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216)

126화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당장 안대를 벗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그는 낮게 심호흡을 해야 했다. 이성을 잃어 봤자 본인만 손해다. 도미니크는 결코 냉정함을 잃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런 애슐리를 비웃을 테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으로 그저 입만 꾹 다물고 있는 아들을 향해 도미니크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잠깐 사이를 두고 한층 더 진해진 시가 향기에 애슐리는 그가 연기를 머금었다 뱉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제법 귀여운 짓을 벌였던데.”

느릿하고도 여유 있는 말투로 도미니크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애슐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도미니크는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이성을 잃고 사고를 칠 정도라니, 대체 그 잡종견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군.”

그의 음성에 명백히 냉소가 깃들었다.

“발현도 못 하는 쓰레기를.”

애슐리는 그만 고함을 지를 뻔한 것을 주먹을 틀어쥐고 참았다. 자신이 체포된 이후의 상황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고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다음 기회를 잡기 위해서도.

저 남자가 코이를 모욕한 것은 언젠가 기필코 갚아 주리라 다짐하면서.

아무 반응이 없는 아들을 잠시 지켜보았던 도미니크가 다시 시가를 입으로 가져갔다.

깊이 연기를 마셨다가 내뱉은 그는 힘껏 틀어쥐고 있는 애슐리의 주먹을 흘긋 보았다가 다시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오메가를 빼닮은 듯하면서도 자신의 흔적 또한 고스란히 간직한 역작은 도미니크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아끼는 존재로, 볼 때마다 만족감으로 입가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아끼는 물건일수록 때로는 더 가혹하게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도미니크는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가구를 만들기 위해 거친 사포로 끊임없이 나무 표면을 문지르고 갉아 내듯이.

“이번 일은 용서해 주마. 반성도 많이 했을 테니.”

도미니크가 멋대로 말을 이었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 쉬어라, 내일은 일찍 동부로 돌아갈 테니. 물론 너도 함께야.”

순간 애슐리가 멈칫했다.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그를 보며 도미니크가 덧붙였다.

“네게 어울릴 만한 여자를 몇 골라 놨다. 대학에 다니면서 천천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모두 오메가니 페로몬을 빼는 상대로도 적합할 테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애슐리는 그저 멍하니 듣기만 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설마, 나한테.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간신히 물은 말에 도미니크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파티에서 페로몬을 빼기 싫으면 적당한 상대를 골라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기적으로 페로몬을 뺄 수도 있고 네 결벽증에도 어울려 줄 테니까.”

피식 웃은 그가 얼어붙은 애슐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하자품 때문에 못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애슐리는 당황해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얼어붙어 버린 그를 앞에 두고 도미니크는 여유롭게 기대어 있던 책상의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주니어를 방으로 안내해.”

도미니크의 지시에 비서는 즉시 몸을 움직였다. 애슐리의 팔을 슬쩍 잡아 끌어당기자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애슐리가 멈칫했다.

“전 여기 남겠어요.”

뒤늦게 자신의 의사를 말했지만 도미니크는 그저 피식 웃었을 뿐이었다. 비서 또한 아무 말 없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애슐리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금 거칠게 내뱉었다.

“동부에는 가지 않아. 난 여기 있겠다고, 멋대로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지 말란 말이야!”

“애슐리 밀러 씨.”

비서가 재빨리 그를 제지했다.

“다시 지하실에 갇히는 것보다는 방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나요?”

차분하면서도 명쾌한 지적에 또다시 애슐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의 말이 맞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서 더 난동을 부렸다가는 또다시 암흑 속에 내던져지고 말 것이다. 도미니크는 말 한 마디로 얼마든지 그를 그렇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놔!”

결국 애슐리는 거칠게 비서의 손을 뿌리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비서는 눈치 빠르게 뒤로 물러나더니 역시나 사무적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뒤로 돌아서 오른쪽으로 한 걸음, 그리고 앞으로 열두 걸음 걸으세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키는 대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애슐리의 모습을 보며 도미니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비서는 도미니크를 향해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애슐리를 따라 서재를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자 도미니크는 혼자 남았다. 입 안 가득히 머금었던 시가의 연기가 천천히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한창 반항기인 10대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고민을 자신이 맞닥뜨리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길지 않을 것이다.

애슐리가 자신의 오메가를 닮아 다소 반항적이긴 해도 결국엔 무릎을 꿇게 될 테니까. 그를 낳은 ‘애슐리’와 마찬가지로.

“아아…….”

‘그’를 떠올리자 또다시 배 속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도미니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애슐리’가 여기 있었다면 좋았을걸.”

아쉬움이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연기와 함께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를 향해 저주의 말을 하며 울부짖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인, 너무나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자신의 오메가를 떠올리자 당장 그를 안아 배 속을 휘젓고 싶어졌다.

〈언젠가, 꼭, 네게서 달아나고 말겠어.〉

할 수 있다면 말이지.

큭큭큭,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적막한 서재 안에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애슐리’는 결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들의 아들도.

도미니크 밀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절대 놓치지 않으니까.

*

“……망할!”

혼자 방에 남겨진 애슐리는 거친 욕설과 함께 안대를 벗어 던졌다. 방 안을 밝히는 어슴푸레한 불빛에도 두 눈이 시려 왔으나 그는 눈꺼풀을 닫은 채 빛에 적응되기를 기다렸다.

아직 밖은 어두웠다. 아마 그래서 애슐리를 지하에서 끌고 나왔을 것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서부의 쨍한 햇빛을 그대로 받았다가는 장님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안대의 빈틈으로 조금씩 들어왔던 빛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었는지 두 눈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회복이 됐다. 애슐리는 두 눈을 떴다가 급히 닫기를 여러 번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간신히 시력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하아.”

뒤늦은 한숨에 이어 곧 그는 빠르게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동부에 간다면 다시는 코이를 만날 수 없게 될 것이다.

게다가 결혼이라니.

정신이 번쩍 들다 못해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도미니크가 거기까지 손을 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코이와 애슐리를 갈라놓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건 절대 안 돼.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가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생각해, 생각해야 해.

냉정하게.

지난번과 같은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이번엔 도미니크 밀러의 눈앞에서 달아나야 하는 것이다. 코이와 함께.

……그렇다면.

그는 다시금 방 안을 서성거리다 멈추고 침대에 앉았다가 일어나고 다시 머리를 쥐어뜯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새벽이 다 되었을 때 애슐리는 마침내 생각을 정리했다.

*

비서가 노크를 한 뒤 방문을 열었을 때, 애슐리는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두꺼운 커튼을 친 방 안에는 햇빛이라곤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아 마치 밤처럼 어두웠다.

비서는 짧게 혀를 찬 뒤 걸음을 옮겨 침대로 다가갔다.

“애슐리 밀러 씨, 일어나세요.”

가볍게 어깨를 흔들며 그녀가 말했다.

“벌써 10시가 넘었어요. 식사를 하고 준비를 시작해야죠. 지금 모두가 바쁘다고요. 애슐리 밀러 씨!”

비서는 다시금 재촉했지만 그는 반응이 없었다. 비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바라보는데, 애슐리가 낮은 소리로 신음을 흘렸다.

“……토할 것 같아.”

잔뜩 힘이 풀린 음성에 비서가 멈칫했다. 애슐리는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하고, 약을 좀 가져다줘. 빨리.”

“약이라니…….”

처음으로 비서가 머뭇거렸다. 언제나 명령을 완벽하게, 재빨리 수행하는 그녀였지만 이것만은 쉽지 않았다.

극알파들은 일반인들보다 월등한 면역 체계를 가진 덕에 병에 잘 걸리지 않았고 따라서 약물도 잘 듣지 않는다. 보통의 약물로는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금 당장 극알파들이 먹을 약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못 한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유능한 비서이기 때문이다.

"…….알아보겠습니다."

비서는 딱딱한 어조로 말하고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