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216)

99화

“추수감사절에?”

생각지 못한 말에 코이는 애슐리의 말을 반복했다. 애슐리는 웃으며 그래, 하고 덧붙였다.

“네게 다른 약속이 없다면 말이지만.”

“어, 없어. 당연하잖아.”

서둘러 말했던 코이는 곧 무안해져 고개를 숙였다.

“나한테 친구는 너밖에 없는 거 알면서…….”

“친구?”

애슐리가 곧바로 붙잡은 말꼬리에 코이는 서둘러 정정했다.

“나, 남자 친구.”

그제야 애슐리는 미소를 짓더니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 게이트 앞에 줄을 지어 서 있는 차들을 지나쳐 입주민 전용 게이트로 들어간 애슐리는 저택을 향해 차를 몰면서 물었다.

“추수감사절에 뭘 할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어…….”

코이는 잠시 생각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칠면조 요리 먹을 수 있어?”

“그래.”

선뜻 대답했던 애슐리가 피식 웃었다.

“그거 별로 맛없지 않아?”

“어…….”

사실 잘 모른다. 코이는 그 요리를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봤을 뿐 실제로 본 적도 없다.

“그, 그래도 추수감사절엔 칠면조 요리가 있어야 하잖아.”

“생일에 있는 케이크처럼? 그래, 알았어.”

애슐리는 이번에도 웃었으나 코이는 대꾸하지 못했다. ‘생일에 있는 케이크’ 또한 그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나를 전부 알게 되면 애쉬는 어떻게 생각할까……?

코이는 문득 떠올랐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쉬는 그런 걸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그러지 않을 거야. 날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의심하는 건 애쉬에게 실례야.

마음을 고쳐먹은 코이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나, 그 칠면조 요리 먹어본 적 없어.”

“그래?”

뜻밖에도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이번에 먹어 보면 다신 먹고 싶다고 안 할걸.”

코이를 보며 웃었던 그가 다시 정면을 응시하는 걸 보고 코이는 잠시 멍해졌다. 곧이어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르고, 그는 벅찬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정말?”

“그래,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마.”

“설마.”

코이가 까르르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 그를 흘긋 보았던 애슐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코이는 칠면조 요리가 처음이구나.

또다시 그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이 생겨났으나 곧 그것은 다른 감정으로 뒤덮였다. 앞으로 더 많은 걸 해 주면 된다. 모든 처음을 함께할 것이다.

“케이크도 만들어 달라고 할까?”

애슐리의 물음에 코이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초콜릿 케이크가 좋아.”

“그래, 그러자.”

이번에도 애슐리는 선뜻 대답했다. 코이가 웃는 게 좋았다. 그가 웃고 행복해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정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오늘도 고마웠어, 애쉬.”

언제나처럼 코이를 길가에 내려 준 애슐리에게 코이가 인사를 했다.

“추수감사절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

헤어지기 전 키스를 나누기 전에 먼저 말을 건네자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게 그의 허리를 안고 고개를 드는데, 그를 끌어안은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자고 가지 않을래?”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코이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으나 애슐리는 웃으며 말했다.

“밤새 영화도 보고 같이 놀자. 어때?”

물론 이것은 애슐리가 생각한 또 다른 이벤트였다. 코이와 처음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을 아주 멋지게 보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코이는 그저 멍하니 눈만 깜박거리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슐리가 다시 웃더니 다정하게 키스했고, 코이는 눈을 감은 채 열심히 그에 응했다.

“잘 가.”

“조심해서 가.”

헤어지기 싫은 마음을 억지로 참고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도 두 번이나 더 키스를 나눈 뒤에야 비로소 둘은 떨어졌다. 항상 그렇듯이 코이는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한 번이라도 돌아보면 다시 애슐리에게 달려가고 싶어질 테니까.

집에 도착한 뒤 비로소 그는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아버지가 오기 전에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옷을 빨아서 널어 둔 뒤 침대 위에 누웠다.

그제야 코이는 펄떡이던 심장을 다스리며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돌이켜 보자 또다시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추수감사절이라니.

코이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누군가와 함께 명절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아주 어릴 때는 온 가족이 함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일이었고, 그것을 ‘경험’이라고 하기엔 남아 있는 기억이 거의 없었다.

애쉬와 함께.

생각할수록 기분이 들뜨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고 가지 않을래?〉

애슐리의 음성이 선명하게 귓가에 되살아났다.

그 얘기는 그런 뜻이겠지?

다른 건 생각할 수 없었다. 벌써 둘은 사귄 지 두 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동안 애슐리는 코이에게 기껏해야 키스나 엉덩이를 만진 게 전부였다.

언젠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코이는 술렁이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고 다시 돌아누웠다.

이번 기회에 애쉬는 관계를 더 진전시키려는 건지도 몰라.

너무나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코이도 애슐리가 지나치게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둘은 이미 결혼까지 약속하지 않았던가. 고작 키스로 질질 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혼전 순결을 서약한 것도 아니고, 굳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 애슐리가 얼마나 건강한 10대 남자아이인지 코이는 두 눈으로 이미 확인까지 했는데.

하다못해 아나콘다를 만지는 것까지는…….

코이는 마른침을 삼키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사랑한다면 두려워해선 안 돼. 애쉬는 나를 위해서 지금까지 참아 줬잖아. 나도 이젠 용기를 내야지.

“후우우.”

떨리는 숨을 내쉰 코이는 드디어 결심했다. 추수감사절은 바로 다음 주였다. 서둘러야 한다. 그는 다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콘돔을 사자.

다음 날은 주말이었다. 마스크에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옆 마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 코이는 미리 찾아 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안을 살펴보았다.

그가 사려던 물건은 하필이면 계산대 앞에 있었다. 도저히 그걸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고르고 있을 용기는 나지 않아서, 코이는 몇 번이나 가게 안을 빙빙 돌았다. 물론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꼬마야, 너 뭘 사려는 거냐?”

갑자기 앞을 불쑥 막아선 거구의 그림자에 코이는 히익, 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가게의 직원이 험악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그그게, 그게요.”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점원의 등 뒤로 벽시계가 보였다.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 곧 아르바이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사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꿀꺽, 마른침을 모아 삼켰지만 좀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점원은 당장에라도 경찰을 부를 기세였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콘돔을 사려다 의심받아 경찰서에 갔다는 게 알려지면 망신을 당하는 건 물론이고 아버지에게 개처럼 맞을지도 모른다.

어서 말해, 어서, 어서 말하라고!

“그그, 그러니까, 저기.”

“뭐냐고.”

점원이 다시금 으르렁거렸다. 코이의 머릿속이 더욱 꼬이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말해야 돼, 말해야 돼, 어서 말해!

그 순간 뒤에서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패닉에 빠진 코이가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요, 용서해 주세요(Condon)!”

“뭐라고?”

막 가게에 들어온 손님과 점원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코이는 사색이 되어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

“으하하하하하.”

점원이 배를 잡고 웃으며 계산대를 두드려 댔다. 코이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콘돔을 진열해 놓은 선반 앞에 서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막 들어왔던 손님은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로, 그런 코이의 옆에 서서 친절하게 각각의 제품을 설명해 주었다.

“이건 딸기 향이 나는 거란다. 질감도 아주 좋고 잘 나온 제품이야. 바나나는 별로였단다. 이렇게 돌기가 나 있는 건 나중에 사용해 보렴. 초보에겐 기본이 제일이지. 모든 게 그래…….”

“퍼거슨 씨, 그렇게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눈물까지 닦아 내며 점원이 말했다. 코이는 고개만 푹 숙인 채 네, 네 하고 작게 웅얼거렸다. 할아버지는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 어떤 게 제일 마음에 드니?”

사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렇게나 많은 종류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큰 걸 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코이는 성 교육 수업에서 배웠던 걸 떠올리며 물었다.

“저, 저기…… 사이즈에 잘 맞는 게, 우선이죠?”

“그럼, 물론이지. 부끄러워하지 말고 고르렴. 괜찮아, 콘돔을 쓴다는 건 아주 책임 있는 행동이란다. 여자 친구를 안심시켜 줘야지.”

할아버지가 코이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의 격려에 그나마 용기가 생겼다. 그의 친절한 설명을 되새기며 진열되어 있는 콘돔을 둘러보았던 코이는 마침내 하나를 결정했다.

“오, 그래. 좋은 걸 골랐구나.”

딸기 향 콘돔을 고른 코이를 할아버지가 칭찬했다. 코이는 조금 자신감을 얻어 점원을 향해 물었다.

“이게 제일 큰 사이즈인가요?”

코이의 물음에 점원이 잠깐 그의 아래를 훑어보더니 대답했다.

“그 정도면 충분할 텐데?”

물론이다. 코이가 사용하는 거라면 이걸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호, 혹시.”

코이는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다음 말을 꺼내는 데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다.

“……아나콘다가 들어갈 정도로 큰 콘돔도 있나요?”

갑자기 침묵이 찾아오고, 두 남자의 시선이 코이의 바지 앞섶에 집중되었다. 코이는 그대로 가게를 뛰쳐나가 어딘가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숨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