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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216)

119화

*

주변은 고요했다. 너무나 조용해서 애슐리가 맞고 있는 수액에서 약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두려워질 만큼 계속되는 침묵에 코이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비서의 말이 맴돌았다.

〈넌 왜 아무렇지 않니?〉

〈넌 여전히 베타야. 전혀 발현할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는다고.〉

〈넌 사실은 애슐리 밀러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니?〉

그렇지 않아.

코이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가득 괴었다. 당신이 뭘 알아, 뭘 안다고.

〈그러니까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는 거야, 정말은 애슐리 밀러를 원하는 게 아니니까.〉

아냐, 아니라고.

〈널 좋아하는 건 애슐리 밀러뿐이잖아.〉

그래서가 아냐, 난 애쉬를 좋아하는데.

정말로 애쉬라서 좋아하는 것뿐인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윽, 흐윽.”

또다시 흘러넘친 눈물에 코이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문질렀다. 참으려 했지만 자꾸만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 내는데, 문득 귓가에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멈칫한 코이가 황급히 다시 눈물을 문질러 닦고 고개를 들자 애슐리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의식이 깨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어깨에 힘을 주고 그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몇 초의 공백이 흐른 뒤 애슐리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가 몇 차례 눈을 깜박여 초점을 맞추는 것을 코이는 숨조차 죽인 채 지켜보았다. 마침내 애슐리가 시선을 옮겨 눈이 마주쳤을 때, 급기야 그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코이.”

잔뜩 쉬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애슐리가 속삭였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를 보자 코이는 그만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고 말았다.

“코이.”

이번에는 좀 더 명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 애슐리가 이어서 미간을 모았다.

“왜 그래? 왜 울고 있어?”

코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서둘러 눈물을 닦았지만 그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넘쳐흘렀다.

“코이…….”

당황하며 손을 들었던 애슐리가 멈칫했다. 자신의 팔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을 확인한 그는 시선을 올려 수액을 발견하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곧 기억이 되살아나고, 상황을 인지했다.

“……빌은, 어떻게 됐어?”

다소 낮은 음성에 코이는 울음을 멈추려 애쓰며 대답했다.

“괜, 찮아. 병원에 갔어. 페로몬을 빼는 주사를 맞았대.”

“……그랬구나.”

이어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코이는 빨개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애슐리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피로하고 지쳐 보였다.

“넌, 괜찮아? 애쉬.”

남은 흐느낌 때문에 자꾸만 끊어지는 물음에 애슐리는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그렇다고 말하고는 싶은데, 별로 안 괜찮아.”

쓴웃음을 지었던 그의 얼굴에서 이내 표정이 사라졌다.

“너는? 괜찮아?”

뒤늦게 물었던 애슐리는 곧 자신이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코이는 발현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빌은 구토를 하며 의식을 잃기까지 했는데.

코이 또한 애슐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다. 그의 표정을 본다면 누구든 알 수 있을 것이다. 둔하기 그지없는 코이조차도 눈치챘을 정도니.

“괜찮아.”

코이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턱에 힘을 줘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난 발현하지 않았어.”

애슐리는 사이를 뒀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이야.”

말을 하고 나서 그는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이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떠올리고 있었지만 마음은 너무나 복잡했다.

어째서 코이는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까.

〈본인이 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애써 묻어 두었던 비서의 음성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줄곧 그를 괴롭히고 불안하게 했던 말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코이는 날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의심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의구심이 들었다.

코이, 넌 왜 발현하지 않는 거야?

설마 그녀의 말이 맞을 리는 없다. 그들은 분명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게다가 코이가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는다고 그의 진심을 의심하다니, 너무나 최악이었다.

코이는 베타인 쪽이 더 행복할 거야.

사실이었다. 애슐리는 이런 식으로 페로몬에 휘둘리면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아마 베타인 코이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이제 너무나 달라졌다.

코이가 오메가였다면 내 괴로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지금도 그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모를 것이다. 그가 베타로 머무는 한은. 그렇게 둘은 점점 더 달라지고,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하지 못하게 되겠지.

코이가 내 이런 꼴을 몇 번이나 참고 넘길 수 있을까.

〈진정으로 누굴 좋아하면 놓아줄 줄도 알아야 어른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어른이 아니라 모르겠지만.〉

“그 여자의 말이 맞아.”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 읊조린 말을 코이는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응? 뭐라고 했어?”

황급히 눈가를 닦으며 묻는 그를 애슐리는 참담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코이가 울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애슐리는 그것을 가장 참을 수 없었다.

“난 너랑 함께 있으면 안 돼.”

뜻밖의 말에 코이의 눈이 점차 커졌다. 아무 말 못 하고 보고 있는 그에게 애슐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정말로 널 위한다면 난 널 보내 줘야 돼. 넌 베타고, 난 알파니까. 넌 발현하지 않았고, 난 했으니까.”

말을 할수록 현실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자신의 입으로 읊조리는 건 고문과 같았다.

“내가 러트에 빠질 때마다 넌 위험해질 거야. 어쩌면 난 다른 오메가의 향에 미쳐서 널 상처 입힐지도 모르지. 이건 절대 아냐, 내가 널 떠나는 게 맞아. 그런데, 그렇지만.”

계속해서 말을 하려던 애슐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코이는 크게 들이켰던 숨을 천천히 내쉬는 그의 커다란 가슴이 느리게 내려앉는 것을 목격했다. 이윽고 떨리는 음성으로 애슐리가 속삭였다.

“하지만 안 돼, 그럴 수 없어.”

“애쉬.”

“너랑 헤어질 수 없어.”

그녀의 말이 맞는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도, 이제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만약에 코이가 없다면,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난 견딜 수 있을까.

“코이, 날 버리지 마.”

급기야 그는 코이의 팔을 붙잡고 절박하게 매달렸다.

“날 버리지 말아 줘, 코이.”

어째서 넌 발현하지 않았을까. 아니, 왜 난 발현해 버린 걸까.

우리 둘 다 베타였다면, 그랬다면.

이런 괴로운 일은 없었을 텐데.

“애쉬.”

코이가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애슐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공포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쳐 버릴지도 몰라.

이 페로몬이 날 집어삼킬지도 몰라.

“무서워.”

애슐리가 온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크게 뜬 두 눈에 보라색 눈동자가 격하게 뒤흔들렸다.

어쩌면 난 벌써 미친 게 아닐까.

이미 뇌는 녹아내리고 정신이 나가 버렸는데 깨닫지 못한 거라면? 이게 다 환상이고 망상일 뿐이라면?

내가 미쳐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그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무서워…….”

“애쉬.”

코이는 창백한 얼굴로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몸에 손을 대자 애슐리 역시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코이는 용기를 내어 애슐리에게로 몸을 숙였다. 자신을 꼭 끌어안는 코이의 체온에 애슐리는 다급하게 그를 마주 안았다.

한동안 둘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그렇게 멈춰 있었다. 애슐리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으나 그를 안은 팔은 그대로였다.

코이는 어떻게든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으나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어떤 말을 해도 애슐리에게는 와닿지가 않을 것이다. 코이가 무슨 말을 하건 그는 납득하지 못할 테니까.

괜찮을 거라는 말도, 난 변함없이 네 곁에 있을 거라는 말도, 너의 괴로움을 이해한다는 말도,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모두 다 헛소리일 뿐이다. 어떤 것도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어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하면 애슐리가 안심할 수 있을까.

〈넌 사실은 애슐리 밀러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니?〉

그렇지 않아.

다시금 귓가에 울려 퍼진 비서의 음성에 코이는 애슐리를 꼭 끌어안았다. 어떻게든 증명해 보일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내가 줬던 2달러, 아직 가지고 있어?”

코이가 한참 만에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잠시 반응이 없던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던 코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냄새를 못 맡게 된 거냐면.”

애슐리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코이는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다음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다소 흔들리고 있었다.

“어릴 때 사고가 났었거든. ……자동차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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