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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10/216)

110화

코이가 감히 자신에게 가당찮은 감정을 느낀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갑자기 에리얼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에리얼이 눈썹을 치켜올렸고, 코이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빌.”

에리얼이 슬쩍 그를 부르며 어깨를 잡아당겼다. 한창 애슐리와 말을 나누던 빌이 뒤늦게 깨달은 듯 아, 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곧이어 둘을 번갈아 본 애슐리가 묘한 웃음을 짓고, 그 의미를 눈치챈 빌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냐, 애쉬.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서둘러 부정했던 빌이 흘긋 에리얼을 내려다보았다.

“아직은.”

에리얼은 그 말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은 채 애슐리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네 얘기를 하고 있었어.”

“둘이 사귀는 것에 난 아무런 이의도 없어.”

애슐리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기회만 준다면 축하 공연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에 코이는 새삼 놀랐다. 물론 애슐리와 에리얼이 헤어진 지 몇 달이 되었으니 새로운 상대를 만나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둘은 코이 같은 찌질이 왕따와는 전혀 다르니까.

하지만 옛 여자 친구와 제일 친한 친구가 사귀는 건 어떨까?

코이는 생각했다.

애쉬는 앨도 자신의 친구라고 얘기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에리얼이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굴 사귀건 나한테 이러쿵저러쿵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어.”

기분이 상한 듯 쏘아붙였던 그녀는 긴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마침 잘 왔어.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 괜찮아?”

에리얼이 노골적으로 코이에게 시선을 향했다. ‘넌 좀 빠져 줄래?’ 하고 말하는 것 같아 코이는 지레 움츠러들어 뒷걸음질을 쳤다.

“알았어. 코이!”

선뜻 대답했던 애슐리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코이를 불렀다. 흠칫 놀라 멈춰 서자 애슐리가 물었다.

“잠깐 다녀올게. 혹시 다른 일 있어?”

“어, 아니.”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으로 가던 중이었어.”

“그래.”

애슐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 줄래? 금방 올게.”

“어…….”

에리얼과 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슐리는 그런 그들을 앞에 두고 코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왠지 모를 부담감과 가슴 벅찬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할게.”

“좋아.”

애슐리 또한 고개를 끄덕인 뒤 빌에게로 돌아섰다. 코이는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은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서서 얘기를 나눴다. 여전히 코이는 지금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뻘쭘하게 남겨진 코이는 괜히 발로 바닥을 툭툭 치기도 하고 난동을 부리는 아이들을 쳐다보기도 하고 괜히 목덜미를 만지작거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애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애슐리가 없을 때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는데 막상 그를 눈앞에서 보자 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애쉬가 돌아왔어.

다시금 멍하니 애슐리를 바라봤을 때였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코이 쪽을 쳐다봤다. 시선이 맞닿자 애슐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순간 코이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코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음성을 떠올렸을 때, 애슐리가 고개를 돌렸다. 

다시 에리얼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한 그의 옆얼굴을 보던 코이는 왠지 무안해져 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카 크래시에 몰입해 열심히 차를 박살 내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난장판이 되어 가는 카 크래시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지금까지 이런 건 관심도 없었는데. 온통 애슐리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이 이렇게 가벼워지고 엉망진창으로 난리가 난 모습을 보면서 웃게 되는 건 아마도…….

코이가 슬며시 애슐리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박살이 난 차에서 솟아오르는 불길이 비쳐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네가 좋아.

코이는 불현듯 떠올렸다.

네가 좋아,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어 댔다. 아이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아득히 멀리서 들려왔다. 시야에는 단 한 명만이 가득 찼다.

오직 애슐리 밀러만이.

코이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넋을 잃고 그를 보기만 했다.

*

“코이!”

마침내 얘기를 끝낸 애슐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고작 몇 번 발을 옮긴 것뿐인데 벌써 코이의 앞에 성큼 다가온 그가 말을 이었다.

“많이 기다렸지? 미안.”

“괜찮아.”

코이는 간신히 웃어 보였다. 가슴이 벅차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떡해.

그는 정신없이 애슐리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애슐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코이?”

“응?”

홀린 듯 대답하자 애슐리가 쓴웃음을 짓더니 멋쩍은 듯 턱을 쓰다듬었다.

“아니, 조금 멍한 것 같아서…… 괜찮아?”

“아, 응, 으응.”

코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애슐리의 눈에는 여전히 그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의아해하는 애슐리에게 코이가 입을 열었다,

“그냥,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

“뭐?”

애슐리는 잠깐 놀랐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나도 그래.”

그리고 그가 먼저 코이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코이. 보고 싶었어.”

귓가에 애슐리의 심장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머뭇거리던 코이는 조심스레 팔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았다. 두 팔 가득 느껴지는 체온과 굵은 몸에 참고 참았던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애쉬…….”

울먹이는 소리로 숨죽여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애슐리가 그래, 하고 더욱 힘주어 코이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늦게 와서.”

흐윽, 흑, 급기야 코이가 작은 소리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애슐리는 그런 코이를 안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차가 부서지는 소리와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함께 카이엔을 타고 애슐리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헤어지기 전과 마찬가지로 애슐리가 운전을 하는 내내 둘은 한 손을 꼭 맞잡은 채였다.

코이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상태였지만 가슴이 뛰는 건 여전했다. 잔뜩 들뜬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려 애쓰며 궁금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는 애슐리에게 듣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저녁 안 먹었지?”

항상 그렇듯 차고 앞에 차를 세우며 애슐리가 물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먼저 손을 놓고 차에서 내렸다.

“먼저 먹고 얘기하자. 어서 들어와.”

“어, 응.”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뒤따라 차에서 내리려는데, 문득 뒷좌석에 있는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코이가 그에게 선물했던 인형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안전벨트를 맨 채 일렬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또다시 코끝이 찡해졌다. 그는 다시 눈물이 괸 두 눈을 황급히 문질러 닦고 애슐리의 뒤를 쫓아갔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둘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코이는 먼저 말을 꺼내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일단 먹는 데 집중했다. 드디어 식사를 끝내고 티룸에 마주 앉은 뒤에야 비로소 코이는 심호흡을 하고 대화를 나눌 준비를 했다.

“기다렸지?”

애슐리가 티테이블 위에 가져온 디저트용 케이크와 차를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얼떨결에 마주 웃었던 코이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껏 느꼈던 설렘이 어느새 사라지고, 불안과 초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애슐리의 표정은 예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훨씬 야위고 창백해졌지만 여전히 다정한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코이, 왜 그래?”

건너편에 앉은 애슐리가 물었다.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린 그가 코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표정이 안 좋은데.”

코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애슐리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눈물이 고였다. 애슐리가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며 코이가 입을 열었다.

“……애쉬.”

흐느낌처럼 숨결이 흩어져 그는 심호흡을 한 뒤 겨우 물었다.

“나한테 질렸어?”

“뭐?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애슐리가 즉시 반응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표정에 코이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그런데 왜…….”

다음 말을 하기 전에 그는 먼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애슐리는 처음으로 그의 두 눈에 원망이 서리는 것을 보았다. 다시 숨을 가다듬은 코이가 맥 빠진 음성으로 푸념을 했다.

“돌아오고 나서, 키스도 한 번 안 했잖아.”

순간적으로 애슐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반응이 코이의 설마, 했던 마음을 더욱 확신으로 굳어지게 했다.

“……헤어지자고, 말하려는 거구나.”

에리얼과 헤어질 때도 이랬을까? 난데없이 둘의 결별 소식이 들려왔던 걸 떠올렸을 때, 갑자기 애슐리가 벌떡 일어나 코이의 팔을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일어난 코이를 세게 끌어안은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는 간신히 뒷말을 삼켰다. 떨리는 음성과 불규칙한 숨결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코이는 더욱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럼, 왜.”

“코이.”

애슐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코이의 몸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헤어지자니, 네가 날 버리면 나는.”

애슐리의 음성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코이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공포와 불안에 생경한 충격을 받았다. 뒤이어 숨을 토하듯 애슐리가 고백했다.

“난 죽고 말거야.”

코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주저하던 손을 들어 애슐리를 마주 안았을 뿐이다. 애슐리가 그를 안은 팔에 너무나 힘을 줘 온몸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꾹 참았다.

“떠나지 않아, 애쉬.”

숨이 꽉 막혀 성대를 쥐어짜듯 간신히 말했다.

“너와 헤어지지도 않을 거야.”

애슐리는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욱 힘주어 코이를 끌어안았다. 급기야 코이는 기절할 것처럼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런 그에게 기대어 눈을 감으며 그는 어렴풋이 떠올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애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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