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잠시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불과 몇 초에 불과한 공백이었지만 그것은 코이에게 확신을 주고 말았다.
“아, 아냐, 그렇지 않아. 오해야!”
금세 울 것처럼 일그러진 코이의 얼굴에 애슐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말까지 더듬으며 당혹해했던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
“너도 봤잖아. 내가 주사로 페로몬을 빼는 거.”
“매번 그렇게 주사를 맞을 수는 없잖아.”
코이가 지적했다. 여전히 애슐리를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이미 그는 1년 가까이 이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냐, 할 수 있어.”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주사로도 빼는 게 가능해. 단지 섹스 쪽이 더 간편하니까 그쪽으로 빼는 거고, 난 네가 있으니까 주사로 뺀 것뿐이야.”
그는 진실을 말했다. 주사의 부작용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전부를 말한 게 아닐 뿐.
“정말이야, 코이. 날 못 믿는 거야?”
애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딘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얼굴에 코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믿어.”
후, 애슐리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코이가 다시 말했다.
“널 믿어, 내 남자 친구니까.”
“그래.”
이번엔 진심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익숙하고 청량한 미소에 코이는 그러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왜 주사로 빼?”
“뭐?”
다시 돌아온 질문에 애슐리가 흘긋 그를 보았다. 코이는 침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섹스로 빼는 게 더 쉽다고 너도 말했잖아. 그런데 왜 주사로 빼?”
“그거야…….”
애슐리는 최대한 그를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말을 골라야 했다. 하지만 코이는 벌써 답을 알고 있었다. 금세 그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베타인 나는 안 돼?”
순간 당황해 핸들을 꺾을 뻔했다. 애슐리는 힘을 주어 핸들을 고쳐 쥐고 코이를 재빨리 쳐다봤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코이가 계속해서 물었다.
“그런 거야? 나로는 페로몬을 뺄 수 없는 거야?”
“……그건.”
애슐리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코이를 상처 주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 이렇게 돼 버렸다.
당연하지.
애슐리는 생각했다. 코이는 눈치가 없을 뿐 바보가 아니다. 언제고 그는 알게 됐을 것이다. 다만 그 순간이 최대한 늦어지기만 바랐는데 이렇게 바로 탄로 나다니.
애슐리는 무심코 신음을 흘릴 뻔한 것을 가까스로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짧게 숨을 뱉어 낸 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돼.”
코이가 숨까지 멈추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애슐리는 계속해서 그를 외면한 채 빠르게 내뱉었다.
“널 다치게 할 거야.”
그때는 몰랐다. 극알파라는 게 어떤 건지, 자신의 몸인데도.
눈앞에서 난교를 벌이던 그들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몇 번이고, 몇 명을 상대로 밤이 새도록 번갈아 그 짓을 하던 그들이. 자신도 다르지 않다. 페로몬에 취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래도 괜찮았던 건 상대가 오메가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게 베타라면.
분명히 죽고 말 거야.
러트가 끝나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시체를 안고 있는 상상을 하자 심장이 차가워졌다. 그 시체가 코이의 얼굴이라면.
아마 그는 미쳐서 자살하고 말 것이다.
차라리 페로몬에 뇌가 녹아 버리는 쪽이 나았다. 팔이 전부 썩어 들어 가도 상관없었다. 평생 코이를 안지 못해도 괜찮다. 그냥 함께 있을 수만 있으면.
……바라는 건 그것뿐인데.
“애쉬.”
불현듯 코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멈칫한 애슐리에게 코이가 평소보다 낮아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사랑해서 아껴 주려고 하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아끼는 건 바라지 않아.”
그의 목소리는 다소 감정이 섞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흔들리거나 주저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단호한 말투로 코이는 애쉬에게 선언했다.
“네가 괴로우면 나도 슬퍼져. 내가 아버지에게 맞는 걸 보고 네가 화를 냈듯이, 나도 네가 네 몸을 혹사하면 화가 나.”
애슐리는 평소처럼 더듬지 않고 분명한 발음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코이에게 다소 놀랐다.
항상 소심하게 눈치를 보던 코이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그를 흘긋 본 애슐리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는지 코이는 금세 부끄러워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 나도 네 남자 친구니까. 힘이 되어 주고 싶다고.”
……아.
그 말에 애슐리는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지금껏 코이가 너무 작고 연약해 자신만이 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이 역시 어엿한 사내아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건 애슐리만이 아니었다.
그도 이렇게 애슐리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오직 혼자서 버텨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래.”
애슐리의 입가에 느슨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말이 맞아.”
“그렇지?”
코이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목소리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여 다시금 확인을 시켜 주자 코이가 반색을 하며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
“당장은 아냐.”
애슐리가 성급한 그의 제안을 가로막았다. 주사를 맞은 지도 얼마 안 됐고 지금은 페로몬 상태가 나쁘지 않다.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애슐리의 설명을 들은 코이는 금세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애슐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착한 아이에게 상을 주듯이. 하지만 코이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는 슬쩍 머리에 올라온 애슐리의 손을 떼어 내고 말했다.
“콘돔도 유통 기한 있어.”
“알아.”
“정말?”
난 이번에 알았는데…….
주저 없이 돌아온 대답에 의기소침한 것도 잠시, 코이는 다시 힘을 내어 제안했다.
“전부 다 쓰자.”
그의 각오는 단단했다. 결코 물러나지 않을 기세로 코이는 덧붙였다.
“유통 기한 끝나기 전에.”
애슐리가 또다시 웃었다. 편안한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그는 대답했다.
“그래.”
“나한테만 써야 돼.”
코이가 재차 다짐했다.
“그래.”
애슐리 역시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는 손을 내려 코이의 손을 잡았다. 코이가 일부러 손가락을 엇갈려 깍지를 끼자 애슐리도 그의 손을 힘 있게 붙잡았다. 텅 빈 시커먼 도로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가 그들을 갓길에 세운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경찰은 운전석에 앉아 있던 애슐리를 끌어내 보닛에 거칠게 눕힌 후 뒤로 수갑을 채웠다. 코이가 겁에 질려 소리치고 그들을 막으려 했으나 물론 전혀 소용이 없었다.
애슐리의 혐의는 폭행과 납치였다.
*
학교는 발칵 뒤집혀 있었다. 교내의 우상과 마찬가지였던 애슐리 밀러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되다니, 당연히 전교생이 들끓을 만했다. 그것도 코너 나일즈 때문이라니, 모두가 충격에 빠지고도 남았다. 그는 학교에서 어떤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던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왕따였으니까.
에리얼이 준 자전거를 타고 며칠 만에 모습을 드러낸 코이를 보며 사방에서 수군거렸다.
이 모든 상황은 예상하고 있었던 거지만 학교에 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애슐리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코이!”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돌아봤던 그는 저쪽에서 달려오는 빌의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잠자코 자리에 서서 기다린 코이에게 순식간에 가까워진 빌이 멈춰 섰다.
“괜찮아? 저기, 별일은 없고?”
잠깐 머뭇거리다 덧붙인 물음에 코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어렵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내가 물을 말인데. ……넌 괜찮아?”
“어, 응.”
빌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실은 기억이 잘 안 나. 너하고 애쉬하고 같이 있는 걸 봤었는데 그 뒤에 눈을 떠 보니까 병원이더라. 내가 애쉬의 페로몬 때문에 잠깐 정신을 잃었었다며?”
그는 일부러인 듯 평소보다 더 가벼운 말투로 너스레를 떨었다.
“난 페로몬을 맡아 본 적이 없어서 그게 그렇게…… 그런 줄 몰랐지. 이야, 대단하던데.”
표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대명사로만 말을 이어 간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았나 봐? 병원엔 나뿐이더라고.”
“어, 응. ……난 괜찮았어.”
대강 얼버무리자 빌은 그렇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을 넘겼다. 곧 주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평소처럼 팔을 뻗어 코이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야, 진짜 대입 준비하는 거 너무 정신없지? 이거 언제 끝나냐? 어?”
일부러 들으란 듯이 웃기까지 한 빌이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할 얘기가 있어.”
코이는 흠칫 놀랐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빌은 그를 인적이 드문 학교 뒤로 데려가 입을 열었다.
"애쉬가 동부로 떠날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너도 알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