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216)

139화

“아직도 안 만났어?”

주말이 되어 함께 점심을 하게 된 에리얼은 코이의 고백에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코이는 무안해져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어, 응…… 바빠서.”

“너 여기에 애쉬를 만나러 온 거 아니었니? 그보다 급한 일이 뭐가 있어서?”

마침 직원이 주문한 음료와 식사를 들고 왔다. 세팅이 끝난 뒤 그가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이것저것 실제로 듣고 보니까 안 되겠다 싶었던 거지? 괜찮아, 포기한다고 해도. 그럴 수 있지, 실망하는 게 당연해. 난 오히려 환영이야.”

“아냐, 그런 거.”

코이는 당황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나지도 않았는데 실망을 왜 해. 그냥 좀, 집 구하고 직장 다니고 하다 보니까 시간이 안 돼서…….”

“핑계라는 거 너도 알지?”

에리얼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도망치거나 변명을 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코이는 망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용기가 나질 않아서.”

“여기까지 와 놓고?”

“그러니까.”

코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괜히 접시 위의 프렌치프라이를 뒤적거렸다.

“막상 이제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쉽지 않아. 혹시 애쉬가 날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고,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누군가 사귀고 있다거나 하면 민폐니까…….”

뒷말은 자신감 없이 사그라들었다.

그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애슐리 밀러는 동부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고,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수시로 기사가 나오고 그에 대한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애슐리 밀러의 사생활쯤은 쉽게 알 수 있다. 벌써 코이는 현재 애슐리의 모습은 물론 그의 아버지 도미니크 밀러의 사진까지 확인했다.

도미니크 밀러는 벌써 몇 년 전 은퇴를 해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준 뒤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보다 훨씬 전에 찍었을 게 분명한 몇 장 없는 사진 속에서도 애슐리가 그를 빼닮았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은발에 가까운 백금발과 보라색 눈동자가 특히 그랬다.

하지만 달라.

코이는 단정지었다. 애슐리가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그도 인정했다. 그러나 ‘역시 도미니크 밀러의 아들’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모두가 입을 모아 ‘판박이’라고 하는 외모는 더욱 그랬다. 그들은 얼핏 보기엔 닮은 듯했지만 코이의 눈에 뜯어볼수록 완전히 달라 보였다. 무엇보다 뱀처럼 차갑고 냉혹한 얼굴의 도미니크 밀러와 애슐리가 닮았다니 다들 보는 눈이 형편없다.

그도 그럴 것이, 코이는 지금도 자신을 향해 웃던 애슐리의 얼굴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더욱 지금의 평판을 믿을 수 없었고 직접 눈으로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애슐리를 다시 만나면 어떻게 될까. 여태 수많은 상상을 해 왔지만 막상 눈앞의 현실이 되자 두려움이 앞섰다.

날 보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자신감 없이 내려앉는 시선에 에리얼은 찌푸린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다가 결국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둘의 문제였다. 남이 이러쿵저러쿵할 일이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남의 연애에 끼어들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는 건 10대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들은 이제 성인이었고, 모든 판단은 스스로 내려야 한다.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오로지 그들만의 것이니까.

이러다 포기하면 더 잘된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을 때였다.

“어머, 앨.”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하고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내려놓은 앨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줄리, 안녕.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가볍게 포옹을 나눈 뒤 다시 몸을 일으킨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만나다니 운이 좋네. 안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한 줄리가 흘긋 건너편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녀가 코이를 흘끔거리는 것을 눈치챈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줄리, 이쪽은 내 고등학교 동창 코이.”

“안녕하세요, 전 줄리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선뜻 코이에게 악수를 청한 줄리의 얼굴이 화사하게 빛났다. 에리얼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봐도 줄리는 코이에게 관심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에리얼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같이 점심 먹을래? 혹시 일행이 있어?”

에리얼의 제안에 줄리는 즉시 말을 받았다.

“아니, 그래도 될까? 안 그래도 자리가 없어서 나가려던 참이었거든.”

둘의 시선이 동시에 코이에게로 향했다. 물론 코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고마워요.”

동의가 떨어지자마자 에리얼과 코이의 사이에 있는 의자를 빼 앉은 줄리가 미소를 지었다. 에리얼은 직원에게 손을 들어 메뉴북을 청한 뒤 찬찬히 코이의 모습을 살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코이는 갑자기 10센티미터가 넘게 자랐다. 어깨도 제법 넓어지고 여장이 잘 어울렸던 예쁘장한 얼굴도 꽤 남자답게 변했다. 사실 그가 이렇게 변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도 고등학교 동창들은 지금 코이를 절대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애슐리마저도.

하긴 코이가 이렇게 미남이 될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지.

다 자란 남자인데 코이에게는 여전히 소년미가 남아 있어 상큼한 느낌마저 들었다. 고등학교 때는 마르고 나약한 분위기에 어두운 분위기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때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지금의 코이라면 상당히 인기가 있을 것이다. 바로 눈앞의 여성이 이렇게 관심을 보이듯이.

코이가 너무 서툰 게 문제지만.

오히려 그 점이 매력 포인트가 될 수도 있다. 거기다 소년처럼 풋풋한 그의 이미지에는 오히려 플러스였다.

줄리 또한 코이가 마음에 드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줄리의 능란한 대화 스킬에 휩쓸려 얼렁뚱땅 대답하고 있는 코이를 보며 에리얼은 만족스럽게 음료를 마셨다. 슬슬 기회를 봐서 빠져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리고 식사가 끝날 즈음 코이는 줄리와 연락처를 나눴다.

* * *

코이가 사장의 지시로 교외의 대저택에 가게 된 것은 어느 금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그는 간신히 꽉 막힌 도로를 빠져나와 그나마 한산해진 숲길을 얼마간 달려갔다. 정신 없는 매일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제법 잘 적응하고 있었다. 주말에는 줄리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 동부에 온 후 에리얼이 아닌 다른 사람과 약속을 잡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상대가 애쉬가 아니라는 건 그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주, 그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애슐리를 찾아갔다. 로펌 회사가 있는 화려한 빌딩 앞에서 잔뜩 주눅이 든 자신을 채찍질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지만 역시나 경비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애슐리 밀러를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꺼내자마자 쫓겨났다. 그들은 코이를 부랑자나 테러리스트 취급했다.

〈너무 당연해.〉

코이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은 에리얼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알겠지? 애슐리 밀러는 간단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람이 됐다는 걸.〉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물러날 수도 없었다. 무작정 찾아가서 이름을 남기는 것 외에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고민에 빠져 차를 달리는 동안 그는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길을 따라 서 있는 화려한 저택들은 도로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자리에 위치해 사방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목적지인 저택 앞에 주차되어 있는 고가의 차들을 본 코이는 자신이 타고 온 낡은 트럭에서 장비를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그가 할 일은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 주방의 싱크대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사장에게서 들은 말로는 처음 주인이 이 집을 샀을 때 그들의 회사에서 집 안 전체의 인테리어와 공사를 했고, 이후 수시로 보수를 해 주는 상황이라고 했다. 요컨대 단골 고객이라는 얘기다.

코이는 으흠, 헛기침을 한 뒤 현관의 벨을 눌렀다. ‘질이 나쁜 손님이니까 최대한 말을 섞지 마.’라고 했던 사장의 주의를 되새겼을 때, 안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문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미소를 지으며 틀에 박힌 인사를 건네려던 코이가 놀라 굳았다. 눈앞에 선 남자는 방금 전까지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잠옷 바지에 실내 가운을 걸쳤고, 머리는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게슴츠레한 두 눈과 파리한 안색은 마치 병자처럼 보였으나 코이를 놀라게 한 건 그의 행색이 아니었다.

벌써 10여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코이는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애슐리가 그를 구원해 주기 전까지 코이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가해자의 얼굴을.

넬슨.

코이는 사색이 되어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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