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그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웃음기라고는 없는 앨의 얼굴을 바라보며 코이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는 곧 덧붙였다.
“난 애쉬를 믿어.”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던 애슐리의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 돌아서던 그의 참담했던 표정도. 아직도 그것은 코이의 마음을 아프게 해, 그는 고개를 숙이고 와인을 마시는 척 눈물이 나려는 것을 애써 감췄다.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다. 변호사 애슐리 밀러에 대한 온갖 기사와 소문에도 불구하고 코이는 믿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변함없는 애슐리 밀러일 뿐이라고.
에리얼은 그런 그를 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다정한 포옹을 나누며 에리얼이 말했다. 코이는 그녀를 마주 끌어안은 뒤 개럿과 악수를 나눴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만나서 반가웠어요, 개럿.”
“다음에 또 놀러 와요.”
“연락해, 자주.”
개럿과 에리얼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 번 더 인사말을 나눈 코이가 돌아섰다. 익숙한 밤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뒷모습에 에리얼은 잠시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코이가 길 끝에서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에리얼은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찾는 사람 이름이 애쉬야?”
에리얼의 어깨를 안고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개럿이 물었다. 에리얼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그래, 애슐리 밀러.”
때마침 울린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마치 효과음처럼 빈 복도에 울려 퍼졌다. 개럿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에리얼을 내려다봤다. 에리얼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는 채로 말했다.
“맞아, 그 애슐리 밀러. 변호사.”
그리고 그녀는 얼어 버린 개럿을 내버려 두고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뒤늦게 허둥지둥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개럿이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정말이라고? 그 애슐리 밀러?”
개럿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에리얼은 도착 층을 누른 뒤 물러나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코이도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그 자식이 얼마나 개자식이 돼 버렸는지.”
* * *
“제스, 나 커피. 샷 세 개 넣어서.”
“네, 변호사 님.”
책상을 스쳐 지나가며 내린 지시에 비서는 재빨리 일어나 커피를 준비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초콜릿이 듬뿍 들어간 브라우니도 잊지 않았다. 금세 비서가 준비해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브라우니를 입에 넣은 뒤에야 비로소 변호사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겨우 그녀의 예리한 신경이 누그러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비서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늘은 특히 피곤해 보이시네요, 변호사 님.”
“말도 마.”
그녀는 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쪽에서 준비를 꽤나 많이 했더라고. 아 참, 지난번에 빌리 오스틴 재판 자료 좀 찾아 놔. 쓸모가 있을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즉시 자리를 떠나려던 그가 멈칫했다. 무슨 일이냐는 듯 시선을 향한 변호사에게 비서는 머뭇거리다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저쪽이 이길 일은 없겠죠? 피해 사례는 명확해 보이던데 말이죠…….”
조심스러운 물음에 변호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서는 황급히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어서 말이죠. 설마 모건 제약회사를 상대로 이길 거라는 생각은 저쪽도 안 할 거 같은데…….”
“밀러야.”
“네?”
변호사의 말에 비서가 멈칫했다. 그녀는 매서운 눈으로 비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이 상대하는 건 모건이 아니라 로펌 밀러라고. 고작 주급 천 달러도 안 되는 인간이 우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인간‘들’이지만요.”
조심스럽게 정정하는 비서에게 변호사는 짜증스러운 듯이 탄식을 뱉어 냈다.
“그래서, 뭉치면 뭐가 달라져?”
비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눈을 떨구었다.
“……아뇨.”
“정신 차려, ‘귀여운’ 윌.”
변호사는 가차없이 비서에게 내뱉었다.
“우린 우리의 일을 할 뿐이야.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싶었으면 밀러에 들어올 게 아니라 인권 변호사 밑에서 일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재빨리 사과했지만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신이 해이해질 것 같으면 외워, 우리의 보스는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라는 걸. 그는 어떤 경우에도 실패는 용납하지 않아.”
“그렇겠죠. 그도 ‘도미니크’ 밀러니까요.”
마지못해 수긍한 비서에게 변호사는 단호히 말을 맺었다.
“잊지 말라고, 우린 제 아버지보다 더한 괴물을 보스로 모시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녀는 보란 듯이 브라우니 조각을 떼어 입에 던져 넣었다. 비서는 어쩔 수 없이 달아나듯 방에서 나와야 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기 전, 또 한 번 밀러 로펌의 승리를 알리는 기사가 매체에 뿌려졌다.
* * *
“역시 졌구먼, 그럴 줄 알았지.”
투덜거리는 사장의 말에 코이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잠시 휴대 전화를 보고 있던 사장은 곧 그것을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시 망치를 들고 일을 시작하려던 사장은 자신을 보는 코이와 눈을 마주치고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그, 신약 부작용으로 소송을 걸었던 사람들 말이야. 역시나 소송에서 졌지 뭔가. 애초에 모건 제약에서 로펌으로 밀러를 선임했다는 기사가 나오자마자 다들 예상했을 걸. 밀러, 그 개자식들. 언젠가 틀림없이 신이 벌을 내리실 거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름에 막 다시 일로 돌아가려던 코이는 멈칫했다.
“……밀러요?”
“그래, 아, 넌 서부에서 왔다고 했지?”
덩달아 얼빠진 표정으로 봤던 다른 직원이 곧 어깨를 으쓱하더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사장이 미리 맞춰 둔 크기대로 합판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돈만 많이 주면 악마도 무죄로 만들어 주는 놈들이라고. 이번 재판만 해도 분명히 그 약 때문에 부작용이 생긴 사람들이 모여서 소송을 건 건데 무슨 되지도 않는 궤변으로 그걸 패소하게 했단 말이야. 그 사람들은 이번 재판에 인생을 걸었다고. 모두 파산했을 텐데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거야? 개새끼들, 천벌 받을 놈들.”
“어…….”
계속해서 이어지는 저주에 코이는 당황해 눈을 깜박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그 부작용이라는 게 사실이 아니었을 확률은…….”
그 말에 곧바로 사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코이, 여긴 미국이야.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나라라고. 거기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밀러 로펌에 상담조차 할 수 없어. 기본으로 수임료가 몇백만 달러라고, 알아? 그러니 그 녀석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겠어? 아니, 절대 못이겨.”
사장은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은 뒤 합판의 모서리를 힘을 주어 꿰어 맞췄다. 한동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코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수도관을 연결하는 데 몰두했다.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아 인테리어와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작은 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은 한 달여 전의 일이었다. 회사라고 하기도 민망한 규모의 소규모 작업장이었지만 사장도 좋은 사람이었고, 함께 일하는 두어 명의 직원들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어마어마한 물가와 집세에 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팍팍했지만 결핍은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각오했던 바였고,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다만 예상과 달랐던 것은 애슐리 밀러의 평판이었다. 그에 관한 얘기는 여러모로 흘러들어 왔지만 결론은 같았다.
법조계의 악마.
모두가 그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저주의 말을 쏟아 내기 일쑤였다. 애슐리 밀러는 증오의 대상이었고, 앞을 다투어 그를 험담하기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대기업을 상대로 한 굵직한 소송에는 꼭 밀러 로펌의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승소를 거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죽하면 이곳 사람들은 밀러 로펌이 상대라면 그냥 포기해 버리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이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애슐리 밀러는 결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아직도 머릿속에는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던 애슐리의 얼굴이 선명했다. 벌써 10여년이 흘렀고 누구든 충분히 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애슐리 밀러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시금 자신에게 되뇌며 주방의 수도 파이프를 연결했다.
진실이 어떤지는 직접 그를 만나고 나서 판단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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