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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102/216)

102화

애쉬다!

그가 동부로 떠난 뒤 처음 온 전화였다. 이내 반가움과 그리움에 가슴이 메어 왔다. 냉큼 버튼을 누르려는데, 그 순간 콘돔 무더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곧이어 코이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벨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코이는 한동안 휴대 전화의 화면을 보기만 했다. 애슐리의 이름을 보고도 냉큼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후우우, 후우우.”

소리 내어 심호흡을 두 번이나 한 뒤에야 비로소 그는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부재중으로 넘어가기 직전 코이는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 코이?

건너편에서 곧바로 음성이 흘러나왔다.

-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렇게 늦게 받아?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애슐리의 목소리에 코이는 죄책감이 들어 황급히 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그, 그냥. 일하다가 받느라고.”

애슐리의 음성을 듣자 방금 전 얼어붙었던 마음이 일시에 녹아내렸다. 대신 그 자리에 가득 찬 애정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코이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바빴어……?”

왜 이렇게 전화 안 했어.

야속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자신의 음성에 그는 황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당연히 바빴겠지,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난 걸 텐데.

코이 또한 그에게 전화하지 못한 것은 그가 가족들하고 있을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기도 했고, 3시간의 시차가 생각보다 꽤 영향을 줬기 때문이었다. 아마 애슐리 역시 그와 비슷한 사정으로 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애쉬가 먼저 전화하기를 기다렸으면서 서운해하다니.

애슐리한테 미안해져 다시 말을 고치려는데, 건너편에서 한숨소 리가 들렸다. 곧바로 코이의 온몸이 굳었다. 나한테 화가 난 걸까? 내심 긴장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애슐리가 건너편에서 말했다.

- 미안, 코이. 이쪽이 너무 정신없어서.

“어…….”

생각한 것보다 평온한 음성이었다. 화나지 않았구나. 안도하는 한편 미안해졌다. 애쉬는 이런 걸로 짜증 내거나 화를 내는 애가 아닌데 괜히 내가 애쉬를 나쁜 쪽으로 생각했어.

코이는 죄책감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모님하고 일이 많아……?”

- 뭐, 비슷해.

애슐리는 대답을 흐렸다. 애매한 말에 코이는 궁금해졌으나 남의 가족에 대해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꾹 참고 대신 다른 말을 했다.

“피곤하겠다. 그래도 같이 있으니까 부모님이 좋아하시지?”

애슐리는 이번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한 침묵에 당황하는데, 건너편에서 대답했다.

- 글쎄, 그 사람들 속마음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

코이는 어리둥절해져 중얼거렸다. 어딘지 시니컬한 반응에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바로 떠오르질 않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코이를 구원해 준 것은 이번에도 애슐리였다.

- 넌 어때, 코이? 추수감사절은 잘 보냈어?

“어? 아, 응.”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던 코이가 뒤늦게 감사의 말을 했다.

“저, 고마워 애쉬. 덕분에 일 잘하고 있어.”

- 정말? 괜찮아?

“응.”

코이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일도 쉽고, 돈도 많이 줘. 저기, 나 전에 아르바이트 할 때보다 일은 훨씬 적은데 돈은 더 많이 받아. 고마워, 덕분에 나 대학 시험도 다시 보고…….”

신이 나서 나열하던 코이가 멈칫했다. 다음 말을 하기에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우리…… 결혼, 자금도.”

새빨개진 얼굴로 작게 웅얼거리자 건너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코이를 비웃는 것은 결코 아닌, 오히려 즐거워하는 웃음소리에 코이는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왜, 왜 웃어.”

- 아, 코이.

웃음이 남은 음성으로 애슐리가 속삭였다.

- 키스하고 싶다.

코이의 심장이 마구 달려가기 시작했다. 코이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도.”

보고 싶어, 애쉬.

입 밖으로 뛰쳐나오려던 말을 겨우 참아 낸 코이는 실수하지 않도록 입을 꽉 다물었다. 이런 말을 하면 애슐리를 더 힘들게 할 것 같았다. 애슐리도 참고 있을 텐데 나도 힘내야지.

후우, 심호흡을 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물었다.

- 뭐 하고 있었어? 청소?

“어, 응.”

대충 시간을 보고 짐작한 걸까? 코이는 생각하며 대답했다.

“좀 전까지 수영장 청소했고, 안으로 들어왔어.”

- 일을 또 해? 수영장에서 했는데?

애슐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분명 그는 하루에 하나씩만 일을 맡기라고 지시했었다. 대체 코이에게 일을 얼마나 시키고 있는 거야? 당장 확인해서 제대로 시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대답을 기다렸다. 코이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시키신 일은 그게 단데, 내가 더 하고 싶어서…….”

- 왜, 굳이?

애슐리는 납득하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하지, 나라도 그럴 테니까. 코이는 그를 이해했으나 지금의 상황은 특별했다.

“널 좋아하니까…….”

황급히 덧붙이자 애슐리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놀란 듯한 기색에 코이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작게 웅얼거렸다.

“네가 그랬잖아, 돌아왔을 때 집이 깨끗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 그래서, 집 안을 청소하고 있는 거야?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마, 많이 하는 건 아냐. 그냥 방 한두 개 정도…….”

애슐리는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까. 조금이라도 편해지라고 자신의 집에서 일을 하라고 한 건데 일을 알아서 만들고 있다.

날 위해서.

애슐리는 기쁘기도 하고 코이가 사랑스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으흠, 헛기침을 한 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정하게 물었다.

- 그래서, 지금은 어딜 청소하고 있어?

“어, 어어.”

코이는 서둘러 대답했다.

“네, 네 방.”

- 내 방?

“응.”

애슐리가 다시 묻자 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돌아오면 가장 먼저 여기서 쉴 거 아냐. 그래서…… 매일 청소하고 있어, 네 방은.”

그제야 애슐리는 ‘한두 개’ 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애슐리의 방 하나와 다른 방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건 코이가 할 수 있는 그만의 애정 표현이었다. 애슐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말했다.

- 그렇구나.

다정하게 흘러나온 음성에 코이는 안도했다. 그러자 입이 멋대로 움직여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고 말았다.

“그런데 콘돔이 왜 그렇게 많아?”

- 뭐?

으악!

코이는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건너편에서 찌푸린 애슐리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아니, 저기, 그게, 그러니까…….”

다급하게 말을 더듬는데, 애슐리가 알겠다는 듯이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 코이, 서랍 안을 봤구나.

은근히 야유하는 것 같은 음성에 코이는 당황해 소리쳤다.

“아, 아냐,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뒤의 먼지를 닦으려고 테이블을 좀 움직였는데, 이게 이만큼 기울어서 서랍이 멋대로, 내가 보려고 한 게 아니고!”

횡설수설하는 반응을 보고 애슐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또다시 자신을 놀렸다는 사실에 코이는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안도했다. 기분 나빠 하지 않는구나.

내심 가슴을 쓸어내린 코이는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기…… 이건, 네가 산 거지? 네 사이즈로?”

- 맞아. 왜?

너무나 쉽게 인정해 버리는 바람에 코이는 긴장했던 자신이 바보스러워졌다. 덩달아 맥이 풀려 그의 혀가 전보다 가볍게 움직였다.

“너무 커서…… 좀, 놀랐어.”

- 너무 큰 정도는 아냐. 미어캣 정도?

애슐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뇌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실물을 봐 버린 코이의 머릿속에는 쉽게 먹혀들지 않았다.

“미어캣은 작고 귀엽던데.”

- 아냐, 코이. 네가 실제로 못 봐서 그래. 못 봤지?

“어, 응.”

코이는 무심코 동의했다.

“사진으로만 봤어.”

- 그럼 내 말을 믿어. 내 건 미어캣 정도 크기야.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염치도 없이 덧붙였다.

- 작고 귀엽지.

자신 있는 끝맺음에 코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뇌가 애슐리의 말을 납득하려고 열심히 움직이는 게 분명하다, 라고 생각하며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을 때, 코이가 입을 열었다.

“너도 미어캣 본 적 없지?”

그의 목소리에 가득 차 있는 불신에 애슐리는 멈칫했다. 열심히 움직여야 하는 건 그의 뇌였다. 애슐리는 다급하게 머리를 굴리면서 겉으로는 태연하게 물었다.

- 아니, 있는데. 왜?

“미어캣이 그렇게 클 리 없어. 그건 아나콘다잖아, 또 날 놀리는 거지?”

- 아냐, 코이. 정말이야.

이제 애슐리 쪽이 다급해졌다.

- 내 건 미어캣이야. 정말이라고. 코이, 날 믿지 못하는 거야?

뒷말엔 속상함이 가득히 묻어 나왔다. 자신의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는 좌절감과 코이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야속함이 뒤섞여 진심으로 흘러나온 음성에 코이가 흔들렸다.

“……정말?”

- 그래, 맞아.

애슐리가 이번엔 강하게 주장했다.

- 미어캣이야.

“……잠깐만.”

코이는 그를 기다리게 한 후 재빨리 검색을 했다. 미어캣, 미어캣. 미어캣의 크기. 그리고 그는 확인했다.

꼬리를 포함해 50센티미터.

설명을 본 순간 코이는 납득했다.

“……미어캣일 수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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