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한동안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사이에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음 속에서 둘은 조용히 침묵에 잠겨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애슐리였다.
“방금 한 얘기, 무슨 뜻이야?”
그는 여전히 얼빠진 표정이었다. 코이는 그런 그의 반응에 민망해져 시선을 피했다.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깜박하고 실수를 저질렀다.
“네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직 애슐리가 자신에 대한 걸 기억하고 있다는 거에 기뻐해야 할지 뜬금없이 그를 당황하게 한 거에 미안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코이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벌써 애슐리는 모든 걸 짐작하고 있었다.
“코이.”
다소 갈라진 음성으로 그가 물었다.
“네가 콜라에 얼음을 넣지 않았던 건, 돈이 없었기 때문이야?”
대답을 하기 전 코이는 한 차례 크게 숨을 들이켜야 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애슐리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 정도로 가난한 삶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그린벨은 콜라를 리필해 주지 않으니까…….”
코이는 숨을 나누어 뱉으며 마침내 고백했다.
“얼음을 빼면, 더 많이 마실 수 있거든.”
애슐리는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둘은 또다시 침묵에 휩싸였지만 그것이 깨지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너, 내가 아플 때마다 약하고 수프 사 왔잖아.”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불안한 듯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그거 혹시 네 점심값이라든가 그랬던 거 아냐?”
그것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코이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대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그의 손가락이 딱 멈췄다. 불편한 침묵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 짧은 탄식과 함께 숨을 내뱉은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코이, 너는…….”
아버지가 전혀 돈을 안 줬어?
혀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그는 가까스로 삼켰다. 안 그래도 바닥인 코이의 자존감을 지하까지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미 자신이 별생각 없이 저질렀던 수많은 실수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애슐리는 성대를 쥐어짜듯 간신히 말을 꺼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코이의 얼음을 일부러 빼서 줬다거나 뜨거운 음료를 주문해 줬던 자신의 멍청함에 화가 치밀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코이에 대한 원망마저 느꼈을 때, 코이가 대답했다.
“널, 동경하고 있었으니까.”
‘좋아했으니까.’ 대신 코이는 다른 단어를 입에 올렸다.
“내가 그 정도로 가난하다는 걸 알면…… 네가 날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서웠어.”
그런 감정 또한 애슐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누군가 날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더욱이 애슐리는 수도 없이 코이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도 코이는 전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걸까?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애슐리의 혼란을 눈치챈 코이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너와 내가 얼마나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네가 알게 되는 게 싫었거든.”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자 코이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넌 이해하지 못할 거야.”
여전히 애슐리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금 그는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떠오르는 말들은 죄다 바보 같은 질문들뿐이었기에 차라리 침묵하는 쪽이 나았다.
다행히 직원이 음식을 가져와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잠시 깨 주었다. 그러나 각자의 앞에 치즈버거와 더블치즈버거 세트를 내려놓은 직원은 금세 돌아서고, 다시 둘만이 남았다. 고작 3분도 걸리지 않았을 시간에 애슐리는 이성을 되찾았다.
“동부에는 언제 왔어?”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다름 없이 무심하고 냉정한 음성에 코이는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대답했다.
“몇 달 됐어. 앨도 만났는데, 혹시 알고 있어? 앨은…….”
“A타임즈의 기자지. 알고 있어.”
아무렇지 않게 코이의 말을 가로챈 애슐리가 햄버거를 먹었다. 코이 역시 머뭇거리다 그를 따랐다. 한동안 둘은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했다.
코이는 머릿속으로 그와 나눌 대화를 필사적으로 떠올리고 있었지만 도통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침내 애슐리가 햄버거를 전부 먹어 치우고 난 뒤 코이는 간신히 대화를 이어 갔다.
“저, 도와줘서 고마워. ……어떻게 알고 왔어? 저기, 주말이라 넌 파티에 갔을 거라고…….”
반신반의하며 묻자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재판 때문에 회의 중이었어. 비서한테 들었지, 경찰이 연락을 해 왔다고.”
“경찰이? 어떻게?”
넬슨의 말이 틀렸다는 걸 알자 대번에 코이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제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나 어떻게든 애슐리와 대화를 이어 가고 싶은 마음에 그는 다시 물었다. 애슐리는 애꿎은 감자튀김 한가운데를 부러뜨리더니 곧 기름이 묻은 손을 싸구려 종이 냅킨에 닦았다.
“변호사를 선임하겠다면서 날 찾았다고, 잡혀 온 사람들 이름을 전부 불러 줬다던데.”
그걸 비서가 보고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 건 비서 선에서 그냥 무시해 버릴 줄 알았는데.
“저, 정말 넬슨이랑 잘 아는 사이야?”
10여 년이 흘렀으니 그동안 관계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애슐리가 넬슨과 어울려 다니다니 상상도 하기 어려웠으나 그래도 코이는 확인하고 싶었다. 나름의 각오를 하고 묻자 애슐리는 드러내 놓고 코이를 비웃었다.
“내가? 약쟁이를?”
“……그렇겠지, 물론.”
애슐리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코이는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둘 사이에 전혀 친분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애슐리는 전혀 웃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망상을 한 이유가 뭐야?”
‘착각’도 아닌 ‘망상’이라는 단어에 코이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넬슨이 유치장에서, 네가 곧 자길 꺼내 줄 거라고 했어.”
“내가? 왜?”
이번엔 미간을 찌푸린 그를 보고 코이는 슬그머니 대답했다.
“네가 자기 변호사라고 하면서…….”
“……하.”
애슐리는 기가 찬 듯 짧고 신경질적인 탄성을 내뱉었다. 흠칫 놀란 코이는 황급히 덧붙였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어, 금방 들통났을 텐데. ……거짓말이었던 게 맞지?”
“그게 진실이었다면 내가 지금 너와 마주 앉아서 이런 싸구려 햄버거나 먹고 있었을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애슐리는 가차없이 되물었다. 코이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론 그건 아닌데. ……그럼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을까, 해서.”
“그거야 당연히 시간을 벌려고 했던 거겠지.”
애슐리는 주저없이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닌 소동이었을 테니 어차피 하룻밤 지나면 풀려났을 거야. 그리고 내가 바빠서 시간 안에 못 왔다거나 하는 식으로 핑계를 만들어 낼 생각이었겠지.”
“그렇구나.”
코이는 얼떨떨해하는 얼굴로 수긍했으나 내심으로는 간도 크다고 생각했다. 자신 같으면 절대 그런 대담한 거짓말을 꾸며 내지 못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했던 코이는 뒤늦게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얼굴을 본 애슐리가 미간을 모았다. 이번엔 또 뭐냐는 듯이. 하지만 코이는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심호흡을 해야 했다. 방금 자신이 알아챈 놀라운 사실을 입에 담는 건 넬슨이 지어낸 허접한 거짓말 따위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애쉬, 그러면…… 그 명단에서, 내 이름을 보고 날 찾아왔던 거야? 날 도와주려고?”
감자튀김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애슐리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또다시 그는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 침묵이 코이에게는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코이의 심장이 거칠게 뛰어 대기 시작했다. 지금껏 애써 떨치려 해도 한사코 달라붙어 있던 불안한 마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애슐리도 나를 보고 싶었던 걸까? 내가 그리웠을까? 나처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애쉬…….”
“착각하지 마.”
들뜬 음성으로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갑자기 애슐리가 서늘한 목소리로 코이의 말을 가로막았다.
순간 코이는 놀라 멈칫했다. 그대로 굳어진 코이를 테이블 너머에서 바라보며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난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설마 네가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말했던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