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
누군가 슬쩍 어깨를 흔드는 감각에 코이는 눈을 떴다. 고개를 들고 아직 졸린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머리 위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내려왔다.
“그만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 말에 코이는 그제야 기억이 되살아났다. 애슐리가 자신을 위로하다 다시 잠이 들었던 일, 잠에 빠져들기 전 코이의 손을 꼭 잡으며 자신이 깰 때까지 가지 말라고 했던 일, 그리고 애슐리의 옆에서 기다리던 코이도 그의 손을 잡은 채 침댓가에 엎드려 잠이 들었던 일까지.
고개를 들자 비서의 서늘한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코이는 반사적으로 잠기운이 싹 가시고 어깨가 움츠러들었으나 곧이어 아직 잡고 있던 애슐리의 손을 깨닫고 겨우 용기를 얻었다.
“애쉬가 깰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목소리는 잔뜩 떨고 있는 데다 작게 기어들어 가서 위엄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누가 들어도 그를 비웃을 것 같은 형편없는 음성에 스스로도 기가 죽어버리고 말았으나 뜻밖에도 비서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냉정하고도 사무적인 음성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벌써 자정이 지났어. 더 늦으면 아버지가 걱정하지 않겠니?”
그 말에 코이는 흠칫 놀라 굳었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지 궁금해졌으나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시간이 좀 더 일렀다면 아버지에게 친구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전화라도 했겠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만약 이대로 아무 말 없이 외박을 한다면 아버지는 정말 엄청나게 화를 낼 것이다.
요즘엔 때리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의 태도가 달라진 지는 좀 되었다. 그 때문에 코이는 약간의 희망을 가졌다. 어쩌면 아버지가 변한 건지도 모른다고.
그럼 더더욱 기분을 거스르면 안 돼.
아직 졸업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거기다 대입 준비까지 해야 한다. 집을 나올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어쨌든 지금 그는 고작 고등학생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남아 있었다.
“그래도, 약속했는데…….”
썩 내키지 않아 하는 시선으로 애슐리를 내려다봤지만 그는 좀처럼 의식을 찾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문득 애슐리가 발현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렇게 줄곧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
지금 애쉬는 어떤 상태인 걸까.
“저, 극알파가 되면…… 이렇게 수시로 정신을 잃나요?”
코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답을 내줄 수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정보를 찾아보려고 해도 쉽지 않았고, 그가 알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발현 후 보라색으로 눈동자 색이 변한다는 것과 일반인들보다 몇 배로 면역력이 강하다는 것, 페로몬을 정기적으로 빼 주지 않는다면 뇌가 녹아 버린다는 사실뿐이었다.
어쩌면 애쉬 역시 아직 잘 모를지도 몰라.
페로몬 조절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어 보려 물어본 코이에게 비서는 무심히 대답했다.
“꼭 그렇진 않아. 애슐리 밀러는 특별한 경우지.”
“어떻게요?”
코이가 서둘러 묻자 그녀는 애슐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페로몬을 제때 빼지 않아서 이러는 거야.”
잠깐 그는 비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애쉬가 왜 제때 페로몬을 안 뺀 건가요?”
극알파가 페로몬을 빼지 않으면 뇌에 이상이 생긴다는 건 코이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애슐리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어리둥절해하며 물은 코이에게 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건 나중에 애슐리 밀러에게 물어보렴. 밑에 차를 준비해 뒀어. 더 늦기 전에 가는 게 좋지 않겠니?”
코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애슐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잡고 있던 손을 꼭 쥐는데, 그걸 본 비서가 입을 열었다.
“가끔은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는 거야. 너희도 이제 어른이 돼야지.”
“약속을 어기는 게 어른이 되는 건가요?”
코이가 물었다. 그런 게 어른이라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비서가 똑바로 그를 응시했다.
“아니, 그걸 이해하는 게 어른이지. 애슐리 밀러가 네 남자 친구라면 당연히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녀의 말에서 허점은 찾을 수 없었다. 코이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다시 애슐리를 내려다봤다.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는 그의 반응에 내심 속상해졌으나 곧 자신을 타일렀다. 애슐리는 지금 몸이 좋지 않다. 이런 거야말로 자신이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여긴 너 말고도 사람이 많아.”
여전히 머뭇거리는 코이에게 비서가 다시 말했다.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우리한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그녀의 말은 너무나 정곡을 찔렀다. 맞는 말이었다.
애슐리가 발현할 때나 아팠을 때는 코이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가 깨어나면 코이가 사 왔던 인스턴트 수프 따위보다 훨씬 좋은 양질의 식사를 할 수 있을 테고 의사나 다른 고용인들이 즉시 그를 위해 몸을 움직일 것이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자신이 굳이 여기 남아 있는 건 오히려 폐가 될 뿐이다.
가차 없는 현실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코이는 한 번 더 애슐리의 손을 꼭 잡았다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대충 내려놨던 가방을 들고 자세를 바로하자 먼저 비서가 돌아섰다. 코이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다가 결국 그녀를 따라 방을 나섰다.
“자, 어서 타렴.”
저택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는 처음 보는 검은 세단이었다. 비서의 지시에 맞춰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코이는 엉거주춤 감사의 말을 한 뒤 차에 올랐다. 곧이어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했다. 코이는 적막 속에 혼자 앉아 품안의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아, 그렇지.
부지를 빠져나가는 차 안에서 그는 뒤늦게 뭔가를 기억해 냈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휴대 전화를 꺼내 인터넷을 켠 그는 재빨리 검색어를 입력했다.
극알파들의 페로몬 빼는 방법
비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검색어를 치자 곧이어 결과가 주르륵 올라왔다.
보통 알파나 오메가들이 페로몬을 어떻게 빼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수업에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그냥 넘긴 데다, 비서의 반응을 보면 극알파의 경우는 뭔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결과가 뜬 화면을 재빨리 훑어 대충 내용을 파악하려 했다. 그리고 몇 개의 연결된 페이지를 열었다 닫은 코이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졌다.
*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정신이 돌아오면서 온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늘어지고 저릿거리기 시작했다.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감각을 느끼며 애슐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는 두 눈을 몇 차례 깜박이자 흐릿한 시야가 조금씩 밝아졌다. 그와 함께 서서히 기억이 돌아왔다.
코이.
제일 먼저 그를 떠올린 애슐리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가 곧 굳었다. 의식을 잃기 전까지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손은 텅 빈 채였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려다 그만 비틀거리며 다시 무너지고 만 그는 잠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웅크려야 했다.
간신히 현기증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애슐리는 고개를 들어 방 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넓은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 외에는.
그에겐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잠들기 전 코이가 했던 말과 약속을 떠올리고 금세 창백해졌을 때,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군요.”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가 평소처럼 무심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그는 먼저 집으로 보냈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요. 아직 학생이니 부모를 걱정시키면 안 되죠.”
“부모를 걱정시켜?”
애슐리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며 빈정거렸다. 직전에 코이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자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그건 불가피한 사고였을 뿐이야.
한데 모든 책임을 아직 어렸던 코이에게 전가하고 모든 비난을 퍼붓다니. 그것이 어른이, 부모가 할 짓인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감수해 왔을 그를 떠올리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더 그를 위로해 줬어야 했는데, 더 많이 안아 줬어야 했는데.
이 증오스러운 페로몬에 이기지 못하고 코이를 다시 그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보냈다고 생각하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내 전화 줘.”
애슐리가 간신히 소리를 냈다. 비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애슐리는 그녀의 앞에서 전화를 거는 경솔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당장 코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충동을 억눌러 참으며 비서가 방에서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애슐리가 맞고 있던 수액을 확인하고 의사를 불러 주사를 뺀 뒤 마지막으로 물었다.
“필요한 건 없나요? 식사는?”
“됐어, 모두 나가.”
참고 참았던 애슐리가 거칠게 내뱉었다. 다행히 그것은 쉽게 이루어졌다. 혼자 남은 뒤에야 비로소 그는 다급하게 휴대 전화의 단축 번호를 눌렀다. 잠시 뒤 신호음이 들리고, 애슐리는 코이의 음성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불과 몇 번 울리지도 않은 채 신호음은 끊어지더니 이내 기계음이 들려왔다.
-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애슐리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