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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137/216)

137화

공항에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코이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동부는 지금까지 살던 서부와 공기부터가 달랐다. 뜨거운 햇살도, 그와 대조적인 서늘하지만 부드러운 바람도 여기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햇살만큼이나 느긋하던 사람들의 미소도 없다.

무표정한 얼굴로 빠르게 옆을 스쳐 가는 사람들의 기세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걸었다. 익숙한 맑은 하늘 대신 깔려 있는 잿빛의 하늘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코이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질주하는 사람들을 피해 열심히 짐을 끌며 발을 옮겼다.

간신히 미리 잡아 둔 모텔에 도착해 짐을 푼 그는 제일 먼저 앞으로 머물 집을 찾았다.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 것도, 부딪치고도 아무 반응 없이 걸어가 버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그저 생소하기만 했다. 그는 마치 다른 차원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몇 시간을 흘려보냈다.

“코이, 어서 와!”

문을 열고 그를 보자마자 반갑게 포옹을 하는 동창의 반응에 코이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그녀를 마주 안았다.

“오랜만이야, 앨. 잘 지냈어?”

“물론이지, 들어와.”

선뜻 몸을 비킨 앨이 그를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입구에서 가져온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네준 코이는 안에서 그를 맞이하는 처음 본 남자의 모습에 멈칫했다.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전 개럿 화이트입니다. 앨의 남자 친구죠.”

“아, 네. 앨의 동창인 코너 나일즈입니다. 코이라고 불러 주세요.”

둘이 가볍게 악수를 나누는 모습을 본 뒤 에리얼이 끼어들었다.

“배고프지? 거의 다 됐어. 우선 술부터 마실래? 와인을 준비해 놨어.”

코이를 거실로 안내한 에리얼은 곧 와인을 글라스에 따라 가지고 왔다. 그들이 나머지 준비를 하는 동안 코이는 와인을 마시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미리 에리얼한테 들은 바에 따르면 개럿은 그녀와 같은 언론사에서 일하는 기자였다. 함께 산 지는 6개월 정도 됐고, 아직까지는 큰 트러블 없이 잘 지내는 듯했다. 함께 식탁을 차리며 가볍게 농담을 나누기도 하고 굳이 말을 나누지 않고도 착착 손발이 맞는 걸 보니 서로에게 무척 익숙해 보이기도 했다.

준비를 끝내고 식탁으로 자리를 옮긴 코이는 가득 차린 음식에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모습을 본 에리얼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지? 머물 집은 잘 찾았어?”

코이는 그녀가 덜어 준 샐러드를 접시에 받아 내려놓고 대답했다.

“아직 알아보는 중이야. 오늘 두 군데 정도 보긴 했는데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찾아봐야지.”

“집세가 만만치 않을 텐데.”

개럿이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각오했던 바라 코이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에리얼이 개럿과 동거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었다. 어마어마한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룸메이트를 구하는 경우도 흔했다. 아마 코이도 그렇게 집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어렴풋이 떠올리고 있었다.

“서부에 있는 쪽이 더 낫지 않아요? 날씨도 좋고.”

개럿의 물음에 에리얼이 대답을 가로챘다.

“한 번쯤 다른 주에 살아보는 것도 좋지 뭐. 나도 여기까지 왔잖아.”

에리얼은 졸업 후 얼마 안 돼 동부로 왔다. 이후 쭉 그곳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던 그녀는 그간 제법 경력을 쌓아 이젠 꽤 알려진 존재가 되었다. 코이가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그녀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부로 오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빠짐없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물론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라 코이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어째서 갑자기?

모두의 의문은 동일했다. 사실 평생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코이가 연고도 없는, 그것도 극과 극인 동부로 가겠다니 누구라도 궁금해할 만하다. 하지만 코이는 그냥 가고 싶어서, 라는 대답만 했을 뿐이다. 본심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에리얼과 빌, 단둘이었다.

비행깃값을 비롯해 동부에서 직업을 구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으는 데는 몇 년이나 걸렸다. 하지만 결국 코이는 해냈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네가 여기에 있다니.”

식사를 끝내고 함께 술을 마시며 거실에 앉아 에리얼이 말을 꺼냈다. 정말 코이가 동부로 올 거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저러다 말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코이와 애슐리가 사귀다 헤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에리얼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빌도 눈앞에서 그런 상황을 겪지 않았다면 코이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셋이 그린벨에 앉아 그간의 일을 말했던 날을 코이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에리얼은 코이의 고백을 믿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빌이 심각한 표정으로 모두 사실임을 보증하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이의 결정에 찬성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고작 애슐리를 만나겠다고 동부로 가겠다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사실 빌과 에리얼은 코이가 제풀에 지쳐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연락조차 닿지 않는 상대, 이미 끝난 관계를 위해 인생을 걸다니.

그러나 코이는 마침내 여기에 왔다. 에리얼은 그에게서 전화를 받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물론이고 마주 앉아 있는 지금도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코이가 정말로 해낼 줄이야.

그날로부터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코이는 밤낮없이 일해 돈을 모아 결국 여기까지 왔다. 에리얼은 문득 감개무량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녀가 서부를 떠나온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곧 그들은 지난 얘기를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휘트니는 어때, 잘 지내?”

에리얼은 반갑게 고등학교 동창이자 그녀의 자매에 대해 물었다. 코이는 선뜻 알고 있는 대로 대답을 해 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결혼을 했던 자매 중 한 명이 벌써 세 번째 아이를 낳았다는 것, 또 누군가는 작은 사업을 시작했는데 꽤 잘나가고 있다는 것, 누군가는 다른 주로 이사 가 전혀 소식을 알지 못한다는 것 등등.

“빌은 이번에 팀을 옮긴대.”

코이의 말에 에리얼은 “그래?” 하고 건성으로 말하며 잔에 담긴 와인을 홀짝거렸다. 빌은 프로가 되어 아이스하키 팀 선수로 뛰고 있었다. 아마 가장 출세한 동창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즐겁게 지난 일들에 대한 추억을 나누는데, 웃으며 가끔 추임새를 넣던 개럿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코이, 당신은 왜 여길 오게 된 거죠? 살던 곳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친구들도 모두 거기에 있잖아요?”

다소 취해 있던 에리얼이 개럿에게 험악한 시선을 던졌다.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고 그에게 주의를 준 것이었지만 코이는 그녀를 말렸다.

“괜찮아, 앨. 당신 말이 맞아요, 개럿. 난 여기 바라는 일이 있어서 온 거예요.”

“……어떤?”

이번엔 에리얼의 눈치를 봤다가 조심스레 물은 개럿에게 앨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만날 사람이 있대. 이제 됐지?”

“아, 그렇군요. ……그럼 여기 굳이 머물 필요는 없지 않아요? 여행으로도 충분할 텐데.”

에리얼이 편하게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려놨던 두 다리를 내려놓고 코이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코이. 이쪽도 기자라 말이 많아. 캐묻는 것도 일상이고.”

“앨, 난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개럿이 항의하는 모습을 본 코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앨. 괜찮아요, 개럿. 저기, 뭐라고 할까…… 만날 사람이 있긴 한데, 쉽게 만날 수는 없어서…… 기회를 찾아보려고 하는 거라…… 그러니까, 기회가 된다면 만나고 싶은…….”

적절히 표현할 말이 없어 횡설수설하며 설명을 이어 가는 그의 모습에 개럿이 두 눈을 반짝이며 제안했다.

“찾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 괜찮아요, 그거 내가 전문이니까 말해 봐요. 당장 내일이라도, 아니 꼭 일주일 내에 찾아내서 만나게…….”

“개럿 화이트.”

결국 에리얼이 미간을 모으고 풀네임을 불렀다. 개럿이 멈칫하자 에리얼이 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어. 찾기 어려운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까 굳이 네가 도와주려 나서지 않아도 돼.”

“……알았어.”

“고마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맺은 에리얼이 다시 코이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 애가 널 만나 줄 거라는 보장은 없어, 알고 있지?”

개럿을 상대할 때와 다르게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한 에리얼에게 코이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나는…….”

그는 머뭇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난 그냥, 한 번 더 그를 보고 싶을 뿐이야.”

기약 없이 이곳에서 살 각오로 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애슐리는 어쩌면 평생 그를 만나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도시에서 살다 보면 언젠가 길을 스치면서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코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였다. 에리얼은 그런 코이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 앤 옛날이랑 많이 달라. 그때처럼 생각했다가는 크게 실망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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