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216)

100화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에도 도무지 얼굴은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콘돔을 사는 게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코이는 처음 알았다. 물론 지금까지 이걸 살 기회가 없었으니 당연하다.

애쉬는 많이 경험해 봤겠지?

“아.”

거기까지 생각했던 코이는 뒤늦게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애쉬라면 이미 콘돔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당연하잖아!”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애슐리는 코이 이전에 여자 친구를 여럿 사귀었었다. 당연히 경험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콘돔을 필수 도구다. 애초에 애슐리같이 매너 좋은 애가 콘돔 없이 뭘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냐, 그래도 남자라면 이쪽에서 먼저 준비해야 하는 거야.”

코이는 콘돔을 살 때 들었던 할아버지의 조언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애쉬에게 콘돔이 없을 수도 있잖아? 왜, 꼭 필요할 땐 그게 없다는 그런 징크스도 있으니까.

그리고 다른 여자애랑 쓰려고 샀던 콘돔을 나랑 할 때 쓰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을까?

잠깐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창피한 거보단 나을 거 같은데?”

으아아, 다시금 비명이 나와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무슨 핑계를 대도 역시나 멍청한 짓이었다. 그나마 옆 동네에 갔기에 망정이지 처음 생각대로 여기서 샀더라면…….

CCTV는 계산대 위를 정확하게 비추고 있기 때문에 코이가 뭘 결제하는지 바로 보일 것이다. 별생각 없이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서 사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일찌감치 일어나 옆 동네로 가길 정말 잘했다. 

그것만큼은 스스로의 머리를 토닥여 주고 싶을 만큼 잘한 결정이었다.

어쨌든 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어.

코이는 자신을 위로하며 바지 주머니 위로 손을 가져갔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작은 상자의 감촉에 또다시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파닥거리는데, 갑자기 휴대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가게의 주인이었다.

“여, 여보세요.”

서둘러 전화를 받자 건너편에서 퉁명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 혼자 뭘 하고 있니? 정신 사납게.

CCTV로 코이를 지켜본 모양이었다.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를 올려다봤다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그, 그냥…… 체조요. 무, 무슨 일이세요?”

황급히 얼버무리자 그는 곧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 이번 추수감사절 말이다. 너, 일할 거지?

“네?”

자신도 모르게 되묻자 주인은 재차 다그쳤다.

- 너 별로 할 일도 없잖아. 당연히 하겠지? 어?

그의 말은 딱히 틀리지 않았다. 이럴 때 코이는 항상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올해는 다르다.

“저, 약속이 생겨서요.”

- 뭐? 약속?

코이의 말에 주인은 멈칫하고 되물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코이는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네,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았어요.”

남자 친구지만.

내심 덧붙인 코이의 얼굴이 저절로 달아올랐다. 무심코 미소를 짓는데, 잠시 말이 없던 주인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 그, 그럼, 그날 일을 안 하겠다고? 정말로?

“네, 쉬려고요.”

주인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왠지 침묵이 부담스러워졌을 때, 그가 썩 내키지 않아 하는 음성으로 물었다.

- ……일당을 더 준다고 해도?

코이는 뜻밖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 지금껏 시간 외로 일을 해도 동전 한 닢 더 받은 적이 없는데 이런 제안은 처음이었다.

“어…….”

잠시 코이는 흔들렸으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돈보다 애슐리가 중요하다. 너무나 명확한 천칭의 무게에 코이는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말했다.

“괜찮아요, 쉬겠습니다.”

- 하아…….

주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곧 앙칼진 음성으로 내뱉었다.

- 넌 정말 제멋대로에 은혜도 모르는 애구나.

그는 욕설을 뱉은 뒤 전화를 끊어 버렸다. 코이는 당황해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주머니에 들어 있는 콘돔을 다시 한번 쓰다듬으며 그는 자신을 다독거렸다. 좋은 일만 생각하자. 즐거운 일이 앞으로 잔뜩 있을 거잖아.

애쉬만 생각해.

그를 떠올리면 저절로 입가가 허물어지고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아버지에게는 미리 친구 집에서 자고 올 거라고 말해 둘 생각이었다.

최근 아버지는 이전보다 부드러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술도 적게 먹었고 코이와 마주치면 무뚝뚝하게나마 식사는 했는지,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따위를 묻곤 했다. 물론 코이는 아직 그가 두려워 짧게 네, 아니요, 괜찮아요 정도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나마도 그에겐 너무나 큰 평화였다.

이게 다 애쉬 덕분이야.

그와 사귀고 난 뒤부터 좋은 일만 가득하다. 그는 신이 코이에게 보내 준 선물임이 틀림없다. 코이는 함박 미소를 지으며 휴대 전화의 달력을 찾아 남은 날짜를 확인했다.

이제 곧.

그는 휴대 전화를 가슴에 올리고 후우, 심호흡을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설레고 기다려지는 추수감사절이었다.

애슐리에게서 뜻밖의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는.

*

“본가에 간다고?”

갑작스러운 얘기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소리쳤다. 휴대 전화 건너편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미안해, 코이. 많이 기대했을 텐데.

“괘, 괜찮아.”

코이는 황급히 그를 위로했다.

- 추수감사절은 가족이랑 보내야지. 괜찮아, 나는. 정말이야.

“하아아…….”

애슐리의 입에서 또다시 끓어오르듯 한숨이 흘러나왔다. 코이를 그런 아버지와 단둘이 남겨 놔야 한다니 속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 하물며 잔뜩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무엇보다 자신이 먼저 그를 기대하게 해 놓고 파투를 내 버리다니 스스로에게 환멸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코이와 사귄 뒤로 몇 번이나 느꼈던 좌절감을 그는 또다시 실감해야 했다.

난 아직 미성년이야.

아무런 힘도 권리도 없다는 사실에 밀려드는 무력감을 애슐리는 그대로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아버지의 지시를 거역한다면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아마 그걸 보여 주기 위해서 애슐리를 팀에서 제외시켰을 것이다.

자신의 힘을 과시해서 애슐리가 저항하기 전에 일찌감치 짓밟아 버리려고.

효과는 확실했다. 애슐리는 그에게 반항할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한편으로는 졸업 때까지만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자는 생각도 있었다. 성인이 되기만 하면 뭐든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대학은 포기한다 치더라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만 한다. 코이를 위해서라도.

- 미안해, 코이.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금 사과하자 코이는 또다시 “괜찮아.”를 반복했다. 추수감사절 같은 때 코이를 더욱 외롭게 만들다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증오스러운 것은 역시 그 남자였다.

- 코이, 올해만이야. 내년부터는 꼭 같이 있자, 매년.

“……응.”

코이는 곧 대답했다.

“기대할게.”

- 그래.

고개를 끄덕인 애슐리가 화제를 바꿔 물었다.

- 추수감사절에는 아무 일 없는 거지? 나와 약속했었으니까.

“어…… 응.”

코이는 망설이다 그 말에 동의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르바이트라도 한다고 할걸……. 뒤늦게 아쉬움이 밀려와 마음이 무거워졌다. 분위기를 눈치챈 애슐리가 물었다.

- 왜 그래?

“응? 아, 저기.”

코이는 머뭇거리다 최대한 밝게 대답했다.

“아르바이트 가게 사장이 추수감사절에도 일해 달라고 한 걸 거절했었거든. 괜찮아, 나도 오랜만에 좀 쉬고…….”

한껏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자 잠시 조용히 있던 애슐리가 갑자기 제안했다.

- 그러면 우리 집에서 아르바이트하지 않을래?

“어? 너네 집?”

깜짝 놀라 묻자 애슐리가 그래, 하고 말을 이었다.

- 추수감사절부터 시작해서 휴가가 많잖아. 사람들도 종종 자리를 비워. 대신에 네가 일을 해 주면 어때? 그렇게 어려울 일은 없어, 수영장 수면에 뜬 이물질을 제거하거나 매일 정해진 방을 하나씩 정리하는 것 정도야.

잠시나마 그 거대한 저택을 전부 청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아득해졌던 코이는 곧 정신을 차렸다.

“하루에 방 하나?”

- 그래.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어…….”

물론이다. 하지만 너무 쉬운 게 문제였다.

“그게 아르바이트의 의미가 있어……?”

조심스럽게 물은 코이에게 애슐리가 선뜻 말했다.

- 당연하지. 돌아왔을 때 집에 먼지가 쌓여 있으면 나도 싫으니까.

물론 그렇겠지. 많은 사람들이 매일 깨끗이 청소를 해 언제나 반짝거리는 대저택을 떠올려 보면 그의 말은 너무나 타당했다.

“저기, 그럼…… 언제 오는데?”

코이가 다시 묻자 애슐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뭔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사이를 두었다가 그는 다시 돌아왔다.

- 열흘 정도 걸린대.

“열흘이나…….”

무심코 중얼거렸던 코이가 황급히 헛기침을 했다.

“저기, 그럼 어디로 가는 거야? 본가면…….”

후, 한숨 소리에 이어 애슐리가 대답했다.

- 동부로 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