* * *
어?
메뉴북을 받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떨리는 손으로 안을 펼쳐 보았던 코이는 무심코 놀라 눈을 깜박거렸다.
이상한데.
다시 메뉴북을 닫았다가 열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재빨리 금액이 적힌 부분을 찾았던 코이는 여전히 크게 뜬 눈을 깜박거리며 몇 번이고 숫자를 확인했다. 그런 그의 반응을 눈치챈 애슐리가 테이블 건너편에서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회원제 레스토랑이라 가격은 비싸지 않아. 그렇다고 음식의 질이 떨어지는 건 아냐.”
그제야 코이는 레스토랑의 정보를 얻는 것은 물론이고 홈페이지조차 없었던 이유를 납득했다. 멍하니 깨달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코이에게 애슐리는 웃으며 물었다.
“내가 널 파산시키기라도 할 줄 알았어?”
“아, 아니, 그건 아닌데.”
금세 달아오른 얼굴로 코이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부정했지만 할 말은 없었다. 물론 애슐리가 고의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애슐리는 코이가 얼마나 가난한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딱히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해 코이는 대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많이 비쌀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마워.”
“천만에. 내가 주문할까? 아니면 영어로 된 메뉴북을 달라고 할까?”
그의 말에 코이는 메뉴북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애슐리를 쳐다봤다.
“주문해 줘. 너랑 같은 걸로 할게.”
어차피 영어로 되어 있어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코이는 프랑스 요리라고는 전혀 모르니까. 직원을 불러 능숙한 프랑스어로 주문을 하는 애슐리를 바라보던 코이는 그가 주문을 마치고 단둘이 남자 다시 입을 열었다.
“프랑스어는 언제 배웠어?”
“어릴 때. 아버지가 시켜서.”
“그렇구나…….”
새삼 그와 자신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깨달았을 때, 애슐리가 말했다.
“스페인어라면 네가 더 잘할 거야. 점수도 더 높았으니까, 그렇지?”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존감을 높여 주려 시도했으나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기회를 걷어차 버렸다.
“아, 아냐. 다 잊어버려서…… 지금은 잘 못해.”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코이를 바라보았다. 불편한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코이는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데, 애슐리는 그의 실책은 무시하고 미리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다음에 스페인 요리를 먹으러 가면 네가 주문을 해 줘.”
“어, 응. 그럴게.”
그 정도는 물론 할 수 있다.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던 코이는 뒤늦게 눈을 둥그렇게 떴다.
“우리, 또 만나는 거야……?”
자신감 없는 물음에 대조적으로 애슐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코이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저 눈만 깜박이는 코이를 보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우린 이제 어린애가 아니잖아, 코이.”
조용한 음성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어젠 사실 내가 널 많이 당황하게 했지. 갑자기 만나서 나도 많이 혼란스러웠고 컨디션도 안 좋아서 평소 같지 않았어. 재판을 꽤 오래 끌었거든. 바로 다음 일을 준비해야 했고.”
애슐리의 로펌이 최근 큰 소송에서 이겼다던 기사를 떠올린 코이가 급히 정신을 차리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벌써 10년이 지난 일이잖아, 그렇지?”
“응.”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전에 무슨 사이였건 모두 지난 일이고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지 못할 이유도 없어. 안 그래?”
“그, 그래.”
코이의 마음속에 조금씩 희망이 자라났다. 혹시, 하는 기대와 함께 서서히 밝아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애슐리가 덧붙였다.
“네가 이왕 여기까지 왔고, 난 가능하다면 새로 시작했으면 하는데. 물론 네가 동의한다면 말이지만.”
“무, 물론이지. 나도 원해, 당연히.”
코이는 다급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기대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설마, 혹시.
애쉬도 나를.
“코이.”
기다렸던 걸까.
애슐리가 코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문득 코이는 한참 앳된 그의 얼굴을 지금의 그와 겹쳐 보았다.
〈코이.〉
애슐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코이는 그 모든 것이 아주 느린 화면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아해.〉
“우리, 이제.”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때, 애슐리가 말했다.
“친구가 될까?”
“……어?”
코이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헤벌죽 웃으며 눈을 깜박였다. 애슐리의 말을 그는 즉시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나사 빠진 것처럼 감탄사만 흘린 그에게 애슐리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코이, 내가 한 얘기 알아들었어?”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이며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애슐리의 행동에 코이는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코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 알지. 친구, 그래, 친구 하자.”
황급히 더듬거리며 말했던 코이는 주저하며 덧붙였다.
“이제 친구 사이로 지내자는 말이지……?”
반신반의하며 묻자 애슐리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었다.
“그래, 못 할 거 없잖아? 우린 고등학교 동창이고, 잠깐 사귀었다고는 해도 벌써 10년 전 얘기니까.”
그의 말엔 틀린 데라곤 전혀 없었다. 너무나 완벽하게 아귀가 맞아떨어져 허점을 찾아 공격을 할 여지도 남지 않았다.
“그……래.”
코이는 필요 이상으로 말을 끌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뭔가 마음이 이상한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난 애쉬에게 뭘 기대했던 걸까? 혼란스러운 와중에 당혹감이 찾아왔다.
그저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생각해 놓고서, 설마 또 다른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걸까?
애슐리가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했다는 것도 그저 감사해야 할 판에 지금 이 감정은 뭔지 모르겠다. 파렴치하고 배은망덕하다는 생각에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어졌을 때, 마침 직원이 첫 요리와 함께 와인을 가져왔다.
접시를 내려놓은 뒤 그는 음식에 대한 설명을 했지만 코이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충격이 사라질 때까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직원이 자리를 떠나고, 그때까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던 코이를 향해 애슐리가 와인글라스를 들어 보였다.
“건배할까, 코이?”
“어? 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코이는 황급히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었다. 얼떨결에 볼을 붙잡았던 그는 애슐리가 들고 있는 잔을 보고 황급히 손을 옮겨 스템을 긴장한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런 코이를 기다려 주었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재회를 축하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는 덧붙였다.
“우정을 위해.”
코이는 어렵게 입을 열어 애슐리의 말을 반복했다.
“우정을, 위해.”
가볍게 잔을 들어 보였던 애슐리가 와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코이 또한 조심스럽게 술을 입 안으로 넘겼지만 눈이 돌아가게 비쌀 게 분명한 와인은 도무지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애슐리는 완전히 나에 대한 마음을 접었구나.
너무나 당연하다.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지 않은가. 그것도 고작해야 키스를 나눈 게 전부인.
머뭇머뭇 글라스를 내려놓았을 때, 건너편에 앉은 애슐리와 눈이 마주쳤다.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을 본 코이의 마음에 공허함이 더 크게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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