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계절이 빠르게 지나갔다. 아침저녁 공기가 쌀쌀해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해가 지고 신년이 되었다. 동급생들이 하나둘 대학에 붙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입 준비로 모두가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코이만이 묵묵히 병원과 학교를 오갔다. 아버지는 수시로 입원을 했지만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오래전에 파산을 했고, 그들이 극빈자에 가까운 경제 수준인 덕에 의료비가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코이는 늦게까지 아버지의 병실에서 그를 지키다 모터홈으로 돌아와 혼자 잠들었다. 딱히 다정한 대화가 오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예전과는 달랐다.
형이 죽고 어머니가 떠난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을 만큼의 시간이 그들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둘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쓸 데 없는 말을 나누며 남은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코이!”
에리얼이 마침 지나가던 코이를 향해 소리쳤다. 자전거를 타려던 그는 걸음을 멈추고 에리얼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어디 가? 또 병원?”
“응.”
코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아버지가 입원했다는 사실을 친구들은 알았다. 에리얼은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너 정말 대학 안 갈 거야? 원서 하나도 안 넣었다면서.”
그녀와 빌은 주립 대학에 진학하기로 되어 있었다. 코이도 한때는 간절히 원했었지만 결국 꿈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를 두고 대학에 갈 수는 없잖아.”
기숙사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무엇보다 수시로 병원에 가는 아버지를 차에 태워 가는 것은 코이의 몫이었다.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으니까 괜찮아. 일단 커뮤니티 칼리지를 갔다가 4년제 대학에 진학해도 되고…….”
“하아…….”
에리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반응을 코이는 이미 여러 번 확인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코이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그럼 앨, 먼저 갈게.”
“아, 코이.”
자전거를 세워 둔 자리로 향하려던 코이를 다시 불러 세운 에리얼이 물었다.
“혹시 애쉬 소식 들었어?”
“어? ……아니.”
“……그렇구나.”
코이가 고개를 젓자 에리얼은 실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코이는 어색하게 인사를 얼버무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날 이후 애슐리의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그저 동부로 갔다는 말만 건너로 전해 들었을 뿐이다.
코이는 후회가 그의 머릿속을 점령할 틈이 없도록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애슐리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봄이 지나고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의 일이었다.
*
“애쉬가 프롬 파티에 온다고?”
난데없는 소리에 같이 점심을 먹던 아이스하키 팀 녀석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코이 또한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크게 뜬 눈으로 빌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소식을 전한 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어제 간신히 통화가 됐는데, 혹시 해서 그냥 물어봤더니 오겠다는 거야. 뒤풀이 파티에 참석한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지.”
“어, 그럼 빌, 너네 집으로 온다는 거야?”
“그래. 오랜만에 그 자식 얼굴도 좀 보자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빌의 말에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코이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으나 그들과 함께 환성을 지르지는 못했다. 엉거주춤 몸을 웅크리는 코이를 흘긋 본 빌이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대충 즐기고 나면 다들 우리 집으로 와. 알았지?”
그리고 빌은 코이를 보고 덧붙였다.
“너도.”
코이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대답했다.
“응.”
빌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측은해하는 듯한 얼굴에 코이는 고개를 숙이고 샌드위치를 먹는 척했다.
애쉬를 다시 만날 수 있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제대로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벌써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코이는 머릿속이 애슐리로 꽉 차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프롬 파티가 있는 날은 평소보다 더 날씨가 좋았다. 문을 열고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게 뻗은 하늘을 본 코이는 가슴이 두근거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코이, 무슨 일 있니?”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던 아버지가 물었다. 코이는 그를 돌아보고 서둘러 문을 닫았다.
“어, 아뇨. 날씨가 좋아서.”
황급히 몸을 움직이며 아침을 준비하는 아들을 아버지는 잠자코 바라보았다. 최근 아버지는 음식을 먹는 것도 어려워졌다. 이미 위에도 전이된 상태라 당연한 일이었지만 코이는 그에게 뭐라도 먹이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야채수프예요.”
따끈하게 수프를 데워 가져갔던 코이는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고 북받치는 감정을 지워 버린 그가 수프 접시와 스푼을 올려 둔, 금이 간 트레이를 아버지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고맙, 다, 코이.”
감사의 말을 한 아버지가 연이어 기침을 했다. 코이는 잠자코 그의 기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건네주었다. 한 모금의 물도 몇 번을 나누어 마시며 간신히 입을 축인 아버지가 스푼을 들었다. 멀건 수프를 떠서 입에 넣은 그가 미소를 지었다.
“맛있구나.”
가게에서 산 인스턴트 수프의 맛이 썩 좋을 리 없었다. 거기다 매 끼니 수프를 끓여야 하는 처지를 생각하면 질보다는 양, 무엇보다 싼 가격이 중요했다. 이번에도 마트에서 묶음으로 할인하는, 날짜가 다 된 수프를 한 묶음 사 끓인 수프는 아마 팔고 있는 인스턴트 수프 중에서도 아마 가장 최악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항상 미소를 지으며 맛있다고 말했다. 천천히, 힘겹게 한 그릇의 수프를 전부 먹는 것을 기다렸던 코이는 서둘러 트레이를 치우고 아버지의 약을 챙겨 준 뒤 그를 도와 침대에 눕혔다.
설거지까지 마친 후 돌아오자 아버지는 또 선잠에 빠져 있었다. 희미하지만 숨소리가 들려와 코이는 안도하고 의자에 앉았다.
독립을 하기 위해 모아 둔 돈은 거의 다 떨어졌다. 나름대로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병원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제대로 된 수입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이미 대학은 포기했으니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코이는 한숨을 내쉬고 집안일을 시작했다.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하루는 금방 흘러갔다. 아버지에게 저녁 수프를 끓여 준 뒤 진통제와 수면제를 드리고 몇 군데 골라 놓은 일자리를 다시 확인하는데, 갑자기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순간 코이는 놀라 몸이 굳었다. 이 시간에 올 연락이라면 뻔하다. 빌은 프롬 파티에 참가하지 못하는 코이를 배려해 애쉬가 뒤풀이 파티에 나타나면 연락 주기로 약속했었다. 코이는 심호흡을 한 뒤 떨리는 손으로 문자를 확인했다. 예상했던 대로 빌의 메시지였다.
[코이, 애쉬가 왔어.]
코이는 심호흡을 한 뒤 서둘러 휴대 전화를 들고 모터홈을 나섰다. 아버지는 약을 먹었으니 앞으로 3시간은 푹 주무실 것이다.
코이는 조심스레 문을 닫은 뒤 서둘러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미 머릿속은 애슐리로 가득 찼다. 코이는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아 빌의 집으로 향했다.
*
“하아, 하아.”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그야말로 죽을 것 같았다. 코이는 몸을 반으로 접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파티는 이미 한창이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떠드는 소리에 코이는 벌써부터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코이.”
먼저 그를 알아본 빌이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잔뜩 몰려 있는 아이들을 헤치고 애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코이는 반색을 하며 빌에게 다가갔다.
“어서 와, 오느라 힘들었지? 아버지는 괜찮으셔?”
“응, 저녁 약 드셔서 좀 주무실 거야.”
코이의 대답에 빌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빌은 코이가 애슐리와 사귀었다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왜 헤어지게 된 건지, 어째서 애슐리가 동부로 떠나 버린 건지 그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건 둘 사이의 문제였고, 빌이 해 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이런 일 정도니까.
“애쉬는 뒤쪽 정원에 있어.”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말았다.
“고마, 워.”
긴장을 해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서 흘러나왔다. 그를 응원이라도 하듯 빌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후 손을 뗐다. 코이는 억지로 웃어 보인 뒤 빌을 지나쳐 정원으로 향했다.
가득 차 있는 아이들을 헤치고 간신히 저택 밖으로 나오자 풀장 주변에 아이들이 잔뜩 모인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웃고 떠들며 펀치를 마시고 물에 뛰어드는 모습을 본 코이가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허사였다. 애슐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진 코이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문득 2층 베란다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쳤다.
애슐리였다.
먼 곳을 보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코이는 다급하게 발을 옮겨 2층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