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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146/216)

146화

한순간에 돌변한 분위기를 둔감한 코이조차도 알아챘다. 어째서인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애슐리의 시선에 코이는 당황해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짚이는 바가 없어 코이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눈치만 봤다.

“저기…….”

“넌.”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으나 이번에도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애슐리는 여전히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발현하지 않았지?”

“어…… 베타야, 아직.”

이미 시기를 지났기 때문에 그의 형질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걸 깨달은 코이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애슐리는 그런 그를 비웃지 않았다. 왜 저런 얼굴로 나를 볼까 불안해하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돌아섰다.

“따라와, 데려다줄게.”

뜻밖의 제안에 코이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다 황급히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

“괘, 괜찮아. 혼자 갈게.”

“어떻게? 택시라도 타려고? 아니면 걸어서?”

사실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다.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코이를 보고 애슐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더니 다시 돌아섰다. 머뭇거리다 결국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탄 코이가 안전벨트를 매자 애슐리는 그제야 차를 출발시켰다.

“데이트는 언제야?”

“어?”

주차장을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슐리가 물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던 코이는 뒤늦게 아,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데이트는 아닌데…… 그냥 식사하고 영화 보는 거야.”

“코이.”

“응.”

황급히 대답하자 흘긋 그를 본 애슐리가 눈에 띄게 입가를 비뚤어뜨렸다.

“그걸 사람들은 데이트라고 해, 코이.”

코이는 선뜻 반응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애슐리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혹시 줄리도 그렇게 생각할까? 고민에 빠진 코이가 머뭇거리다 말문을 열었다.

“저, 그럼…… 만나지 않는 쪽이 좋을까?”

자신은 그런 쪽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줄리가 기대를 갖고 있다면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조심스러운 물음에 애슐리는 무심히 말했다.

“네가 누굴 만나든 나와는 관계 없어.”

반사적으로 코이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에 비친 서늘한 애슐리의 옆얼굴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런 코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애슐리가 말했다.

“즐거운 데이트가 되길 바라, 코이.”

코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떨구었다. 그리고 둘은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침묵했다.

* * *

가로등 불빛도 없는 어두운 골목에 들어선 애슐리가 속도를 줄였다. 권총을 든 강도가 뛰어나와 차에 총질을 하고 카스테레오를 훔쳐가기 딱 좋은 음산한 거리를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코이는 내심 불안해졌다.

밤에 잠을 자다가 총소리를 들은 적도 여러 번이기 때문에 괜한 망상은 아니었다. 이런 비싼 차를 타고 어슬렁거리다가 잘못해서 괴한에게 습격이라도 당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무서웠다. 일반인보다 신체적 능력이 탁월하다는 극알파라도 어쨌든 사람일 이다. 총에 맞으면 당연히 죽는다. 괜히 자기 때문에 애슐리가 이런 곳까지 와서 위험을 자초했다는 생각을 하자 코이는 안절부절못하게 됐다.

“저, 저기, 이 정도면 돼. 혼자 갈 수 있어.”

내리겠다는 의사 표시로 차의 문을 열려 했지만 잠겨 있었다. 순간 당황한 코이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이 차도 안에서 열지 못하게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을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는데, 그런 코이와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냉정하게 애슐리가 말했다.

“네가 사는 곳은 어디야? 더 가야 하나?”

“어…….”

코이는 머뭇거리다 한 쪽을 가리키며 솔직히 대답했다.

“저기야. 모퉁이에 있는.”

애슐리는 별다른 반응 없이 코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다라 애슐리가 차를 세우고, 기다렸다는 듯이 코이가 앉아 있던 조수석의 문이 ‘달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마워, 데려다줘서.”

인사를 한 코이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저기,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않을래?”

말을 꺼내고 보니 이런 곳에 이렇게 좋은 차가 주차돼 있다면 분명히 도난을 당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미 뱉은 말을 취소할 수도 없어서 당황하는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고맙지만 사양할게.”

후, 다행이란 생각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코이를 애슐리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두운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있어 그의 표정을 알기는 어려웠다.

코이는 이제 차에서 내릴 때라는 걸 알았지만 즉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아야 한다. 지금 보내면 절대로 다신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하다못해 전화번호라도 달라고 해, 어서. 지금 당장!

“궁금한 게 있는데.”

“어, 응.”

갑자기 말문을 연 애슐리의 음성에 코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코이를 바라보며 애슐리가 물었다.

“너, 나를 만나러 왔다고 하지 않았어?”

“마, 맞아.”

또다시 고개를 끄덕인 코이에게 애슐리가 한층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대체 넌 나를 만나서 뭘 하고 싶었던 거야?”

이번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나 많은 감정이 일시에 밀려와 코이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어떻게 단 몇 마디로 그 모든 걸 담아 낼 수 있을까. 지금도 먹먹한 심장이 이렇게나 마음을 무겁게 하는데.

“나는…….”

코이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떨리는 목소리에 황급히 헛기침을 해 감정을 억지로 가다듬은 그가 말을 이었다.

“그냥, 너를 보고 싶었어.”

그토록 많은 감정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어둠 속에서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게 다야?”

기가 막혀 하는 듯한 반응에 코이는 얼굴이 붉어졌다. 당연히 어이가 없겠지. 10년도 더 지났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하는 말이라는 게 고작 이런 거라니.

하지만 애슐리의 말대로 그게 전부였기 때문에 코이는 더 할 말이 없었다. 10년이 넘게 죽도록 일해서 모은 돈으로 한다는 게 고작 애슐리 밀러의 얼굴을 보는 것뿐이라면 누구든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코이의 안에서 애슐리 밀러의 존재란 다른 사람이 짐작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컸기 때문에, 이 정도 대가는 오히려 아주 싼 것이었다. 물론 애슐리 또한 그런 코이의 마음은 전혀 알 수 없었고 코이 또한 그것을 굳이 드러내 그에게 부담을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코이는 생각했다. 애슐리가 아직도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 특별한 상대도 없다는 것이 그에겐 어마어마한 행운이었다. 물론 그게 코이 때문이라는 당치도 않은 자만심은 갖고 있지 않았다. 바쁘다든지 관심이 없다든지 애슐리에게는 여러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용기를 낼 기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만약 애슐리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곁에 특별한 누군가가 있었다면 감히 만나서 얼굴을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네 그, 로펌도 찾아갔었는데.”

코이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혹시 얘기 들었어? 메시지 남기라고 해서 연락처랑 남기고 왔었는데.”

벌써 한 달이 넘은 일이다. 전달이 됐다면 진작에 뭔가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코이가 동부에 언제 왔는지 물었던 걸 떠올리며 그는 지레짐작을 했다. 분명 애슐리는 메시지를 전달받지 못한 거라고.

“알고 있어.”

“어…….”

무덤덤하게 흘러나온 말에 코이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애슐리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자 심장이 불안하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바빠서 연락 못 한 거구나, 그렇지? 시간이 없어서.”

“아니.”

다시금 희망을 가지고 황급히 웃으며 물은 말에 애슐리는 가차없이 부정했다.

“난 너를 만날 생각이 없었어.”

코이는 순간 굳어 버렸다. 그의 말을 분명히 들었는데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애슐리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그저 멍하니 애슐리를 바라보기만 하던 코이는 불현듯 떠올렸다.

〈넌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아.〉

〈내가 널 반가워할 거라고 생각해?〉

뒤늦게 코이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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