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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14/216)

114화

때때로 웃기도 하고 두서없이 말을 나누며 둘은 한동안 함께 걸어갔다. 

금세 도로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아무렇게나 자란 풀과 나무들이 점차 많아졌다. 주변에는 사람은커녕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고요하고 적막한, 마치 버려진 듯한 땅 위를 얼마간 걸어갔을 때, 마침내 코이가 걸음을 멈췄다.

스산한 바람이 한 차례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애슐리는 코이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모터홈을 바라보았다. 

코이는 차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못한 채 바짝 마른 입 안을 열심히 움직여 억지로 침을 쥐어짜 목구멍을 적시려 애썼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가벼운 말투를 꾸며 내 코이는 입을 열었다.

“집이 좀 작지?”

자신의 목소리가 혹시나 떨리고 있을까 봐 불안했다. 애슐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진 용기를 전부 끌어모아 코이는 고개를 들었다. 애슐리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손을 꽉 쥐고 그를 올려다보자 그때까지 아무 말 없던 애슐리가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해가 지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달이 환하게 그들을 비춰 주었다. 밝은 달빛이 비치는 애슐리의 얼굴을 코이는 너무나 뚜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코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 똑같이.

“그럼 오늘은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어…… 어.”

뜻밖에도 평범한 반응에 코이는 얼빠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애슐리는 어깨에 메고 있던 자전거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코이와 마주 섰다.

“헤어지기 싫다.”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 그에게 코이도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나, 나도.”

애슐리가 다시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숙였다. 코이는 생각할 틈도 없이 턱을 치켜올리고 눈을 감았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은 애슐리의 팔이 그를 끌어당기고, 둘은 서로를 꼭 안은 채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게 입 안을 어루만지는 혀의 능숙함에 코이는 허리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최대한 그의 움직임을 따라 해 보려고 애쓰자 맞닿은 애슐리의 입술이 미소를 짓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서툶에 부끄러워져 뒤로 물러나려고 하는데, 애슐리가 그런 그를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괜찮아, 코이. 아주 잘했어.”

장난스레 코이의 코끝에 키스한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전혀 자신을 놀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코이가 뺨을 붉게 물들이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본 애슐리는 다시 코이의 입술에 짧게 키스를 한 뒤 그를 놓아주었다.

“어서 들어가, 코이. 페로몬을 씻어 내야지.”

“아, 응.”

분명 몸 곳곳에 애슐리의 페로몬이 잔뜩 묻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씻고 옷을 빨아야 한다는 생각에 코이는 아쉬움을 참고 먼저 몸을 돌렸다.

“그럼, 내일 봐.”

“그래. 데리러 올게.”

코이의 인사에 애슐리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황급히 자전거를 모터홈에 기대어 놓고 문을 여는 코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문을 닫기 전에 코이는 먼저 애슐리를 돌아보았다. 애슐리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남은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코이는 그 자리에 선 채 잠시 머뭇거리며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헤어지기 싫어.

애슐리의 마음 또한 같았기 때문에 뻔히 속이 들여다보였으나 계속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들어가.”

애슐리가 다시 말하자 그제야 코이는 어쩔 수 없이 마주 손을 흔든 뒤 모터홈의 문을 닫았다.

……하아.

혼자가 된 코이는 그동안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뱉어 낸 뒤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애슐리가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기 때문에 그동안 감추고 숨겼던 자신이 오히려 우스워졌다.

애쉬는 그럴 애가 아닌데.

멋대로 그가 실망하거나 코이를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실례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애슐리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곧 아버지가 올 테고, 그전에 씻고 빨래까지 끝내야 한다. 서둘러 전등을 켠 코이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좁은 샤워실로 들어가 몸을 씻으며, 어서 내일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애슐리를 또 볼 수 있도록.

*

애슐리는 문이 닫히고 난 뒤에도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모터홈을 지켜보았다. 잠시 뒤 실내등이 켜지고 어둑한 불빛이 한쪽 구석이 깨어진 창문을 통해 흘러나왔다. 창틀에 나란히 놓여 있는 종이컵의 그림자를 보고 애슐리는 코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게 그 민들레구나.

코이가 조심조심 종이컵에 물을 주는 상상을 하자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의 아버지가 돌아와 애슐리와 마주치면 크게 낭패를 볼 것이다. 코이를 곤란하게 하기 전에 먼저 자리를 떠나며 애슐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코이가 저런 곳에서 살고 있었다니.

코이의 말이 맞았다. 그것은 정말로 애슐리가 했던 최악의 상상을 우습게 만들었다. 저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코이가 한사코 애슐리에게 감추려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상하진 않았겠지.

혹시나 코이에게 자신의 동요를 들키진 않았을까 아직도 불안했다. 코이의 반응을 떠올려 보면 그럭저럭 잘 넘긴 것 같았다. 사실 그는 그 자리에서 코이를 낚아채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상당히 힘들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 수 있는 거냐고, 네 방은 있느냐고, 이렇게 작고 낡아빠진 모터홈이 어떻게 집이 될 수가 있는 거냐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그는 간신히 참았다. 부끄러워 한사코 숨기려던 코이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일부를 드러냈다. 거기서 애슐리가 유난을 떨며 그런 반응을 보였다면 분명 그는 상처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본심으로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코이가 그렇게 궁핍한 환경 속에서 초라하게 살고 있다니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타고 다니는 차 한 대보다도 못한 낡아빠진 모터홈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코이에게는 너무나 미안했지만 홈리스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건 그냥 적당히 가지고 놀다 버렸어야지.〉

도미니크 밀러의 냉담한 음성이 귓가를 스쳐 갔다. 그가 어째서 그토록 코이를 경멸했는지 애슐리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코이의 이런 환경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발현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서가 코이의 아버지를 만났을 테고, 이 모든 것들을 빠짐없이 보고했겠지.

그래서 그렇게 코이를 경멸하고 모욕한 거야.

〈잡종이랑 교미하라고 널 낳은 게 아냐.〉

애슐리는 입술을 깨물고 화를 삭였다. 돈과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고작 그런 걸로 코이를 쓰레기 취급하다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은 이토록 무력한 자신이었다.

〈10대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죠.〉

비서가 자신을 철없는 10대라며 비웃었던 건 틀리지 않았다. 지금도 봐라.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힘으로 산 차에 올라탄 애슐리는 끓어오르는 한숨을 천천히 나누어 뱉었다.

동부에서 제작했던 반지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 물건을 주문한 뒤 취향에 맞게 커스텀을 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1년은 물론이고 길게는 몇 년씩 기다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애슐리는 졸업 때까지만 맞출 수 있게 해 달라고 당부하고 왔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결혼반지만큼은 절대 그 남자의 힘을 빌리지 않겠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최대한 자신의 힘으로 반지를 맞추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길이다. 코이를 ‘잡종견’이라고 부른 남자의 돈으로 산 반지를 선물할 수는 없다. 절대로.

반지를 받으면 코이는 어떤 얼굴을 할까.

떠올리자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심코 느슨한 미소를 지었던 애슐리의 안에서 조금씩 자신감이 살아났다.

돌아갈 수 있어.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는 다짐했다.

다시 예전처럼 될 수 있어.

꼭 그렇게 만들 거야.

*

“야, 애슐리 밀러, 이 자식!”

코이와 함께 등교한 애슐리를 보자마자 같은 아이스하키 팀이었던 녀석들은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서 달려온 거구의 사내 녀석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통에 애슐리는 그때마다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코이는 그런 그들을 흐뭇한 미소와 함께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도 없이!”

“동부가 그렇게 좋았냐? 이 망할 자식아!”

“네가 없어서 우리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이 자식, 이 자식!”

머리를 마구 문지르고 등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기까지 하며 아우성을 치는 녀석들에게 애슐리는 그저 웃으며 얼버무릴 뿐이었다. 하지만 정신없는 가운데에서도 이런 번잡함이 그를 안심하게 했다. 

이렇게 있다 보면 동부에서 있었던 거지같은 기억들은 전부 다 사라질 것 같았다. 앞으로의 두려움 또한 마찬가지로.

“감독한테 항의를 하려고 해도 네가 있어야지.”

빌의 푸념에 다른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어영부영 시즌이 끝나 버렸다고.”

“어떻게 이렇게 오래 안 나타나냐? 정말 무슨 일이 생겼는 줄 알았어.”

친구들의 표정엔 호기심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애슐리는 더 이상 감추지 않기로 하고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생기긴 했어, 경기에 뛰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고.”

삽시간에 녀석들이 조용해졌다. 잔뜩 긴장해서 기다리는 얼굴을 한 차례 둘러본 애슐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얘기하지 않아서 미안해. 난 발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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