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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0/216)

120화

잠시 동안 애슐리는 반응이 없었다. 코이는 그의 표정이 궁금했으나 꾹 참고 더욱 힘을 줘 애슐리를 끌어안았다.

그날을 입에 담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껏 잊어버리려 안간힘을 썼던 그날의 기억을 억지로 되살리며 코이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자신의 용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부디 이걸로 애슐리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가족들이 모두 함께 타고 있었어…… 내가, 형이랑 장난을 치다가…… 형과 나는 뒷좌석에 안전벨트를 매고 앉아 있었는데…….”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뱉은 뒤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 아마 나는 그때 한창 신이 났거나, 아니면 약이 올랐거나 그랬을 거야. 형의 안전벨트를 잡고 형이랑 둘이 실랑이를 했는데, 내가 형의 안전벨트 버클을 풀어 버린 거야.”

애슐리를 안고 있던 팔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코이는 팔을 풀지 않고 더 힘주어 그를 안았다.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 텐데, 모르겠어. 엄마가 우리한테 주의를 주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때 갑자기 뒤에서 트럭이 우리를…….”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의 기억에 코이는 그만 말을 멈춰 버렸다. 어머니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난 머리를 다쳐서 냄새를 못 맡게 되고, 형은 죽었어.”

떨리는 음성으로 고백한 뒤 눈을 떴다. 깊은 숨을 사이에 두고 코이는 천천히 팔을 풀었다. 애슐리 또한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는 지고 주변엔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이른 달빛에 어스름이 비치는 애쉬의 복잡한 표정에 코이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엄마랑 아빠는 그 뒤에 수시로 싸우다가…… 엄마는 집을 나갔고, 아빠는 지금까지 계속 술을 마셔. 엄마는, 집을 나가면서 나한테…….”

그녀의 말을 자신의 입으로 옮기기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코이는 손가락 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세게 맞잡은 채 성대를 쥐어짜듯 고백했다.

“네가 죽었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차마 애슐리의 표정을 확인 할 용기가 없어 코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바닥만 내려다보며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버지는 그 뒤로 술에 취하면 날 때려.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내 얼굴을 보면 화가 난대. ……형이 있을 때는 안 그랬어. 아빠도 그렇게 마시지 않았고, 우릴 때리지도 않았었는데.”

미안해 형, 미안해, 엄마, 아빠. 미안해.

살아남은 게 나라서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은 산산조각이 난 거야.”

코이는 잦아드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저번에 그 2달러……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그거, 엄마가 준 거였어.”

그는 계속해서 고백했다.

“엄마와 관계있는 건 그것뿐이야. 사진도 아빠가 다 찢고 태워 버려서…….”

하지만 술에 취하면 항상 엄마의 이름을 부르지.

“그래서 나는, 아빠가 날 때려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누군가를 때리는 게 당연한 경우는 없어, 그게 네 아버지라고 해도.”

애슐리가 처음으로 말했다. 주저하며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그게 자

신의 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코이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고마워.”

코끝이 찡해져 그는 급히 코를 훌쩍거렸다. 손을 들어 뺨을 닦아 주려는 애슐리에게 괜찮다고 사양한 뒤 코이가 입을 열었다.

“이 얘길 한 건 너한테가 처음이야.”

애써 웃는 그의 얼굴을 본 애슐리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왜, 지금 나한테 이런 얘길 하는 거야?”

코이가 안쓰러워 당장 끌어안고 싶은 걸 참고 그는 물었다. 

코이의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좀 더 차분한 분위기에서, 둘이 더 많은 교감을 나눈 뒤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갑자기 코이가 자신의 얘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애슐리는 불길한 예감을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그를 끌어안는 대신 코이의 손을 꼭 잡았다. 자신의 커다란 손안에 잠겨드는 코이의 그것은 너무나 작고 볼품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던 코이가 떨리는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 비서가.”

이상하다. 코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왜인지 소리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멀리서 이질적으로 들려왔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의 혀가 움직이는 것을 타인의 그것처럼 관망하며 코이는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건 착각이래.”

그 순간 코이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이 굳었다. 코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내 아버지도 날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날 좋아하는 사람은 너뿐이라서,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래. 사실은 널 좋아하지 않는 거라고, 그렇기 때문에 발현하지 않는 거라고.”

“그 여자가 뭘 알아서?”

애슐리가 참지 못하고 거칠게 내뱉었다. 자신이 의식을 잃은 동안 그런 일이 있었다니,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감히 자기가 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코이에 대해서 대체 뭘 얼마나 안다고.

“널 좋아하는 게 나뿐이라니,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 너도 알잖아. 빌도, 에리얼도, 모두가 널 좋아해. 그러지 않았으면 너와 함께 어울려 다니지 않았을 거라고.”

거기까지 말한 애슐리는 잊지 않고 덧붙였다.

“물론 그중에서 내가 널 제일 좋아하는 건 맞지만.”

“……고마워.”

코이가 고개를 들고 어렵게 웃어 보였다. 또다시 울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자 애슐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즉시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은 애슐리가 속삭였다.

“그런 헛소리는 담아 두지 마. 네 감정은 너만 아는 거야, 그렇지?”

“응.”

“넌 나를 정말 좋아하고, 그렇지?”

“맞아.”

다시금 물은 말에 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텐 너뿐이야.”

“그럼 됐어.”

애슐리가 그렇게 말하며 코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떠들어 대는 말 따위에 상처받지 마.”

“……응.”

코이는 이번에도 대답했으나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정말이야, 애쉬. 난 널 좋아해.”

“알아.”

“널 좋아하지 않아서 발현하지 못하는 게 아냐.”

애슐리의 차분한 음성에도 코이는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도 모르겠어, 내 몸이 왜 이런 건지. 혹시 냄새를 맡지 못해서일까? 그래서 네 페로몬에 둔감한 걸까? 머리가 잘못돼서 그런 건지도 몰라. 어딘가 고장이 난 게 분명해, 맞아, 그런 거야.”

억눌렀던 흐느낌이 올라와 코이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으며 거친 숨결과 함께 털어놓았다.

“내 머리가 잘못된 거지 널 좋아하지 않는 게 아냐.”

“알아.”

애슐리는 치미는 화를 삭이려 애쓰며 최대한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나한테도 그랬어. 네가 발현하지 않는 건 날 좋아하지 않아서, 날 거부하기 때문인 거라고.”

당장 그 여자를 찾아내 코이를 이렇게 상처 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 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코이가 먼저였다. 

의식을 잃기 전 애슐리를 말리며 사색이 되었던 그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코이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대신 다정한 음성을 내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웃기지도 않아. 그런 이유로 발현을 멈출 수 있다면 변이는 대체 뭐겠어?”

농담처럼 덧붙였지만 사실이었다. 하물며 그의 아버지는 페로몬에 내성이 가장 강하다는 ‘감마’까지 변이시켰다. 게다가 그런 경우가 드문 것도 아니다. 하물며 베타가 극알파의 페로몬에 저항한다고? 단지 마음만으로?

그런 개소리를 지껄이다니.

“나, 도.”

코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나도 너처럼, 발현했다면.”

“그건 아냐.”

애슐리는 주저 없이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코이의 말이 맞다. 사고 때문에 뇌 일부가 어떻게 돼서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코이에게는 정말 잘된 일이 아닌가. 이런 거지 같은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니. 수시로 페로몬에 휩쓸리는 자신을 생각하면 다행이었다. 이렇게 괴로운 건 코이는 몰라도 된다. 영원히 코이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차라리 그쪽이 더 낫지 않은가.

나 혼자만으로 충분해.

애슐리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렇게 괴로운 건 나 하나만으로 충분해.

“발현하고 안 하고, 그런 걸로 네 마음을 증명하지 않아도 돼. 괜찮아, 난 알고 있으니까.”

그는 코이의 등을 어루만지며 그의 귓바퀴에 키스했다.

“너도 알잖아, 그렇지? 우리가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잠자코 있던 코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럼 됐어.”

페로몬을 빼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평생 이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는 게 얼마나 암담한지, 혹시나 이 페로몬이 나를 미치게 만들까 봐 얼마나 두려운지 코이는 영원히 몰라도 된다. 애슐리 또한 평생 말하지 않을 것이다.

코이가 가지고 있는 무게도 무거운데 굳이 자신의 무게까지 더하고 싶지 않았다.

말할 수 없어.

애슐리는 다짐했다.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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