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빠진 소리를 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코이의 표정에 애슐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은 그의 얼굴에 코이는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지금, 뭐, 라고 했어?”
겨우 입을 열었으나 문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띄엄띄엄 흘러나온 물음을 애슐리는 그저 듣기만 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코이에게는 더욱 무섭게 와닿았다.
애쉬는 발현했어.
코이의 이성이 그가 상처받지 않도록 현실을 일깨웠다. 난 그냥 베타야.
애쉬는 알파니까 그냥 평범한 베타하고는 다르다고.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맞아, 그럴 거야. 난 알파가 어떤 건지도 잘 모르잖아. 거기다 애쉬는 극알파니까, 보통 알파와도 거리가 멀어. 분명히,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뭔가가 있었을 거야. ……있겠지만.
기다렸는데.
자꾸만 합리화를 하려는 이성을 비집고 감정이 올라왔다. 날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난 그렇게 열심히 애쉬만 기다렸는데.
어떻게 내가 널 기다리는데 다른 사람과 그럴 수 있어.
하다못해 전화라도 해 줬다면, 그랬으면, 내가 알고 있기라도 했다면, 아니, 애초에.
“왜 말하는 거야…….”
결국 참지 못한 원망이 터져 나왔다. 코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걸. 어째서 애쉬는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코이.”
애슐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코이는 눈물이 가득 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급하게 눈을 깜박이자 굵은 눈물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또다시 차오른 부연 시야에 애슐리의 창백한 얼굴이 들어왔다.
“아냐, 거짓말이야.”
코이는 멀거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애슐리가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
“농담이었어.”
코이는 반신반의하며 눈만 깜박거렸다. 그의 진심이 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애슐리는 억지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한 번 더 말했다.
“정말이야, 다른 사람과 그런 짓 따위 하지 않았어. 나한텐 너뿐이야.”
새삼 다짐하는 애슐리의 눈앞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았던 불결한 장면이 펼쳐졌다. 드넓은 홀 안에 나체의 사람들이 뒤엉켜 신음하고 있다. 온갖 술과 약물이 넘치고 갖은 체위로 서로를 탐하는 인간들이 곳곳에 가득했다. 귓가에 울리는 신음과 비명 소리,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기괴한 웃음소리까지.
〈페로몬을 빼야지.〉
자신을 향해 속삭이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을 때, 애슐리는 정신이 들었다. 주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시야에 들어오자 삽시간에 불안이 사라지고 대신 마음이 가라앉았다.
“말했잖아, 널 사랑한다고.”
다시금 말하자 그제야 코이가 떨리는 숨을 들이켜더니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왜 그런 농담을 해…….”
“미안해.”
이내 훌쩍이며 울기 시작하는 코이를 애슐리는 꼭 끌어안았다.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애슐리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품 안에 들어 있는 코이의 눈물이 그의 얇은 티셔츠를 조금씩 적시는 감각에 애처로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번졌다.
다행이다.
무심코 떨리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끝까지 참길 잘했다. 만약에 넘어갔더라면, 그래서 코이를 배신했다면.
난 얼마나 코이에게 상처를 줬을까.
고문과도 같았던 몇 달이 일부나마 보상을 받는 듯했다. 잠깐이나마 기쁨과 안도감이 그를 찾아왔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잠깐’에 불과했다.
애초에 왜 난 이런 말을 했던 걸까.
자신이 코이를 시험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코이가 이렇게 상심하는 대신 괜찮다고 말했다면 난 어땠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화를 냈을까? 아니면.
다행이라고 안심했을까.
무리하게 페로몬을 빼기 위해 줄곧 주사를 맞았던 팔이 저릿거렸다. 그보다 쉬운 방법이 뭔지 그는 알고 있다. 만약 코이가 괜찮다고 한다면 지금 그는 바로 파티로 달려갈지도 모른다. 그만큼 고통은 컸고, 유혹은 강했다.
그러나 애슐리는 몇 번이고 인내하는 쪽을 택했다. 지난 몇 달, 정말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도 끝까지 거부했듯이.
그런데도 코이에게 이런 거짓말을 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코이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은 거라고.
하지만 코이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눈물을 터뜨렸고, 그것이 애슐리를 안심시켰다.
다행이다.
애슐리는 또다시 생각했다. 정말로 코이가 그렇게 말했다면 난 분명 화가 났겠지. 코이를 이렇게 울리면서까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잖아, 그 괴로움의 가치를.
버티길 잘했어.
그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코이를 더욱 세게 품에 안았다. 훌쩍이던 코이가 더듬더듬 그를 마주 안자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오직 코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힘겹게 버텼는지 안다면 코이는 결코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애슐리는 코이에게 어떤 것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걸 꿈도 꾸지 못했을 코이는 큰 충격을 받을 테고, 그 뒤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애슐리는 알고 있었다. 애써 부정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사실 자신도 그 파티에서 난장판으로 뒹굴고 있던 그들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발현한 그날부터 애슐리는 지옥에 떨어져 버렸고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한 걸음, 아니 반걸음만 어긋나도 그는 그대로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평생 그 유혹에 시달리겠지. 코이가 발현하지 않는 한, 계속.
이런 내가 계속 코이를 좋아해도 될까.
섬찟한 두려움이 심장을 서늘하게 했다.
내 본모습을 알게 되면 코이는 내게 정나미가 떨어져 버리겠지. 날 버릴 거야. 내가 그걸 참을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오싹 소름이 돋고, 불현듯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자신이 어째서 이토록 그 남자를 두려워하게 됐던 건지.
어릴 때 그는 단 한 번 아버지에게 거역한 적이 있다. 단지 ‘애슐리’의 소원을 들어주려 했을 뿐이었다.
죽게 해 줘.
너무 불쌍해서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면서도 ‘애슐리’의 목을 졸랐던 감각이 지금도 생생했다. 물론 실패했고 대가는 어마어마했다.
〈감히 네가 ‘내 것’에 손을 대다니.〉
더욱이 ‘그의 것’을 없애려고까지 했다. 애슐리는 사흘 동안 빛이라고는 바늘구멍만큼도 들어오지 않는 골방에 처박혔다. 그동안 ‘애슐리’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다시 그를 봤을 때 ‘애슐리’는 죽어 버리겠다는 의지조차 잃어버린 다음이었다.
난 지지 않아.
결코 ‘애슐리’와 같은 꼴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에게 거듭 되뇌었다. 난 그 남자와도 달라.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
애슐리의 차를 타고 코이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둘은 그다지 말을 나누지 않았다.
다만 예전처럼 애슐리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남은 손으로 코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코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슐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어딘지 변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코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며 애슐리가 말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초조해하지 말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애슐리의 손을 고쳐 잡자 그가 갑자기 깍지를 끼더니 코이의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손등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한 애슐리가 한 번 더 입술을 비비더니 손을 떼고 코이를 흘긋 보며 웃었다. 코이 또한 마주 웃었다. 어떻게든 예전의 편안한 분위기를 되찾기 위해 코이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어, 저기, 동부는 어땠어? 그러니까…… 거긴 사람도 많고 정신없지?”
화면에서나 보던 동부의 모습을 떠올리며 묻자 애슐리는 정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여기가 낫지, 날씨도 그렇고.”
아무렇지 않게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 코이는 기뻐하며 물었다.
“거긴 많이 추워?”
“눈이 엄청나게 와.”
애슐리가 다시 웃었다.
“넌 거기 있으면 집밖에 나가지도 못할걸.”
“눈이 와서?”
얼마나 쌓이길래 그럴까? 눈이 사람 키만큼 쌓인 러시아 거리의 사진을 떠올리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니, 내가 안 내보내 줘서.”
“그게 뭐야.”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애슐리 또한 웃고, 어느덧 편안한 분위기가 되돌아왔다.
“거기선 일과가 어떻게 돼? 막 아침에 줄 서서 커피 사 가고 그러지?”
동부에 관한 로망을 한껏 드러낸 코이에게 애슐리는 으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가 곧 대답했다.
“별거 없어.”
“어?”
코이가 묻자 시큰둥하게 말했던 애슐리가 이번엔 진지하게 부연설명을 했다.
“정말이야. 그냥 아침엔 베이글 먹고 저녁엔 스테이크 먹고, 그게 다더라고.”
“먹기만 해?”
“뭐, 심심하면 클랙슨 울리고.”
“클랙슨?”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사람들은 클랙슨에서 손을 안 떼.”
코이는 과장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상상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서부는 언제나 느긋했고, 신호가 바뀌어 차가 출발하지 않는다고 해서 클랙슨을 울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옆 차선으로 빠지거나 기다리다 또다시 빨간불로 바뀌기도 일쑤인 일상을 떠올려 보면 대체 그곳은 어떤 곳일까, 신기하고 궁금해졌다.
“저, 부모님은 어떠셨어? 잘 지내고 왔어?”
그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애슐리가 거기 간 이유가 그것이니 이상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핸들을 쥔 애슐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코이의 손을 잡고 있던 손 또한 악력이 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