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석 상점의 매니저는 결혼 반지를 구입한 특별한 손님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며 그를 배웅했다. 애슐리는 반지가 든 케이스를 슈트의 안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오늘은 멜라니에게 청혼을 할 것이다. 이미 오가는 말이 있었으니 그녀도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할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애초에 결혼을 전제로 만난 것이니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놀라운 것은 애슐리가 꽤나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결혼해 봤자 지루하고 당연한 매일이 반복될 거라고 여겼던 이전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와 함께라면 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몇 달간 멜라니와 데이트를 하는 동안 그는 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과 편안함에 가벼운 두근거림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애슐리의 그런 기분은 멜라니에게 청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확신으로 굳어지게 했다. 물론 도미니크가 반대할 리는 없어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애슐리가 졸업을 하면 약혼과 동시에 결혼식을 올리자는 제안에도 그는 선선히 수긍했다.
그녀라면 괜찮을 거야.
멜라니 이전에도 몇 명의 사람을 만났지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녀가 유일했다. 멜라니와 만나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어째서 특별한 건지는 알 수 없으면서도 그는 멜라니를 만나러 더욱 속도를 내어 달려갔다.
*
“애슐리.”
멜라니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집으로 온 애슐리를 반갑게 맞이하며 뺨에 홍조를 띠었다. 애슐리는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인사를 건넨 뒤 차의 조수석 문을 열었다. 멜라니 역시 평소보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이 그날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애슐리는 그녀를 태우고 예약해 둔 식당으로 향하며 물었다.
“졸업 준비는 어때요? 잘돼 갑니까?”
멜라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취업이 결정이 되어서요. 당신은 아버지의 로펌에 가게 되겠죠?”
“네, 그렇게 정해져 있죠.”
애슐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신의 나머지 인생과 마찬가지로 모든 건 정해진 대로였다. 멜라니와 결혼하는 것 역시. 그런 속을 전혀 모르는 멜라니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가 정말로 자랑스러워하시겠어요.”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애슐리는 가차 없이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멜라니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네, 아마도.” 하고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다행히 그들은 곧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그녀와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편안하고 즐거웠다. 애슐리는 멜라니와 함께 있을 때면 희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것이 그에게 앞으로도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심어 줬다.
애슐리가 준비해 온 반지를 꺼낸 것은 데이트가 끝나고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때였다. 차에서 내려 그녀의 집 앞에서 마주 선 애슐리는 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어 보였다.
이미 예상했던 일일 텐데도 멜라니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애슐리는 비서에게 지시해 구입해 온 약혼반지를 멜라니에게 내밀며 말했다.
“멜라니,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낭만적인 장소도 전혀 아니었고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틀에 박힌 청혼의 말을 한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라니의 얼굴은 기쁨이 넘쳐 환하게 반짝였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자 애슐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째서 이 여자는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질까.
반지를 꺼내 멜라니의 손가락에 끼워 준 애슐리가 한층 더 깊은 미소를 지었다. 멜라니가 홀린 듯이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애슐리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뺨과 함께 귀를 감쌌다.
멜라니가 머뭇거리며 눈을 감았다. 키스를 기다리는 반응에 애슐리는 당연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애슐리 역시 눈꺼풀을 내렸다.
떨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멜라니는 온몸을 긴장시킨 채 키스를 기다렸다. 그녀의 뺨을 쥔 손에 약하게 힘을 줘 끌어당기며 막 입술을 맞대려던 찰나.
갑자기 그녀가 귀를 움직였다.
그 순간 애슐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감았던 눈을 크게 뜨고 그는 얼어붙고 말았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그때 또다시 움직이는 귀가 손가락 안쪽에서 느껴졌다. 더 이상 부정하지 못한 채 애슐리는 숨을 멈춰 버렸다.
“저……?”
기다리던 멜라니가 조심스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바라보는 표정에 애슐리가 천천히 시선을 향했다. 뺨을 감쌌던 손이 떨어지고 대신 시선이 꽂히는 것을 확인한 멜라니가 당황해 급히 귀를 손으로 쥐었다.
“죄, 죄송해요. 그만 실수를…….”
더듬거리며 사과했으나 애슐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멜라니의 귀만 뚫어져라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껏 듣지 못했던 격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귀를…… 움직입니까? 원래?”
멜라니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 네. 긴장하면…… 가끔 움직이는 버릇이 있어요. 자주 그러는 건 아니고요…….”
그녀는 뭔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슐리에게는 한 마디도 닿지 않았다. 그는 뭔가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해져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애슐리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과거를 기억해 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의 기억, 현관 앞에서 그를 불러 세웠던 멜라니. 다음에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던 그녀의 요청을 애슐리는 왜 허락했을까. 왜 영화를 보자고 말했을까.
그녀와 몇 번을 만나고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때마다 다정한 음성이 절로 흘러나왔던 건, 미소가 지어졌던 건, 마음이 따뜻해졌던 건, 기분이 좋아졌던 건,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건.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는 분명 봤던 것이다. 아주 희미하게 움직이던 그녀의 귀를.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제야 애슐리는 깨달았다. 왜 그녀가 다른 상대와는 달랐는지, 어째서 자신이 그녀에게만은 편안함과 동시에 두근거림을 느꼈는지, 왜 그녀라면 자신이 잘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지.
왜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고 생각했는지.
그러자 더 이상 그는 그곳에 서 있을 수가 없게 됐다.
*
어떻게 차에 올라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차선도, 신호도 전부 무시했다. 그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릴 뿐이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사방에서 클랙슨을 울려 댔지만 무시했다.
어느새 바다가 보였고, 그는 해안 도로를 따라 계속해서 차를 달려갔다. 밤이 되어 어두워진 도로는 불현듯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코이를 태우고 달리던 그날. 그때 우리가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동안 억눌러 참아 왔던 기억은 일시에 해방되어 온통 그의 주변에 넘쳐났다. 낡은 자전거를 타고 애슐리의 저택에 찾아왔던 코이, 쓸모없는 못생긴 인형을 주며 웃던 코이, 싸구려 인스턴트 수프를 열심히 끓여 와 애슐리에게 먹여 주던 그, 치어리딩 스커트를 입고 열심히 아이스링크 위를 달리던 모습, 애슐리의 키스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빨개지던 얼굴,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 달콤한 목소리까지도.
〈내가 가면, 넌 혼자잖아.〉
귓가에서 코이가 속삭였다.
〈같이 있자, 애쉬.〉
“아…… 아아아악!”
급기야 애슐리는 절규하고 말았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어느 것 하나 잊지 않았다.
난 아직도 이렇게 미칠 것 같은데. 왜, 어째서.
넌 날 버렸는데 왜 난 이렇게 널 잊지 못하는 걸까. 왜 난, 왜 넌.
눈물이 넘쳐흘러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흐느낌이 올라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넌 왜 날 버렸을까.
〈넌 가진 게 많잖아.〉
그때 코이의 표정이 눈앞에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는 급기야 브레이크를 밟아 버렸다.
틀렸어, 코이. 내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어.
바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한참을 달려 나갔다.
내겐 너뿐이었는데 이제 내겐 아무도 없다고. 아무도, 아무것도.
너를 잃었으니까.
간신히 멈춰 선 차 안에서 애슐리는 숨을 몰아쉬며 떠올렸다.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겠다고 약속해 놓고, 어째서.
또다시 눈물이 차올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견딜 수가 없어 그는 고개를 젖히고 눈을 손바닥으로 덮어 버렸다. 왜 그때 넌 나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내가 떠나면, 아빠는 혼자야.〉
왜, 왜, 왜.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넘쳐흘렀다.
“아, 아아…… 아아아아…….”
왜 나한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한 거야. 처음부터 왜 그랬어. 왜 날 좋아한다고 했어. 왜 내 곁에 있겠다고 했어. 왜. 왜. 왜.
이렇게 쉽게 버릴 거면서.
〈미안해, 애쉬.〉
거친 흐느낌에 숨결이 도막도막 끊어졌다. 애슐리는 헐떡이며 오열했다.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다시 널 만나면.
애슐리는 이를 악물고 치미는 흐느낌을 억지로 삼키려 애썼다. 그러나 울음은 계속해서 그의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는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네가 날 버렸다는 걸.
저 멀리서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재희
<1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