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다음 말을 입에 담는 데에는 지금까지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코이는 힘껏 주먹을 틀어쥐고 깊은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나누어 뱉은 뒤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만나러 온 게, 많이 폐가 됐어?”
“그래.”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애슐리는 내뱉었다. 또다시 굳어지고 만 코이에게서 그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너무 일찍 왔어.”
“일찍?”
그 말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애쉬는 날 만나려고는 했던 걸까? 내가 만약에 계속 서부에 있었다면 어느 날 갑자기 애쉬가 날 찾아왔을까?
“혹시 날 만나러 올 생각이었어……?”
머뭇거리며 묻자 애슐리는 이번에도 선뜻 대답했다.
“그래.”
코이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안도감과 함께 기쁨을 느끼면서도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냥 서부에서 애슐리를 기다리는 게 나았을까? 만약 애슐리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면 갑자기 나타난 코이를 보고 당혹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코이는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내가 여기 온 게 잘못한 거야……?”
애슐리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짧게 웃었다. 어딘지 허탈한 듯한, 그러면서도 신경질적인 웃음 뒤로 그는 말했다.
“그래, 네가 내 계획을 망쳐 버렸어. 완전히.”
코이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불안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 찾아왔다. 내가 또 애슐리에게 큰 실수를 저질렀어.
“미안해, 몰랐어.”
코이가 할 수 있는 건 사과뿐이었다. 거듭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던 그는 문득 떠올렸다. 자신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10년이 더 걸렸다. 애슐리는 언제쯤 코이를 찾아올 생각이었을까.
“글쎄.”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앞으로 10년 뒤쯤?”
“그럼 20년 넘게 못 만날 뻔했던 거야?”
갑자기 허탈해져 코이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애슐리에게는 미안하지만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여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20년이나 지난 후에 찾아오려고 했는지 몰라도 그때쯤이면 코이는 기다리다 지쳐 메말라 죽었을지도 모른다.
“20년은 너무 길잖아.”
코이가 탄식하듯 말했으나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정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코이는 계속된 침묵에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왜 20년이나 기다렸다 만나려고 했어?”
아예 잊으려고 했다면 굳이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을 만나려 했다는 것에 코이는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지나치게 긴 기간이 마음에 걸렸다.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무시하려는 걸까, 하고 생각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딱히 20년을 채우려고 했던 건 아냐.”
“그럼?”
어딘지 기운 빠진 듯한 음성에 코이가 다시 물었다. 애슐리는 여전히 그를 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그 정도 지나면 내 계획대로 될 것 같았어.”
이번에도 코이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계획?”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애슐리가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각오를 했지만 그가 입을 열었을 때 흘러나온 말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네 목적은 그저 날 만나는 것뿐이었단 말이지?”
“응…… 맞아.”
코이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과도 하고 싶었고.”
“무슨 사과?”
“그때 내가…….”
코이는 바짝 마른 입 안에 억지로 침을 만들어 삼킨 뒤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너를 선택하지 않았던 거.”
애슐리에게서 말이 없어졌다. 코이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침묵을 느끼며 간신히 더듬더듬 고백을 계속했다.
“너한테 상처 줬던 거, 사과하고 싶었어. 내가 그때…… 아버지를 택하면서, 너한테 심하게 말했던 거, 계속 후회하고 있었어. 그때 난…… 내가 아버지를 택하면서 내가, 넌 가진 게 많다고 말했던 건.”
코이는 떨리는 숨을 사이에 두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넌 나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코이.”
갑자기 애슐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퍼뜩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든 코이에게 애슐리가 시니컬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 더 불행하고 안 하고를 겨루는 게 의미가 있어?”
코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다. 이제 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미안해.”
이번엔 다른 이유로 사과했지만 역시나 마찬가지다. 이것 또한 소용없는 짓이었다.
“됐어, 이제.”
애슐리가 다시 무심한 어조로 되돌아가 말했다.
“다 끝난 일이야.”
그의 말이 맞다. 코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다시 서부로 돌아갈…….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갑자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잘 가, 코너 나일즈.”
단호하게 들려온 인사말에 코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애슐리의 계획이 어떤 거였는지는 몰라도 이미 둘은 만났고 여기까지 왔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재회였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코이는 한 번 더 기회를 잡고 싶었다.
“저, 전화번호 알려 줘.”
황급히 입을 열자 그제야 애슐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렴풋이 보이는 찌푸린 얼굴에 코이는 용기를 그러모아 말을 이었다.
“다음에 내가 한 번 더 식사를 사겠다고 했잖아. 약속을 정하려면 연락처를 알아야지.”
“하아…….”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애슐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아하며 짜증을 내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그를 바라보는 코이를 확인한 애슐리는 결국 마지못한 듯 슈트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가 명함을 건네주기를 잔뜩 긴장한 채 기다리는데, 뜻밖에도 애슐리는 명함을 뒤집어 핸들 위에 올려놓고 뒷면에 뭔가를 썼다.
“자.”
애슐리가 준 명함을 소중히 받아 든 코이가 뒤를 확인하자 애슐리가 말했다.
“내 개인 번호야. 거기로 전화해.”
“어…… 으, 으응.”
빠르게 갈겨쓴 숫자를 본 코이의 얼굴이 점차 환하게 밝아졌다. 이제 인사를 마무리하고 차에서 내릴 차례였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휴대 전화를 꺼내 급히 번호를 누르는 코이를 지켜보던 애슐리가 곧이어 울린 휴대 전화의 벨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코이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천천히 휴대 전화를 들어 확인한 그는 처음 보는 전화번호에 다시 코이의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곧 전화를 끊은 코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번호야. 저장해 줘.”
곧이어 그는 쑥스러워하며 덧붙였다.
“스팸인 줄 알고 안 받으면 안 되잖아.”
애슐리가 일부러 안 받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눈치였다.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마지못해 번호를 저장했다.
“그럼, 오늘 정말 고마웠어.”
차에서 내리기 전 코이는 억지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난 곧 다시 서부로 돌아갈 거니까.”
애슐리가 멈칫했으나 그는 깨닫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냥 마지막으로 너에게 좋은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 것뿐이야.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정말 그게 다야.”
더 이상 널 귀찮게 하지 않을게.
코이는 마음속으로 덧붙인 뒤 서둘러 차에서 내리려 했다.
“코이.”
갑자기 애슐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막 차의 문을 열었던 코이가 멈칫하고 돌아보자 애슐리가 물었다.
“데이트는 언제야?”
난데없는 물음에 깜짝 놀랐던 코이는 황급히 대답했다.
“응? 아, 일요일이니까 이제 내일이네. 4시에 만나서 영화 보고 식사하기로 했어.”
문득 애슐리가 했던 말이 떠올라 그는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나는 거라서 아마 데이트는 아닐 거야. 그냥 편하게 친구로…….”
“입을 옷은 있어?”
“어?”
또다시 예상치 못한 말이 돌아와 코이는 멈칫했다. 애슐리는 여전히 무심한 말투로 덧붙였다.
“넌 그럴 생각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도 일단 예의는 갖춰야지. 설마 그런 꼴로 나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유치장에서 반나절 이상을 보냈더니 안 그래도 지저분한 작업복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왠지 민망해져 코이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물론 작업복을 입고 나가진 않지. 나도 좋은 옷은 몇 벌 가지고 있어.”
애슐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내가 사 줬던 건 아니지?”
분명히 농담일 텐데 코이는 따라 웃지 못했다. 당황해 벌게진 코이의 얼굴을 보고 애슐리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진짜야?”
애슐리가 마치 으르렁거리듯이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코이는 당황해 그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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