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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109/216)

109화

“버팔로 우승!”

우와아아, 함상이 쏟아지고 모두가 여기저기서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코이 역시 치어리딩 팀 아이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팔짝팔짝 뛰며 우승을 축하했다.

“정말 고생했어, 우리 다!”

“고릴라들이 내 심장을 들었다 놨다니까.”

“그러게, 마지막엔 정말 지는 줄 알았다고!”

“정말 아슬아슬했지? 연장전 갔으면 졌을지도 몰라.”

“안 갔으면 된 거야, 버팔로!”

“버팔로!”

또다시 한 목소리로 외친 그들과 함께 소리를 냈던 코이는 어깨동무를 했던 팔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스하키 녀석들이 헹가래를 치고 서로의 등을 두드려 대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겠지. 정말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까.

코이는 씁쓸한 기분으로 떠올렸다. 애슐리가 있었다면 우승은 쉬웠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매 경기마다 가슴을 졸이며 위태롭게 승리를 이어 갔는데, 매번 역전승이나 한 골 차로 이기려니 응원하는 쪽에서도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모두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왔으니 다행이야.

코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다 곧 침울해졌다. 벌써 2월이 지나고 있었다. 시즌은 끝났고 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애슐리로부터는 그 뒤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괜찮은 거지, 애쉬……?

불안과 염려로 그는 가슴이 타들어 갔으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저택의 관리인에게도 물었지만 “잘 지내고 있다.”라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목소리를 듣고 싶어.

그를 안고 체온을 느끼고 싶다.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 걸까. 설마 이대로 끝나 버리는 건 아니겠지……?

“코이, 가자. 오늘은 뒤풀이야!”

“어, 응.”

부부장의 말에 코이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뒤를 쫓았다. 아무도 애슐리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그렇게 됐다. 처음 애슐리가 아이스하키 팀에서 제외된 이유를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단지 감독이 일방적으로 선언했을 뿐이고, 빌을 포함해 팀의 선수들은 강하게 항의했으나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애초에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이러쿵저러쿵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슐리가 추수감사절에 동부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빌은 이를 갈면서 화를 삭이며 대책을 내놓았다.

〈휴가가 끝나고 난 후 본격적으로 항의하자.〉

아이스하키 팀의 모두는 동의했으나 그 뒤로 애슐리는 사라져 버렸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지나고, 이제 2월도 끝나 가는데 연락조차 없다.

어째서일까.

아이들과 함께 겉으로는 웃고 있으면서도 코이의 머릿속은 온통 애슐리로 가득 찼다.

혹시 애쉬, 나한테 질려 버린 건 아니지……?

불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채로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지나 코이는 12학년이 되었다.

*

우와아아아아…….

요란한 함성에 귀가 먹먹해졌다. 아이스하키 리그가 시작되기 전 학교에서 축제가 벌어진 것이다. 축제라고 해 봐야 어디서 끌고 온 폐기 직전의 차를 때리고 부수고 불태우며 난동을 부리는 것이었지만.

일을 도와달라는 선생의 요청에 따라 평소보다 늦게 끝난 코이는 건물을 나오면서 느낀 어수선한 분위기에 곧 상황을 눈치챘다. 아마도 카 크래시를 앞두고 모여 있는 학생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는 듯했다.

벌써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어둑한 하늘 밑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선, 키가 큰 조명들이 운동장을 훤하게 비추고 있었다. 운동장 한복판에는 미리 준비해 둔 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모여 있는 아이들은 어서 그 차를 깨부수고 박살을 낼 수 있기만 기다리며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 운동장을 지나치려던 코이는 곧 무리에서 얼마간 떨어져 관중석 근처에 서 있는 에리얼을 발견했다. 정확하게는 ‘그들’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에리얼은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빌하고 같이 있잖아?

코이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생각지도 못했던 조합이었다. 팀에서 가장 애슐리와 가깝다고 생각했던 빌이 애슐리의 전 여자 친구와 함께라니.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애슐리 못지않은 장신에 커다란 체격을 가진 전(前) 아이스하키 팀 부주장과 함께 있는 에리얼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둘은 12학년이 되면서 입시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모두 특별 활동을 그만뒀다. 그 때문에 함께 있을 기회가 그리 없었을 텐데, 지금 그들을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카 크래시를 앞두고 흥분해서 고함을 지르고 날뛰는 다른 녀석들을 지켜보며 그들은 간간이 웃기도 하고 뭔가 속삭이기도 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나누는 모습은 누가 봐도 심상치 않았다.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문득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설마 저 둘, 사귀려는 걸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든지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더 이상 아무 접점도 없을 두 사람이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눌 일은 없을 테니까.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평범한 호기심을 느꼈을 때, 갑자기 빌이 고개를 돌렸다. 불시에 눈이 마주쳐 코이는 화들짝 놀라 눈을 둥그

렇게 떴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왠지 꺼림칙해서, 그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갑자기 조명의 일부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꺼지고, 빛이 차에 집중되었다. 드디어 모두가 기다렸던 그 순간이 온 것이다. 숨죽인 침묵 속에서 아이스하키 팀의 코치가 쌓여 있던 장작더미로 불붙인 종이 뭉치를 내던졌다. 미리 가솔린을 뿌려 놓았던 장작더미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곧이어 감독이 거친 쇳소리 섞인 고함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가자, 버팔로!”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차에 달려들었다. 여기저기서 온갖 도구를 이용해 차를 두들겨 대고 누구는 발로 걷어차고 또 다른 누구는 영상을 찍어 댔다.

그만 돌아가자.

코이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만약에 애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다른 얘기겠지만…….

벌써 10월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제 애쉬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려는 건지도 몰라.

무심코 코끝이 찡해져 킁, 소리를 내며 코를 훌쩍거렸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아 세게 끌어당겼다.

“……어!”

놀라 짧은 비명을 내질렀지만 코이의 목소리는 함성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렸다. 당황해 고개를 돌렸을 때, 누군지 확인한 그의 눈은 두 배로 더 커졌다. 자신보다 한참 높은 곳에 위치한 얼굴을 보고도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쉬?”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코이는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애슐리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코이는 입을 벌린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보기만 했다.

예고되어 있던 아수라장 속에서 코이는 잠시 동안 애슐리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작 몇 초에 불과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아주 오랫동안 코이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불타는 장작의 매캐한 연기 냄새, 스산하게 불어오던 밤공기,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함성 소리,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진한 보라색의 눈동자.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애슐리의 은발에 가까운 금발이 이마 위로 흐트러졌다. 불길이 그의 옆얼굴에 비쳐 붉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는 예전보다 야윈 듯했다. 골격이 선명하게 드러난 얼굴은 무척 날카롭게 느껴졌으나 코이를 바라보는 눈동자만은 여전히 신비하고도 따뜻하게 빛나는 보라색이었다.

흘러내린 머리칼이 귀찮은 듯 애슐리가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긴 손가락에 휘감겨 물러났던 금발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애슐리는 이번엔 그냥 내버려 뒀다. 

깨끗하게 각이 진 손톱마저도 완벽한 그를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애슐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안녕, 코이.”

목소리가 들렸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애쉬……!”

뒤늦은 실감에 그만 코이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대로 굳어 멍하니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코이를 보고 애슐리는 팔을 활짝 벌린 채 서 있었다. 사라지기 전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코이는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못했다.

불현듯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너무나 많은 감정이 넘쳐흘러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코이는 손가락을 움칠거리며 입을 벌렸으나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벙긋거리기만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애쉬, 애쉬 아냐?”

애슐리가 뒤를 돌아보고, 코이 또한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빌이 환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맞구나, 야, 이 자식!”

빌이 소리치며 애슐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애슐리 또한 웃는 얼굴로 그를 마주 안았다. 코이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코이는 복잡한 기분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빌이 떠들썩하게 말을 이어 갔다.

“어떻게 된 거야? 학교는 왜 이렇게 오래 안 나왔어?”

“좀 바빴어.”

애슐리가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코이 역시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잠자코 입을 다문 채 보고만 있는데, 뒤에 서 있는 에리얼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둘을 지켜보기만 하는 모습에 코이는 동질감을 느꼈다. 물론 당치 않은 감정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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