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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134/216)

134화

코이는 망연히 애슐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제껏과 다르게 절박한 얼굴로 빠르게 덧붙였다.

“학비도 생활비도, 아무것도 필요 없어. 넌 그저 나와 함께 가기만 하면 돼.”

“애쉬.”

“나랑 떠나. 그러면 내가 뭐든 할게. 넌 그냥 나랑 가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돼, 단 한 마디만.”

제발, 애슐리가 속삭였다. 잠겨 들어 숨소리처럼 들려온 음성에 코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순간 그는 흔들렸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어떻게 될까. 가겠다고 하면, 애슐리의 손을 잡으면.

문득 역의 대합실에서 한정 없이 그를 기다리던 애슐리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밝아지던 아침 해를 바라보며 아버지의 병실에 앉아 있던 자신의 모습까지도.

코이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그때까지 자신을 보고 있던 애슐리를 향해 코이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돼.”

애슐리는 그대로 굳어졌다.

“아버지한테는 나밖에 없어.”

코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미안해, 애쉬. 하지만…… 내가 떠나면 아빠는 혼자야.”

애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동안 코이의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하…… 하하.”

탄식에 이어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며 애슐리가 웃었다.

“코이, 그럼 나는?”

그는 여전히 웃으며 물었다. 눈가를 기울이며, 입술을 희미하게 떨면서, 마치 울 것처럼 참혹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나도 혼자야.”

순간 코이는 따라가겠다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 순간 모터홈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코이는 그를 끌어안는 대신 주먹을 움켜쥐어 참고 웅얼거렸다.

“넌…… 가진 게 많잖아. 그러니까…….”

코이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애슐리가 완전히 혼이 나간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기 때문이다.

“하…….”

한숨처럼 어이없는 탄식을 뱉어 낸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너까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구나.”

그 말에 코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체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인 건가. 후회가 밀려왔으나 이미 늦었다. 그를 안고 있던 팔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애슐리는 코이에게서 떨어져 뒤로 물러났다. 한 번 더 코이에게 시선을 향했던 그가 돌아섰다. 그대로 나가려는 애슐리를 코이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애, 애쉬,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줘……!”

뭔가 말해야 한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코이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기, 여길 떠나는 건 아니지? 영영 가는 건…….”

“나는 이제 여기 없을 거야.”

애슐리의 음성은 평온하게 흘러나왔다. 코이는 황급히 덧붙였다.

“내가 가면 되잖아, 널 만나러 갈게.”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방학 때는 만날 수 있어. 만약에 내가 못 가면 네가 놀러 올 수 있잖아, 안 그래? 집도 여기 있고.”

“다시 널 만나지도 않을 거야.”

애슐리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웃긴 게 뭔지 알아? 그녀 말이 맞았다는 거야.”

코이가 멈칫했다. 불길한 예감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그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넌 나를 좋아한 게 아냐, 널 좋아하는 날 사랑했던 거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대로 애슐리는 자리를 떠나려 했다.

“애쉬!”

코이는 겁에 질려 그의 팔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이대로 애슐리를 잃는다고 생각하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그를 붙잡아야 한다. 어떻게든 되돌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잘못했어.”

영원히 애쉬를 잃게 될 거야.

“내가 잘못했어, 애쉬. 부탁이야, 가지 마! 다신 안 그럴게, 다신 그런 말 하지 않을게……. 제발 부탁이야, 가지 마!”

코이는 정신없이 그에게 매달렸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할 수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온 힘을 다해 그를 붙잡는데, 애슐리가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이미 늦었어.”

그 순간 코이는 얼어붙었다. 애슐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더 이상 코이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바라만 보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손을 올렸다. 천천히 뺨을 어루만진 체온은 곧 멀어졌다. 단정하고 긴 손가락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이내 아래로 떨어졌다. 멍한 시야에 비친 애슐리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한층 진해졌다.

“안녕, 코이.”

평소보다 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가 속삭였다. 코이는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애슐리가 돌아섰다.

그를 잡았던 손의 힘이 풀리고, 애슐리는 손쉽게 코이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정면으로 시선을 향한 그가 걸음을 옮겼다. 긴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멀어지는 뒷모습을 코이는 멍하니 보기만 할 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조용히 닫혔다. 코이는 혼자 남았다. 그렇게 그는 떠났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든 어느 날의 일이었다. 아침이 되어 제일 먼저 아버지를 살폈던 코이는 전날까지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던 그의 숨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생명이 모조리 빠져나간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도 코이는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다. 이틀 전부터 의식이 없던 그였기에 죽음은 각오했던 것보다 더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뒤는 미리 알아두었던 절차대로 진행되었다.

장례에 찾아올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나마 아버지가 일을 하러 다닐 때 알고 지내던 몇 명의 동료가 참석할 수 있는 전부였다. 코이의 친구라고 할 만한 빌이나 에리얼은 학기 중이라 기숙사에 있어서 장례식에 참석해 그를 위로해 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했지만 코이는 괜찮다고 말했다.

초라한 장례식을 끝낸 후 집으로 온 코이는 곧바로 아버지가 사용하던 낡은 침대를 버리고 모터홈 실내를 정리했다. 그래 봤자 별건 없었다.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해 봤자 닳아빠진 옷가지 몇 벌과 잡다한 물품이 다였고, 딱히 간직할 만한 물건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리하면서 나온 오래된 가족사진 한 장을 남겨 두고 모든 걸 버렸다. 가족사진은 작은 액자를 사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로 했다. 청소를 마치고 나자 정리는 모두 끝났다.

고작 몇 시간 만에 마무리된 상황에 코이는 허전함마저 느꼈다. 집 안은 너무나 고요했다. 더 이상 병자의 얕은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모터홈 안에서 코이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제 그는 혼자 남았다.

*

“코이, 여기야!”

주말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빌과 에리얼이 그를 불러냈다. 코이는 고등학교 때 자주 그랬듯이 그린벨에서 그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본 그들은 먼저 코이의 안부를 묻고 함께해 주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괜찮아, 정말로. 정리하는 것도 오래 안 걸렸고. 그보다 너희 대학은 어때? 재밌어?”

코이가 화제를 돌리자 빌과 에리얼은 그에 응해 이것저것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코이 또한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대학 얘기에 흠뻑 빠져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밤이 다 되어 가게를 나서는데, 먼저 에리얼을 배웅한 빌이 차에 올라타기 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애쉬네 집 팔려고 내놨나 보더라.”

“어?”

뜻밖의 말에 멈칫한 코이에게 빌이 말을 이었다.

“아니, 우리 엄마가 부동산 중개인이잖아. 매물이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아…….”

코이가 멍하니 탄성을 흘리자 빌이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애쉬는 이제 정말 안 올 건가 봐.”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차에 올라탄 후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코이는 멀어지는 그의 차를 바라보다 자전거를 세워 둔 곳으로 향했다.

선뜻 자전거에 올라탄 그는 능숙하게 페달을 밟았다.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자전거가 향한 곳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는 언덕을 오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낮은 산을 돌아 정상까지 올라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온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온 건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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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거대한 저택의 앞에는 팻말이 하나 꽂혀 있었다. 코이는 자전거에서 내려 잠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자 완전히 불이 꺼진 저택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코이는 자전거를 벽에 기대어 놓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잠겨 있는 문을 확인한 뒤 그는 다시 옆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원으로 향하는 옆문 역시 잠겨 있어 볼 수 있는 건 저택의 정면뿐이었다.

코이는 몇 걸음 떨어져서 저택을 올려다보다 다시 고개를 떨궜다.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코이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산을 내려가는 것은 올라올 때보다 속도가 느렸다. 그저 중력에 맡겨 놓기만 해도 금세 내려갈 만한 능선을 그는 천천히 페달을 밟아 억지로 속도를 늦추며 내려갔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빈 채였다.

정말 이제 없는 거구나…….

어렴풋이 떠올렸을 때, 갑자기 그의 앞에 토끼가 뛰어들었다. 놀란 코이는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으려다 그만 자전거와 함께 구르고 말았다.

“아, 아야야…….”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던 그는 곧 움직임을 멈췄다. 주변은 고요했다. 자신의 숨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올 뿐인 적막 속에서 문득 기억의 파편이 되살아났다.

〈나는 이제 여기 없을 거야.〉

정말이구나.

〈다시 널 만나지도 않을 거야.〉

이제 정말 애쉬는 여기 없는 거구나.

〈넌 나를 좋아한 게 아냐, 널 좋아하는 날 사랑했던 거지.〉

허탈함이 전신을 무겁게 짓눌렀다. 간신히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발을 끌며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그저 멍하기만 했다. 단지 넘어진 충격 때문은 아니었다.

〈안녕, 코이.〉

“……좋아해.”

숨소리처럼 잦아드는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깨달음은 불시에 찾아왔다. 동시에 눈 아래가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널 정말로 좋아했어, 애쉬.

친구가 아니었다. 우정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 나를 좋아해 줘서도, 그때 나를 사랑해 준 게 너뿐이라서도 아니었어.

내게도 그건 사랑이었는데.

하지만 이젠 늦었다.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이름을 부를 수도, 코이를 향해 웃는 얼굴을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고백 또한 할 수 없겠지. 그는 떠났으니까. 그리고 그건 모두 코이의 잘못이었다.

애슐리는 마지막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 애슐리를 상처 주고 떠나보낸 것은 코이 자신이었다.

정말로, 네가 너무나 좋았는데.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와 코이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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