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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129/216)

129화

*

커다란 클랙슨 소리가 귀를 때렸다. 간발의 차이로 핸들을 꺾은 애슐리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며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침착해, 침착해.

주문처럼 자신에게 되뇌며 애슐리는 속도를 늦췄다. 하마터면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비명횡사할 뻔하지 않았는가. 코이가 역에 왔다가 그의 시신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속도를 줄여 역에 진입한 그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급히 짐을 챙겼다. 휴대 전화도 버려야 하지만 일단 코이를 만나는 게 먼저였다. 지금 이게 없으면 코이를 만날 때 쉽지 않을 것이다.

일단 역에 들어가 안을 둘러본 그는 제일 먼저 눈에 띈 자리에 가서 앉은 뒤 서둘러 기차표를 검색했다. 오기 전 확인했던 기차의 빈자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일단 두 장을 구입했다.

이제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여밖에 남지 않았다.

혹시나 자신을 잡으러 올지도 모를 아버지의 고용인들에 대한 불안과 애타게 그리워하는 연인과의 재회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는 채로 그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

코이는 사색이 되어 아버지를 마주 보았다. 갑자기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분명히 알아들었는데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아들의 얼굴을 보고 아버지는 참담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할 말을 찾으려는 듯 입을 벌렸으나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코이.”

간신히 말을 꺼낸 그의 음성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코이,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안다. 너한테 몹쓸 짓을 했어. ……하지만 이렇게 떠나지는 말아 다오. 나한테, 한 번만…… 딱 한 번만 기회를 줄 수 없겠니?”

아버지의 말이 점차 빨라졌다. 감정이 격해진 듯 코이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하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부었다.

“앞으로 정말 잘하마. 내가, 내가 뭐든지 할 테니까…… 코이, 제발.”

“노, 놓으세요.”

코이는 두려움에 차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말했다. 애슐리가 기다리고 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코이는 떠날 것이다. 애슐리와 함께. 이제 와서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건 이미 너무나 늦었다.

진작.

코이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진작 그렇게 말해 줬더라면.

“놔, 놔주세요. 전 가야 해요……. 애쉬가 기다려요, 그러니까.”

“코이!”

아버지가 절박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굳어 떨기만 하던 코이에게 용기를 줬다.

“저한테 소리 지르지 마세요!”

코이의 외침에 아버지가 멈칫했다. 코이는 눈물이 그렁그렁 괸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달라지겠다고 말해 놓고서, 보세요, 지금도 이렇게 저한테 소리를 지르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아버지를 믿겠어요?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요?”

평소 억눌러 왔던 모든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코이는 더듬지도 않고 명확한 말투로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기회가 많았는데 아버지는 모두 버렸잖아요.”

아버지는 말문이 막힌 듯 망연해진 얼굴로 코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절망과 회한이 뒤섞이는 것을 코이는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코이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뿌리치고 간신히 구석에서 빠져나왔다.

“코이!”

아버지가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며 그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코이는 빠르게 그의 손에서 벗어나 모터홈의 문을 열었다.

눈앞에 훤히 트인 세상이 펼쳐졌다. 이대로 한 발만 더 내디디면 된다. 이 비참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영원히 떠날 것이다.

애쉬와 함께.

“쿨럭…….”

막 밖으로 빠져나가려던 순간, 뒤에서 갑자기 거친 기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서 코이는 무시하고 그대로 달려 나갔어야 했다. 머뭇거리지도 말고, 뒤를 돌아보지도 말고.

“쿨럭, 쿨럭, 쿨럭…… 커헉!”

그러나 연달아 터지는 섬뜩한 기침 소리에 그는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처참한 광경에 코이는 그만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굳었다.

아버지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몸을 웅크리고서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하지만 기침을 할 때마다 쏟아지는 피는 안간힘을 써 틀어막으려는 그의 손을 무시하고 그대로 바닥에 허무하게 흘러내렸다.

“코, 이.”

아버지가 헐떡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다고 말하려는 듯했으나 이어진 것은 또 다른 객혈이었다. 사색이 되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만 코이의 눈앞에서 하얗게 질린 아버지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코이는 보았다. 붉은 피 웅덩이 위로 그가 볼품없이 쓰러져 버리는 모습을.

“……아빠!”

뒤늦게 코이는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어두운 실내등에 비친 모터홈의 바닥이 온통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

문득 코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애슐리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에는 오가는 사람의 그림자마저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애슐리는 머쓱해진 기분으로 다시 의자에 앉아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기차표의 시간을 한 번 더 들여다본 그는 초조함에 다리를 떨며 사람들이 들어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전화를 걸어 보고 싶었지만 혹시 코이가 자전거를 타고 온다면 어차피 받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전화가 운전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초조해지는 자신을 타이르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시계의 분침이 또다시 옆으로 이동했다.

*

아버지를 실어 나른 구급대원은 곧바로 그를 병원의 응급실로 데려갔다.

함께 구급차에 탔던 코이는 의료진들이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를 침대로 옮기고 이것저것 기계를 연결하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도저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역에 가야 하는데.

애슐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음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데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금 출발해 봤자 이미 늦었겠지? 애쉬가 걱정할 텐데, 전화라도 해 줘야 돼. 아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어서 떠나자. 병원에 왔으니까 아버지는 괜찮을 거야. 어차피 내가 여기 있는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

어서 가야 해.

“저, 네가 빅터 나일즈 씨의 가족이니?”

간신히 발을 떼려던 찰나, 불현듯 누군가 말을 걸었다. 주저하다 뒤를 돌아본 코이의 시야에 간호사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코이의 주변을 살피며 다시 물었다.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없니? 어머니라거나, 형제라거나.”

“없어요.”

코이는 대답했다.

“우리, 는, 둘뿐이에요.”

아버지와 자신을 ‘우리’라고 표현하는 데는 조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억지로 혀를 움직여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간호사는 그렇구나, 하고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당부한 뒤 돌아서서 아버지 옆에 있던 의료진에게로 돌아갔다. 처치를 하며 말을 나누는 것 같은 모습에 코이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뭔가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미성년인 자신이 어떤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코이는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애슐리가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이렇게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다시 정신을 다잡고 자리를 떠나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아버지 주변에 서 있던 의료진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바라봤다. 꼼짝없이 눈을 마주치고 만 코이는 엉거주춤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의사로 보이는 남자는 주저 없이 코이를 향해 걸어오더니 한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나는 제럴드라고 한단다. 이름이 뭐니?”

코이는 망설이다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다 재빨리 놓고 말했다.

“코, 코너 나일즈예요. 코이라고 불러요.”

“그래, 코이. ……빅터 나일즈 씨 아들이지? 가족은 너 하나뿐이고?”

코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대답했다.

“……네, 저뿐이에요.”

제럴드는 한숨을 내쉬더니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턱을 긁적인 의사는 썩 내키지 않아 하는 얼굴로,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코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너무 놀라지 말고 듣거라.”

불길한 서두에 코이는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아무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는 코이에게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암에 걸리셨다는 걸 알고 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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