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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148/216)

148화

“바, 바지는 짧아져서 못 입어.”

황급히 변명을 했지만 애슐리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럼 셔츠는?”

날이 선 물음에 코이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건 반팔이니까…….”

처음 샀을 때 꽤 여유 있는 걸 사서 아직도 입을 수는 있었다. 물론 좀, 아니 상당히 작긴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좋은 옷이라고 해 봐야 10여 년 전 애슐리가 사 줬던 게 전부인 탓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악착같이 모으기 바빴으니까.

그 덕에 결국 목표를 이뤄 동부에 와 애슐리를 만나게 된 것이지만 거기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애슐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분은 충분히 상하게 한 것 같지만.

하, 갑자기 한숨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애슐리가 미간을 모은 채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너한테 준 거니까 네가 어떻게 쓰건 네 마음이지.”

곧이어 그는 피식 웃더니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어째서 맞지도 않는 옷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가지만.”

“하지만.”

코이는 머뭇거리다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네가 사 준 걸 어떻게 버려…….”

애슐리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꽉 잠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넌 정말…….”

애슐리가 또다시 하려던 말을 그만뒀다. 코이는 초조해하며 다음 말을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애…….”

“알았어, 코이. 이제 그만 가.”

코이는 주저했지만 애슐리는 찌푸린 얼굴로 그를 재촉했다.

“어서 내리라고. 피곤하니까.”

“어, 응…… 미안해.”

코이는 어쩔 수 없이 사과하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고 두 걸음 떨어지자 곧바로 차는 출발했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코이는 완전히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했다.

별로 대단한 기대를 한 것도 아니잖아.

열쇠를 돌려 문을 열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건물의 지하에 있는 작은 방은 원래 창고였던 곳을 개조한 공간이라 창도 하나 없고 쾌쾌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코이는 어차피 냄새를 맡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 바깥 일을 하면서 해는 충분히 쬐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월세로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였다.

궁핍함은 그를 평생 따라다녔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애슐리를 그렇게 다시 만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좀 더 제대로 만났으면 좋았을걸.

‘제대로’라는 게 어떤 건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그는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도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

눈을 뜬 것은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고 난 뒤였다. 난데없이 울리는 휴대 전화의 벨 소리에 부석거리는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깬 그는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하품과 함께 뭉개진 발음으로 웅얼거리자 사이를 두고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코이?

“어…….”

여전히 몽롱한 의식에 멍하니 반응한 코이에게 상대가 다시 말했다.

- 나야, 코이. 아직 안 일어났어?

누군지 깨닫는 데까지는 몇 초가 더 필요했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그만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우당탕,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코이는 허겁지겁 휴대 전화를 고쳐 쥐었다.

“여, 여보세요.”

- 괜찮아? 어마어마한 소리가 들리던데.

“괘,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애, 애쉬? 맞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애슐리의 얼굴이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했다. 더듬거리며 뒤늦게 확인하자 웃음이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 확인이 너무 빠른 거 아냐?

“으, 으응.”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짓궂은 목소리에 코이는 저절로 얼굴이 풀어졌다. 덩달아 하하, 웃은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 몸은 좀 어때? 많이 피곤하지?

“아, 아니. 괜찮아. 푹 잤어. 저, 무슨 일이야? 갑자기…….”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고 묻자 건너편에서 여전히 웃음이 실린 목소리로 애슐리가 말했다.

- 네가 전화하라고 했잖아.

물론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연락을 줄 줄은 몰랐다. 코이는 반가워하면서도 솔직히 대답했다.

“나한테 화난 줄 알았어…….”

그 말에 애슐리는 선뜻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 약속은 내일이라고 했지? 오늘 별일 없다면 저녁 식사라도 같이하지 않을래?

“오, 오늘?”

생각도 못 한 제안을 듣고 코이의 음성이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다. 애슐리는 여전히 느긋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 그래, 나도 마침 시간이 있고 너도 저녁을 산다고 했었으니까.

물론 맞는 얘기다. 하지만 애슐리가 먼저 전화를 해 약속을 잡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코이는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코이의 반응을 알 리 없는 애슐리가 건너편에서 말했다.

- 별로 내키지 않으면…….

“아, 아냐! 그럴 리가, 놀라서 그랬어. 정말이야, 난 좋아. 너무 좋아.”

감정을 우르르 쏟아 내고 난 뒤 코이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덧붙였다.

“이렇게 빨리 연락 줘서 고마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쩔 줄 모르고 감사의 말을 하자 애슐리가 다시 웃음을 머금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 천만에. 식사는 네가 살 테니까 장소는 내가 고를게. 적당한 레스토랑을 알고 있어.

“어, 아, 그래.”

코이가 아는 식당이라고 해 봐야 그린벨이나 그 정도 수준의 싸구려 레스토랑이 전부였다. 애슐리의 수준에 맞는 곳이라면 가격도 어마어마하겠지. 코이는 생각했으나 이내 각오를 굳혔다. 가지고 있는 현금을 전부 가지고 나가면 될 것이다.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또 오겠는가. 내심 다짐하는데, 애슐리가 물었다.

- 그럼 6시에 데리러 갈까? 어때?

“어…….”

괜찮다고 말하려던 코이는 멈칫했다. 회사 트럭은 넬슨의 저택에 있고, 평소 그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녔다. 애슐리가 추천하는 레스토랑에 가려면 차가 필요할 것이다. 렌트를 해야 하나? 지금 바로 알아보면 적당한 차를 찾을 수 있을까?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돌아다니는데, 애슐리가 말했다.

- 식사는 네가 살 테니까 교통은 내가 책임질게. 괜찮지?

“아…… 응.”

코이는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둘은 더 이상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고, 각자 책임을 나눠서 맡는 것은 친구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차를 빌려 그를 데리러 가는 것이 선을 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애슐리와 자신의 관계는 예전과 다르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 코이는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그럼 부탁할게. 어제 헤어진 곳에서 6시에.”

- 좋아.

애슐리는 선뜻 대답한 뒤 덧붙였다.

- 옷은 가벼운 정장이면 되니까 셔츠에 넥타이만 해도 돼. 구두는 꼭 신고.

“아, 응.”

자신의 낡은 운동화로 잠깐 시선을 향했던 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황급히 입고 갈 옷을 준비했다. 자신이 가진 그럴듯한 옷이라고는 예전에 애슐리가 사 준 게 전부다. 그도 이미 알고 있으니 당황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싸구려지만 넥타이와 정장 바지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안쪽에 넣어 둔 구두도 꺼냈다. 두어 번 신은 게 전부라 아직 새것이지만 먼지가 앉은 게 보였다. 서둘러 솔을 꺼내 구두를 닦고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자 어느덧 약속했던 시간이 다 되었다.

* * *

애슐리의 차는 정각에 도착했다. 먼저 길에 나가 서 있던 코이는 그의 벤테이가가 멈추자마자 재빨리 올라타고 스스로 문을 잠갔다.

“어서 출발하자, 여긴 위험해.”

습관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코이의 모습에 애슐리는 피식 웃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애슐리의 차가 동네를 빠져나와 큰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코이는 몸의 긴장을 풀었다.

다음부터는 다른 데서 만나자고 해야겠어.

애슐리의 번쩍번쩍한 차를 볼 때마다 코이는 불안해졌다. 혹시나 강도라도 만나서 애슐리가 총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죄책감이 가슴을 가득 메워 버렸다.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마음을 다잡았던 코이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 일부러 밝게 말을 꺼냈다.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 우린 어디로 가는 거야?”

애슐리가 짧게 말했지만 코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프랑스어야. M, O, N…….”

애슐리가 불러 준 스펠링을 서둘러 휴대 전화에 입력한 코이는 곧 뜻을 알 수 있었다.

나의 즐거움.

“왜 굳이 프랑스어를 썼을까?”

“프렌치 레스토랑이니까.”

순간 코이는 당황했다. 프랑스 요리라고는 전혀 알지 못한다. 언젠가 달팽이를 먹는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럼 지금 먹으러 가는 게 그건가?

급히 레스토랑을 검색해 봤지만 홈페이지도 찾을 수 없었다. 불안해하는 코이와는 달리 애슐리는 별다른 반응 없이 정면만 바라보며 운전을 했다. 차는 북적이는 주말의 도로를 비집고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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