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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113/216)

113화

갑작스러운 상황에 코이는 일순 당황했으나 곧 차는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코이는 그제야 아, 하고 안도했다. 운전하느라 그런 거구나. 애슐리의 손에서도 금세 힘이 풀리고, 곧 그는 평온하게 말을 받았다.

“그럭저럭.”

“그렇구나.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겠다.”

애슐리는 잠시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가 도로 양쪽을 번갈아 살피는 것을 보고 코이는 그저 신호를 신경 쓰느라 그러는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일부러 텅 빈 도로만 이리저리 훑어본 애슐리가 다시 정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발현한 걸 아버지가 알아서 검사도 할 겸 부른 거야. 나도 그게 필요했고. ……간 김에 대학도 몇 군데 돌아다니고 그러다 왔지 뭐.”

“대학?”

지금껏 몽롱하게 젖어 있던 머릿속이 일순 깨어났다. 코이는 기분 좋은 꿈을 꾸다 갑자기 발목을 잡혀 억지로 현실로 돌아와 버린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동부로 대학 간다고 했었지…….”

코이는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떠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남은 기간이 터무니없이 짧게 느껴졌다. 잠시 멍해져 버린 코이에게 애슐리가 물었다.

“코이, 다시 대학 시험을 친다고 했던 건 어떻게 됐어?”

“어? 어…….”

코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을 더듬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본 애슐리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다음에 또 보면 되지. 아직 시간은 있어. 신청은 했겠지? 못 했으면 나랑 같이하자. 이번엔 시험장까지 바래다줄게. 끝나고 데이트하면 되겠다, 그렇지?”

“어, 응.”

코이는 머뭇거리다 저기, 하고 말문을 열었다.

“실은…… 괜찮게 봤어. 그래서 다시 안 봐도 돼.”

“정말? 얼마나?”

코이는 부끄러워져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아.”

“뭐라고?”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코이는 용기를 끌어모아 창피함을 무릅쓰고 모기 같은 소리로 속닥거렸다.

“너랑, 같다고. 점수.”

“……아.”

그제야 애슐리가 환한 웃음을 짓더니 코이의 손을 잡고 있던 제 손을 풀고 대신 그의 어깨를 안아 끌어당겼다.

“잘했어, 코이. 정말 잘했어!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내 남자 친구라니까!”

유쾌하게 퍼지는 웃음소리에 코이의 마음 역시 환하게 밝아졌다. 변함없는 웃음소리를 듣자 그제야 정말로 그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덩달아 애슐리의 목을 끌어당겼던 코이가 용기를 내어 그에게 키스했다. 그래 봤자 쪽, 소리가 나는 베이비 키스였지만. 그러자 애슐리가 미소를 짓더니 그의 뒤통수를 잡고 다시 입술에 키스했다.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숨을 삼키고 눈을 감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끝이 마구 저려 왔다. 입 안으로 들어온 호흡과 두꺼운 혀가 온통 그의 정신을 빼앗아 가 버렸다.

애쉬.

그의 이름을 말하고 싶었지만 입 속을 핥은 혀가 곧바로 달싹이는 그의 혀를 문질러 버려 소리를 내지 못했다. 코이는 떨리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애슐리의 목만 꼭 끌어안았다. 

코이의 혀를 감아 자신의 쪽으로 당겼던 혀가 다시 입 안으로 들어왔다. 둘은 완전히 키스에 몰두해 버렸다. 서로의 체온과 열기에 푹 빠져 다른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

입술이 떨어지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막혔던 숨을 뱉어 내고 말았다. 애슐리 역시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숨만 내쉬는데, 애슐리가 먼저 쓴웃음을 지었다.

“차 안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응.”

코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를 올려다봤다.

“……보고 싶었어, 애쉬.”

진심을 담아 말하자 애슐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도.”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한 애슐리가 속삭였다.

“나도 그랬어.”

말을 마친 그가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맞닿기도 전에 코이는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감촉과 따뜻한 온기가 재차 이것이 현실이라고 일깨워 줬다.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그래, 코이?”

문득 흐느끼듯 흘러나온 숨소리에 애슐리가 입술을 떼고 물었다. 코이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다시 만나고서 처음으로 키스했어.”

애슐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뭔가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멍해진 그의 얼굴에 코이가 한 번 더 강조했다.

“다시 만난 다음에 처음.”

“……그렇구나.”

애슐리가 사이를 뒀다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코이는 기쁘게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혀가 부드럽게 맞닿을 때마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말이야.

또다시 벅차오른 심장이 쿵쿵대며 가슴을 두드려 댔다.

정말 애쉬가 돌아왔어.

간신히 키스를 멈췄을 때는 벌써 몇 번이나 신호등이 바뀐 뒤였다. 뒤에 서있던 차가 차선을 바꿔 옆 차선으로 달려가는 것을 본 애슐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차를 출발시킨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한 손은 코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가락마다 깍지 낀 채 꽉 쥔 손을 코이 역시 힘을 줘 꼭 맞잡았다. 분위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달라져 있었다. 코이는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넌 어느 학교에 갈 거야? 아버지와 같은 학교?”

예전 기억을 더듬어 애슐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묻자 애슐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어서 들은 애슐리의 목표 대학은 코이가 예상했던 바로 그 학교였다.

“변호사가 될 거라길래 거기가 아닐까 생각했었어.”

그 말에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을 더듬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그런 얘기를 했었던가?”

“했어, 처음 과제하러 둘이 만났을 때.”

왠지 뿌듯해져 코이는 가슴을 펴고 말했다.

“넌 기억 못 하는 거 같지만 난 전부 다 하고 있다고.”

그 말에 애슐리의 눈이 감탄하듯 커지고, 코이는 자신감에 차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걸 본 애슐리가 경계하듯 물었다.

“너 정말 내 스토커였던 거 아냐?”

“아냐, 아니라니까!”

운전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팔이든 어디든 한 대 아프지 않게 때려 줬을 텐데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코이는 빨개진 얼굴로 입을 내밀었다.

“기억력이 좋은 거라고.”

“알아, 알아.”

애슐리가 이번에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에 코이는 또다시 부끄러워져 볼을 부풀렸다. 애슐리는 잡고 있던 코이의 손을 들어 손등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한 뒤 물었다.

“넌? 어디로 가고 싶은데?”

곧바로 돌아온 현실적인 물음에 코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난 그냥…….”

적절한 말을 찾느라 조금 시간을 끌었던 그는 한껏 가벼운 말투를 꾸며 내 대답했다.

“아직 모르겠어.”

“그래?”

내심 조마조마해하며 눈치를 보는데, 다행히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하긴, 신중한 게 좋지,”

내심 안도하는데,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고민하다니 멋있어, 코이.”

“아…… 응.”

얼떨결에 대답했지만 코이는 내심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멋진 이유가 아니라서 미안해, 애쉬. 난 그냥 아무 데나 장학금만 준다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걸.

물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항상 코이를 내려 주던 길가에 도착한 차가 멈춰 섰다.

“바래다줘서 고마워, 애쉬.”

차에서 내려 인도에 서 있던 코이는 애슐리가 트렁크에서 자전거를 내려 주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집까지 바래다준다면 좋겠지만…….”

애슐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당연히 그는 여기서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껏 줄곧 그랬듯이. 하지만 코이는 오늘 용기를 내어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저기, ……찮아.”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와 그는 황급히 헛기침을 했다. 숨을 가라앉힌 뒤 마침내 코이는 애슐리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 다고. 바래다줘도.”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애슐리의 눈이 점차 크게 뜨였다. 그 반응을 본 코이는 민망해져 황급히 덧붙였다.

“보고 실망하지 마. 뭘 상상하든 그 이하일 테니까.”

“알았어.”

애슐리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안 걸까? 코이는 의심스러워졌지만 애슐리는 선뜻 자전거를 한쪽 어깨에 메더니 남은 손을 코이에게 내밀었다. 코이는 그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다 이내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괜찮아.

함께 걸음을 옮기며 그는 떠올렸다.

괜찮을 거야,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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