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216)

116화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코이의 얼굴을 보고 애슐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생각해 봐. 물론 네가 생각하고 있는 다른 진로가 있다면 존중할게. 하지만 내가 말한 방향도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덧붙였다.

“난 졸업하고 난 뒤엔 너랑 함께 살고 싶으니까.”

코이는 머뭇거리다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게.”

“그래.”

애슐리는 싱긋 웃고 말을 돌렸다.

“수업에 늦겠어, 어서 가자.”

“응.”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한 코이는 서둘러 그의 보폭에 맞춰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

동부라니.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도 코이는 줄곧 같은 생각을 했다. 

평생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 애슐리를 좋아하게 된 후에도 막연히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될 거라는 상상이 다였고, 그를 따라간다는 건 생각도 못 해 본 일이었는데.

애쉬는 언제부터 그런 고민을 한 걸까?

자신은 그저 동거를 떠올렸을 때 애슐리는 결혼까지 말한 걸 보면 처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코이는 다시 반대쪽으로 누우며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애쉬와 함께할 방법은 그것뿐일까……?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자 어쩐지 멍해졌다. 낡고 좁아터진 모터홈이 좋아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저 평생 산 곳을 떠나 낯선 장소로 간다는 것이 두렵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책임질게.〉

애슐리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그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애슐리는 동부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으니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아마 코이의 이런 두려움을 그는 이해하기 어려워할지도 모른다.

애쉬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문득 코이는 떠올렸다. 애슐리가 처음 여기 왔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텐데, 낯선 장소에 혼자 와 머문다는 건 어떤 기분인 걸까.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 있었던 걸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모터홈의 문이 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코이는 화들짝 놀라 눈을 감고 자는 체를 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이어졌다. 코이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귀만 바짝 곤두세웠다.

아버지는 최근 술이 줄었다. 대신 늦게까지 불을 켠 채 의자에 앉아 골똘히 뭔가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오늘도 역시 어두운 전등을 켜고 볼품없는 식탁 의자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는 그의 행동에 코이는 내심 바짝 긴장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본 지가 오래 됐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술을 마시건 안 마시건 그는 코이를 보면 기분이 나빠질 테고, 분명 결과는 좋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코이는 눈을 꼭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아버지의 한숨만큼 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안녕.”

“안녕.”

언제나처럼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애슐리에게 달려간 코이는 고개를 들고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를 끌어안고 키스한 뒤 애슐리는 마주 인사했다. 차를 타고 학교로 가는 동안 둘은 일상적인 얘기를 나눴다. 전날 애슐리가 했던 제안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둘은 시치미를 떼고 있었으나 사실 머릿속으로는 같은 생각을 했다.

코이가 언제 대답을 해 줄까.

언제쯤 대답해야 할까.

평생 살아온 곳을 떠난다는 게 쉬운 결심이 아니라는 건 애슐리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그만큼의 이유가 있었고, 조건이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코이는 익숙한 모든 걸 버리고 오직 애슐리만을 믿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그래도 애슐리는 코이가 결국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믿었다. 그들이 헤어지지 않을 방법은 그것뿐이었고, 코이 역시 같은 마음일 거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서두르지 않고 코이의 대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안녕, 애쉬! 코이!”

차에서 내리자 먼저 그를 발견한 아이스하키 팀 녀석이 알은체를 했다. 먼저 애슐리에게 인사한 상대는 뒤이어 코이에게도 인사한 뒤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빌이 합류하고, 또 다른 녀석이 끼어들어 어느새 평소와 같은 무리가 만들어졌다.

걸으면서도 애슐리는 코이의 어깨를 안고 있었다. 녀석들은 그것을 눈치챘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코이 또한 의식하지 못한 채 그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평소와 같이 빠르게 오전 시간이 지나가고,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에 모이자마자 한 녀석이 운을 뗐다.

“대학 팸플릿 온 거 있었어?”

녀석의 물음에 다른 녀석이 대답했다.

“몇 개 오긴 왔더라. 또 오겠지.”

“점수 모자란 건 없었어? 내 컨설턴트는 봉사 점수 더 채우는 게 좋겠다고 그러더라.”

“그런 건 진작 했어야지.”

“넉넉한 줄 알았다고.”

오고 가는 말들을 들으며 코이는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대입 컨설팅이라는 건 그로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혼자 학교를 찾아보고 일일이 발품을 팔아 지원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먼저, 빨리 움직여야 했다.

“조기 지원을 했어야 했는데.”

“상황이 안됐잖아. 신중한 쪽이 좋기도 하고.”

“애쉬 너는 왜 안 했어? 조기 지원 할 조건이 다 됐을 텐데? 컨설턴트가 얘기 안 해? 컨설팅은 받았지?”

코이 역시 궁금했다. 동부에서 대학을 둘러봤다고 하니까 분명히 그런 쪽으로도 뭔가 하지 않았을까? 아버지와 같은 대학에 간다고 했으니 진로는 결정이 됐을 거고, 벌써 그쪽에 지원을 했을까?

잠자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코이의 한쪽 옆에 앉아 있던 빌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들어 빠진 양상추 한 장이 햄버거 패티에 들러붙어 있었다. 거구의 사내아이가 고기 한가운데 달라붙은 작은 잎사귀를 어떻게든 떼어 내려 애쓰는 모습을 보자 코이는 그만 “풉.”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음소리에 애슐리가 고개를 돌렸다. 빌 또한 의아해하며 시선을 향하고, 코이는 양쪽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무안해져 얼굴을 붉히고 입을 열었다.

“아니, 저기, 뭐가 묻어서.”

“내 얼굴에?”

빌의 물음에 코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한쪽 입가를 가리켰다. 그것을 본 빌이 햄버거를 한 손에 들고 남은 손으로 입가를 닦아 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실수였다. 방금 전까지 양상추를 떼어 내려고 애쓰던 손에 남아 있던 버거 소스가 더욱 많이 입가에 남아 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녀석들이 뒤집어져라 웃어 대기 시작했다.

“야, 너 뭐 하냐?”

“멍청아, 이 바보야!”

박수를 쳐 대며 웃는 녀석들에 섞여 함께 웃었던 애슐리는 곧 다른 화제를 꺼내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환하게 웃으며 빌을 바라보는 코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잠깐, 찰나에 불과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애슐리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적중했다. 코이가 손을 들어 빌의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던 것이다.

“이제 됐어.”

코이가 말하며 다시금 웃었다. 빌 역시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코이. 역시 넌 천사야.”

그 뒤로 빌은 “저 고릴라 녀석들은 하여간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니까…….”라며 뭔가 말을 이어 갔으나 애슐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애쉬?”

코이가 그의 쪽을 보았다가 의아해하며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애슐리는 반응이 없었다. 그대로 굳은 채 말이 없는 애슐리를 보고 코이는 잠시 당황했다.

“애쉬, 왜 그래?”

내심 불안해하며 이름을 부르자 갑자기 그가 코이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코이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애슐리가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던 것이다.

“저기…….”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것은 코이만이 아니었다. 

다른 녀석들도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애슐리가 코이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와 봐.”

“어, 어?”

코이는 얼떨결에 일어나 그를 뒤따라갔다. 남아있는 녀석들은 애슐리에게 끌려가는 코이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야, 어떻게 된 거냐?”

한 녀석이 물은 말에 빌이 마찬가지로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몰라, 나도.”

그는 얼떨떨해하며 중얼거렸다.

“그냥 얼굴에 묻은 걸 닦아 준 것뿐인데…….”

“애쉬는 코이를 좋아하잖아.”

"그래도 고작 그거 가지고 저렇게 화를 내?"

"애쉬는 쿨하잖아, 그런 녀석이 아니라고."

모두는 당혹해하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대체 무슨일이 일어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