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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2/216)

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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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코이가 인사를 하자 운전사는 곧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나 버렸다. 코이는 인도에 서서 잠시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게 전부 다 사실일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페로몬을 빼야 한다니. 극알파가 일반적인 알파보다 훨씬 더 많은 페로몬을 분비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처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섹스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페로몬을 제때 빼지 않아서 이러는 거야.〉

비서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되살아났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애슐리가 그렇게 불안정한 건 페로몬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인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내가 베타라서.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거친 소리를 내며 숨을 삼켰다. 내가 오메가였다면 간단했을 텐데. 베타니까 그를 받아 주지 못하고 있는 거야.

괜찮다고 했는데도.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고.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함께 밤을 보내게 될 거라고 나름의 각오까지 했었는데.

왜 애쉬는 전혀 날 안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다시 만났을 때 키스도 어려워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때 자신에게 했던 질문도 지금 생각하면 의미심장했다. 왜 다른 사람과 섹스했다면 어떻게 할 거냐는 그런 질문을 했을까. 농담이라고 넘어가긴 했지만 하필 그런 농담을 한 건 이상하다.

어쩌면 페로몬과 관련이 있을 수도…….

두려운 상상을 떠올렸을 때, 그는 집 앞에 다다랐다.

주변은 고요했다. 벌써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이었지만 모터홈의 불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컴컴한 실내를 밖에서 확인한 코이는 무심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안 오셨구나.

다행이다. 그는 황급히 걸음을 옮겨 모터홈의 문을 열었다. 어서 씻고 침대에 누워야 한다. 생각은 그 뒤에 하자. 서두르며 가방을 내려놓고 거의 동시에 손을 뻗어 천장의 전등을 켰다. 부연 불빛이 깜박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뒤 몸을 돌렸던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처럼 숨을 삼키고 말았다. 아버지가 테이블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이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상상도 하지 못한 상황에 도저히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아, 버지.”

간신히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본능적으로 코이는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등골에 오싹 소름이 달려갔을 때, 드디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 시간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그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간간이 끊어져 나왔다. 코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만취했을 때면 언제나 그런 목소리가 나왔다.

술 마셨어.

코이는 하얗게 질려 그대로 굳었다.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서 있기만 하는데,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구한 날 공부한다고, 아르바이트한다고 핑계를 대고……. 줄곧 거짓말을 했지, 안 그래?”

코이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버지가 한 걸음씩 그를 향해 다가왔다.

“감히 날 속이다니.”

“아……버지…….”

코이가 간신히 소리를 내어 그를 불렀다. 어두운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붉었고, 두 눈은 충혈된 채였다. 입가에 침을 흘리며 이를 악문 모습을 보자 코이는 다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가 손을 더듬거리며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코이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고약한 놈, 날 우습게 봐? 내가 그놈이랑 어울려 다니지 말랬지!”

거칠게 고함을 내지른 아버지가 벨트를 한 손에 휘감고 벽을 쳤다. 벨트의 한쪽 끝이 벽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코이는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아, 아니, 아니에, 요.”

겁에 질려 더듬거리며 고개를 저었으나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곧바로 남은 손으로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이 코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 냄새는 뭐야! 온몸에 페로몬을 범벅해 놓고 또 날 속이려 들어? 이 쓰레기 같은 새끼!”

곧이어 아버지가 코이를 밀어뜨렸다. 중심을 잃고 넘어져 버린 코이의 위로 그가 사정없이 벨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은혜도 모르는 새끼, 너 같은 건 진작 갖다 버렸어야 했는데! 죽게 내버려 둘걸,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 넌 태어났을 때 바로 목을 졸라서 죽여 버렸어야 했다고! 아니, 네 엄마가 널 임신했을 때 배 속을 긁어냈어야 했던 건데! 날 버리고 달아난 그년하고 같이 널 칼로 쑤셔서 죽여 버렸어야 했다고!”

코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온몸을 웅크리고 그가 내리치는 벨트에 그저 얻어맞기만 했다. 낡고 가는 가죽 끈이 전신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너무나 화끈거리고 아픈데 도와줄 사람이라곤 없었다. 코이는 구석에 몰린 채 어서 이 상황이 끝나기만 바라야 했다.

그때였다. 바지춤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코이는 다급하게 휴대 전화를 꺼냈다. 누군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도, 도와…… 악!”

말을 하는 도중에 아버지가 사정없이 벨트로 얼굴을 후려쳤다. 빗나가긴 했지만 화끈한 통증이 번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휴대 전화를 놓쳐 버린 코이는 그저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아픔을 참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은 견뎌 냈다.

애슐리는 하얗게 질려 미친 듯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이렇게 속도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코이는 간신히 전화를 받는가 싶더니 불길한 비명 소리를 남기고 금세 사라져 버렸다. 애슐리는 끊어진 휴대 전화에 그만 마음이 다급해졌다.

코이가 전화를 받지 않았을 때부터 불안은 참을 수 없이 계속됐다. 그는 비서에게 잠깐 코이를 만나러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저택을 떠났다. 물론 겉으로는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잠깐 얼굴만 보고 올게.〉

어차피 애슐리의 휴대 전화를 추적하면 그의 행방을 알아내는 건 간단하다. 차라리 떳떳하게 밝히고 가는 쪽이 나았다. 게다가 그녀는 애슐리와 코이를 철없는 10대라며 우습게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거기에 맞춰 줄 수밖에.

역시나 애슐리의 추측대로 비서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를 보내 주었다. 어쩌면 애슐리가 뭔가 하려고 해 봤자 별거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애슐리는 그저 코이가 무사한지만 확인하면 됐다.

저택을 나와 달리는 동안 그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간신히 연결이 되는가 싶더니 절박한 비명 소리만 남기고 다시 끊어졌다. 애슐리는 불안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설마, 코이. 그 남자가 또.

눈앞에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코이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전속력을 내어 도로를 질주하던 그는 항상 코이를 바래다주던 도롯가에 차를 세우고 곧바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모터홈이 있는 곳까지는 제법 거리가 됐다. 자신이 늦지만 않길 바라며 전력질주를 했던 그는 금세 목적지에 다다랐다.

희미한 전등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귀퉁이가 깨진 유리창을 통해 부옇게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곧 비명 소리와 함께 뭔가를 매섭게 내리치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그 울음 섞인 목소리가 코이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애슐리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코이!”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며 그는 곧장 모터홈의 낡은 문을 열어젖혔다. 녹슨 차 문이 힘없이 삐걱거리며 물러나고, 곧바로 좁은 실내가 시야에 펼쳐졌다.

이어서 애슐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엉망이 된 좁은 모터홈 안에 한껏 쭈그린 채 쓰러져 있는 코이와 그런 그를 향해 사정없이 벨트를 내리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곧이어 애슐리는 모터홈으로 달려 들어가 코이의 아버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으, 으으…….”

입가로 가는 신음이 흘렀다. 온몸이 두드려 대는 통증에 코이는 어쩔 수 없이 의식을 되찾았다. 소리를 들은 애슐리가 곧바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코이, 정신이 들어?”

의식은 돌아왔지만 상황을 이해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코이는 간신히 들어 올린 눈꺼풀을 천천히 깜박거렸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차의 라이트만이 비추고 있는 컴컴한 도로였다. 그제야 자신이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선을 내린 그는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코이의 한 손을 커다란 손이 꽉 잡고 있었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를 뻔했으나 입술이 찢어지고 얼굴이 부어 웃음 대신 그만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애쉬.”

간신히 그의 이름을 말하자 애슐리가 전방에서 시선을 떼고 코이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남은 손으로는 코이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모습에 코이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놓였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코이가 기어들어 가는 음성으로 물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을 입에 담자 애슐리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코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멕시코.”

“……응? 왜?”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눈만 깜박이고 있는 고이에게 애슐리가 덧붙였다.

"내가 널 납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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