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애슐리는 고함을 지르며 그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지금껏 참고 참았던 분노가 일시에 폭발했다. 자신에 관해서는 지금껏 참고 견뎠다. 그러나 코이를 잡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저 역겨운 얼굴을 날려 버리고 말겠다. 죽여 버리고 말겠어. 죽여 버릴 거야. 애슐리는 이를 악물고 온힘을 다해 아버지를 향해 돌진했다.
남자가 얼핏 웃은 듯했다.
“……윽!”
전력으로 휘두른 주먹이 순간 허공을 갈랐다. 균형을 잃은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가 뒤로 반 보 물러난 것만으로 자신의 주먹을 간단히 피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벌써 애슐리는 바닥에 크게 나뒹굴고 만 뒤였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대리석 바닥에 온몸을 부딪쳤으나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반쯤 정신이 나가 휘청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였다.
“……!”
불시에 얼굴로 날아온 발길질에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다시 바닥을 뒹굴었다. 도미니크는 쓰러진 애슐리가 미처 몸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그의 목을 한 발로 밟아 짓눌렀다.
“큭…….”
순식간에 꽉 막혀 온 숨통에 애슐리의 입가에서 힘겨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훌쩍 큰 남자의 키가 마치 거인처럼 크게 보였다. 애슐리는 그의 다리를 자신의 목에서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힘을 줘 목을 짓밟는 압력에 애슐리는 이내 눈앞이 까맣게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부질없는 손짓을 계속하며 자신의 다리 언저리를 배회하는 아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도미니크가 입을 열었다.
“네가 멋대로 구는 걸 봐주는 건 네가 ‘애슐리’이기 때문이야.”
‘도미니크’이기도 하지.
그지없이 냉담한 음성에 애슐리는 떠올렸으나 숨을 쉴 수조차 없어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목을 밟고 있던 구둣발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가 완전히 공기를 막아 버렸다. 끄윽, 끅, 괴롭게 흘러나오던 신음 소리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애슐리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갔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죽고 말 것이다.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로 애슐리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남자도 사람을 죽이면 법정에 설까?
그렇겠지, 다른 모두가 그렇듯이.
다만 결과는 그렇지 않다. 죄의 유무는 값비싼 변호사의 유무와 같다. 궁금한 것은 이 남자는 스스로를 변론할까, 아니면 로펌의 수많은 변호사들을 내세울까 하는 것이었다. 죽어 가는 마당에 별로 의미는 없는 물음이었지만.
……코이.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 갑자기 도미니크가 발을 치웠다.
“컥, 커헉, 헉.”
불시에 밀려들어 오는 산소에 애슐리가 고통스러운 기침을 토해 냈다. 양쪽의 폐를 누군가 쥐어짜는 것 같다.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헐떡이며 연거푸 기침을 하던 그가 급기야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쓰디쓴 위액뿐이었다. 식도를 태우는 듯한 작열감에 또 다른 통증을 느낀 애슐리가 입술을 깨물고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간신히 숨이 잦아들었을 무렵, 도미니크가 엎드려 있던 그의 위로 몸을 숙였다.
“……으!”
갑자기 머리채가 잡혀 애슐리는 자신도 모르게 억눌린 신음을 뱉고 말았다. 도미니크가 그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반쯤 앉아 애슐리의 일그러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건 그냥 적당히 가지고 놀다 버렸어야지.”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애슐리는 머리채를 잡은 손을 떼어 내려 했으나 오히려 도미니크는 힘을 줘 그의 머리를 더 세게 끌어당겼다. 자신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지른 애슐리에게 도미니크가 귓가에서 위협적인 음성으로 내뱉었다.
“잡종이랑 교미하라고 널 낳은 게 아냐.”
애슐리는 도미니크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과도하게 허리가 꺾인 채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몸은 뜻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남자를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코이를, 모욕하지 마.”
이를 악물고 잇새로 으르렁거리자 도미니크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한 손으로 애슐리의 머리채를 잡은 채 남은 손을 뻗었다. 그가 자신의 팔을 낚아챈 다음에야 애슐리는 도미니크가 뭘 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런 잡종 따위를 지키겠다고 이런 걸 남기다니.”
도미니크에게 잡힌 팔에는 제법 큰 흉터가 남아 있었다. 발현 할 때 코이를 지키기 위해 물어뜯었던 흔적이었다. 도미니크가 처음으로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것을 본 애슐리의 마음에 아주 작은 쾌감이 일어났다.
역시 그렇게 하길 잘했다. 코이를 지키길 잘했어.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난 똑같이 할 거야.”
애슐리가 가쁜 숨결 사이로 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도미니크가 애슐리의 팔에서 시선을 떼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온 그의 얼굴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냉담하기만 해서, 애슐리는 조금 실망했다.
그런 그의 팔을 슬며시 놓은 도미니크가 고개를 기울이고, 마치 밀어를 속삭이는 것처럼 은밀하게 사어했다.
“아무리 페로몬을 쏟아 봤자 발현하지도 못하는 반편이한테 진지해져 봤자 후회하게 될 거다.”
“……읏!”
미처 애슐리가 뭐라고 말을 할 틈도 없이 도미니크는 그를 밀치듯 놓아준 뒤 몸을 일으켰다.
“치료해 줘.”
선뜻 돌아선 그가 명령을 내리자 그때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비서가 몸을 움직였다. 애슐리는 그녀가 마치 그림자처럼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밖으로 나가 버리는 도미니크의 뒷모습에 어리둥절해져 있는데, 비서가 가까이 다가와 상태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주사를 다시 놔야겠군요.”
평소처럼 사무적으로 말한 그녀는 휴대 전화를 꺼내 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즉시 집사가 고용인들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애슐리를 부축해 침대에 다시 눕혀 주었다.
그리고 집 안의 주치의가 한숨과 함께 팔을 알코올 솜으로 누르는 것을 본 애슐리는 주삿바늘이 빠졌었다는 사실과, 그 탓에 어마어마한 출혈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바닥에 흥건하게 퍼져 있는 붉은 피를 고용인들이 다급하게 닦아 내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던 애슐리에게 주치의가 말했다.
“반대쪽 팔에 다시 놓겠습니다. 이번엔 멋대로 주사를 빼거나 하지 말아요, 잘못하면 정말 팔을 잘라야 합니다.”
무서운 경고를 남긴 그가 다시 수액을 연결하고 애슐리의 반대쪽 팔에 주사를 놓았다. 애슐리는 의식이 돌아왔을 때 느꼈던 통증과 온갖 고통을 떠올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거, 꼭 맞아야 하는 건가?”
그의 물음에 비서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페로몬 탓에 머리가 망가져 미치고 싶지 않다면요.”
애슐리는 욕설을 삼키고 대신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묵묵히 보기만 하던 비서가 말문을 열었다.
“순순히 페로몬을 뺐으면 밀러 씨도 이렇게 심하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내가 그 남자를 거역해서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얘기야?”
“그것도 있지만.”
피식 웃으며 비꼰 애슐리에게 비서는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밀러 씨의 마음에 안 들었다는 거죠.”
잡종견.
경멸이 가득한 그의 음성이 애슐리의 귓가에 되살아났다. 결국 그런 얘기다. 격이 맞지 않는, 볼품없는 집안의 코이를 애슐리가 이토록 좋아하고 신의를 지킨다는 게 거슬린다는.
물론 그렇겠지. 앨조차도 저 남자는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제야 애슐리는 어째서 저 남자가 자신을 페로몬 파티에 던져 놓았는지 깨달았다.
그는 시험한 것이다. 애슐리의 코이에 대한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그리고 애슐리는 보기 좋게 시험에 탈락했고 그것이 도미니크를 화나게 했다.
비서가 계속해서 말했다.
“적당히 놀다가 헤어지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 않겠어요? 밀러 씨도 그 정도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고요.”
애슐리는 괜한 화풀이를 그녀에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빈정거리는 것까지는 참을 수 없었다.
“당신은 평생 누군가를 이 정도로 좋아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그녀는 모른다. 세상 누가 알 수 있을까? 코이와 애슐리가 얼마나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지. 오직 그들에겐 서로가 전부라는 걸.
애슐리의 버릇없는 말투에 비서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10대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죠.”
그녀의 대답은 애슐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심코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에게 비서는 여전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당신은 발현을 했고 그쪽은 안 했어요. 베타가 알파나 오메가를 상대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상대를 위해서도 포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순간 애슐리는 멈칫했다. 그녀의 말은 계속해서 허를 찔렀다.
“진정으로 누굴 좋아하면 놓아줄 줄도 알아야 어른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어른이 아니라 모르겠지만.”
처치를 마친 의사가 불안해하며 둘의 눈치를 살폈다. 비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애슐리를 향해 말했다.
“게다가 이상하지 않아요? 그 정도 페로몬이었다면 진작 발현을 하든 변이를 하든 했을 텐데 그 아이는 전혀 변화가 없잖아요?”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급기야 애슐리가 이를 갈며 내뱉었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계속해서 그의 심장을 찔러 대고 있었다. 급기야 가장 아픈 구석까지.
“발현을 하는 극알파와 며칠을 함께 보낸 데다 수시로 페로몬을 덮어썼을 텐데 아직도 발현하지 않고 있다는 건 본인이 강하게 거부하고 있어서인지도 몰라요.”
애써 묻어 두려고 했던 생각을 들추는 말에 애슐리는 기가 꺾여 버렸다. 그는 발현한 지 얼마 안 됐고, 종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다. 비서의 말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야?”
사이를 두고 묻는 음성은 자신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비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글쎄요? 모든 가능성은 다 열어 놔야 하지 않겠어요?”
‘왜 발현하지 않았는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서는 할 일을 끝낸 의사를 더 이상 시간 끌지 않고 해방시켜 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만 가셔도 좋아요. 그럼 밀러 씨,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전화를 해 주세요. 그럼.”
비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의사와 방을 나가 버렸다. 드디어 애슐리는 혼자가 되었으나 마음속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