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수다스럽게 말한 코이와는 대조적으로 애슐리는 무심히 말했다.
“여전히 작은데.”
“작다니!”
코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항의했다.
“내가 얼마나 자랐는데, 10센티도…… 넘게…….”
애슐리를 향해 당당하게 소리쳤던 코이의 음성이 점차 사그라져 결국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한껏 시선을 올려 애슐리와 눈을 맞췄던 코이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기…… 너, 또 키가 컸어?”
“뭐?”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던 애슐리가 곧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20센티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코이는 아무리 열심히 달려가도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거북이가 된 기분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애슐리와 자신의 차이가 더 확연히 눈에 보였다. 키도 자라고 어깨도 제법 넓어진 데다 근육도 붙었다고 생각했지만 애슐리와 마주 서니 자신이 한없이 볼품없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키도 어깨도, 가슴의 크기는 물론 흉통마저 애슐리가 그의 두 배는 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아이스 하키, 대학 가서도 했어?”
코이가 머뭇거리며 묻자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가끔 몸 푸는 정도는. 여긴 주가 달라서 형질 때문에 팀에 못들어가거나 하진 않거든. 그것도 차별이니까.”
“……그렇구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패배를 인정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애슐리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한 걸음 다가섰나 싶었더니 세 걸음 멀어져 버린 존재에게 코이는 완전히 항복해 버렸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안 한 거지?”
“프로도 아닌데 그런 걸 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진 않아.”
당연한 얘기에 이번에도 코이는 납득했다. 그 정도로 바쁜 애슐리가 이런 시간에 자신 때문에 경찰서까지 오다니 또다시 미안해졌다. 사과와 함께 감사의 말을 하려는데, 애슐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볼일은 끝났으니…… 이만 헤어질까.”
일부러 보란 듯이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는 애슐리의 행동에 코이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의 말이 맞다. 이미 한밤중이고, 곧 새벽이 밝아 올 것이다. 지금은 헤어지고 다시 약속을 잡는다는 건 너무나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감정은 이성에 따를 상황이 아니었다. 어처구니 없는 재회였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미 코이는 그가 얼마나 만나기 힘든 사람이 되었는지 실감하고 있었다. 지금 애슐리를 그냥 보낸다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죽기 전에 그런 기회가 오긴 할지 미지수였다. 그 때문에 돌아서는 애슐리의 모습을 보는 순간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자, 잠깐만! 잠깐 기다려 줘, 애쉬”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애슐리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고작 몇 걸음을 떼었을 뿐인데 벌써 애슐리는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그것이 자신과 애슐리의 거리를 말해 주는 것 같아 코이는 애가 타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앞에 섰다.
“저기, 오늘…… 고마웠어. 괜찮다면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을래?”
이렇게라도 당장 약속을 잡지 않으면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찾아가도 만나 주지 않고, 메시지를 남겨 봤자 전해 주는 것도 아니다. 지금 바로 당사자와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코이는 애가 타 간절한 마음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거절할지도 몰라.
머릿속에는 온갖 시뮬레이션이 떠돌아다녔다. 애슐리가 찡그린 얼굴로 시간이 없다고 말하거나, 비서에게 말을 전하라고 한다거나, 최악의 경우 단순히 그저 싫다고 단칼에 잘라 버릴 수도 있다. 어떤 답변이 오든 코이는 그저 매달리는 것밖에는 수가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는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좋아.”
“……어?”
돌아온 대답에 코이는 멍청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그런 코이를 내려다보며 애슐리가 다시 말했다.
“좋다고. 어디로 갈까? 지금 문을 연 데는 별로 없을 텐데.”
“지, 지금?”
너무나 순식간에 진행된 얘기에 오히려 코이가 당황하고 말았다. 어떻게든 약속을 잡을 생각이었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할 마음은 없었다.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해 그동안 쌓인 얘기도 하고 묵혀 왔던 감정을 풀겠다는 각오였는데, 이렇게 난데없이 기회가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쩔쩔매는 코이의 반응에 애슐리는 무심히 입을 열었다.
“네가 곤란하다면…….”
“아, 아냐,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 나도 배고프니까, 좋아, 지금 당장, 아주 좋아!”
코이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 허겁지겁 외친 그는 황급히 휴대 전화를 꺼내 주변의 식당을 검색했다. 당연히 문을 연 곳은 보이지 않았다. 반경을 넓히고 또 넓혀 간신히 한 군데를 찾아냈을 때, 코이는 반갑게 입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어.”
묘한 감탄사에 애슐리가 시선을 내렸다. 코이가 발견한 식당을 그도 역시 확인했다. 머뭇거렸던 코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여기도 그린벨이 있네.”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애슐리의 표정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코이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최근엔 안 갔지? 내가 사는 곳에도 있어서 가끔 가는데…… 여전히 맛있더라고.”
눈치를 보며 다음 말을 찾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그린벨에 가자는 거지?”
순간 코이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의 반응에 애슐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런 얘기를 꺼낼 이유가 없잖아.”
코이는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 거리가 좀 있긴 한데 문을 연 데는 여기뿐라서…… 괜찮을까?”
애슐리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저 돌아섰다. 황급히 뒤를 따라간 코이는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주차되어 있는 벤테이가를 보고 멈칫했다. 설마 했지만 예상이 맞았다. 애슐리가 스마트키를 꺼내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반응하는 차의 모습에 코이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밴을 타네…….”
잘나가는 변호사이니만큼 당연히 고급 세단을 탈 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벤테이가 또한 눈이 튀어나올 만큼 고가의 차였지만 밴이라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러나 애슐리는 코이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운전석의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멍하니 보고 있던 코이 또한 황급히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 네비게이션을 켜고 목적지를 찍은 애슐리가 차를 출발시켰다.
코이는 그의 옆에 앉아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여전히 애슐리가 밴을 타고 다닐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만약 이 차가 카이엔이었다면 코이는 완전히 착각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문득 궁금해졌다. 음악을 틀면 또 그 망측한 노래가 나올까?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차는 조용히 달려 그린벨로 향했다.
* * *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임에도 식당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다. 아마 근처에 갈 만한 식당이 이 시간에는 여기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운 좋게 창가의 빈자리를 잡은 코이는 메뉴판을 들고 입을 열었다.
“내가 살게, 네 덕에 풀려났으니까.”
일부러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애슐리는 웃지 않았다. 귀퉁이가 구겨진 싸구려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에 코이는 터무니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예전의 애슐리는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과 이곳에 앉아 싸구려 음식을 양껏 먹어 치웠다. 지금 그의 모습은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애슐리의 넥타이 한 장이 코이가 입고 있는 옷 전부를 합한 것보다 더 비싸 보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도, 우아하고 긴 손가락도, 구김 하나 없는 슈트까지도 모두 입을 모아 말해 주는 듯했다.
이 남자는 이런 싸구려 레스토랑에서 햄버거 따위나 먹을 사람이 아니라고.
“치즈버거, 더블로.”
그런 마음속 외침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애슐리가 말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코이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자신도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탄산음료를 추가하자 식사보다 먼저 음료가 나왔다. 별생각 없이 콜라를 빨대로 쭉 빨아들이는데, 문득 애슐리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래?”
의아해하며 물은 코이에게 애슐리가 흘긋 그의 콜라 잔을 보고 말했다.
“이젠 얼음을 넣네.”
“어? 아…….”
그제야 시선의 의미를 파악한 코이가 무심코 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 정도 돈은 있거든.”
애슐리는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코이가 한 차례 더 콜라를 빨아들인 다음에야 비로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뭐?”
짧은 한 마디에 코이는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로 애슐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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