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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98/216)

98화

“출전이 금지됐다고요?”

갑작스러운 통보에 애슐리의 목소리가 저절로 격앙되었다. 감독은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몇 개 주만 규정이 바뀌었어. 발현한 알파나 오메가는 주니어든 프로든 경기에 뛸 수 없다는 거야.”

“왜, 갑자기.”

간신히 말을 했던 애슐리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갔다. 감독은 다시금 깊은숨을 내뱉은 뒤 그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어쨌든 그렇게 되어서, 미안하구나. 나도 네 빈자리가 무척 아쉽다만…….”

애슐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입니까?”

감독은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내년부터야.”

곧 추수감사절이었다. 그러면 새해까지 경기가 없다. 그리고 그 뒤엔 시즌 결승이 있을 텐데, 여기까지 와서 경기에서 배제되다니.

“……하아.”

애슐리는 끓어오르는 속을 억누르려 심호흡을 했다. 애꿎은 감독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이 바뀐 규정으로 난처하게 된 팀은 버팔로만이 아닐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경기가 마지막이 되겠네요.”

“어…… 그게 말이다.”

감독은 눈썹 위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네 자리를 대신할 녀석을 지금 찾아 놨는데, 그 녀석이 팀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다음 경기부터 뛰기로 했다. 결승전에 바로 투입하기는 아무래도 무리지 않겠니.”

애슐리는 할 말을 잃고 감독의 얼굴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렇게 갑자기 퇴출이라니. 고등학교 아이스하키 팀 따위는 프로도 아니고 그저 취미 생활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뛰고 있었다. 방과 후 당연하게 계속되었던 일과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함께 뛰던 친구들의 얼굴이 아른거려 그는 그만 한 손으로 두 눈을 덮고 말았다. 수많은 감정이 밀려들었지만 모두가 무의미했다. 애슐리는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미안하다.”

감독이 고개를 떨구고 사과했다. 그로서도 곤란할 것이다. 시즌이 한창인데 에이스가 빠지다니. 애슐리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물러났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애슐리가 인사를 하자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내밀었다. 애슐리는 그와 간단히 악수를 나눈 뒤 사무실에서 나왔다.

어쩐지 오늘은 연습이 없더라니.

신이 나서 먼저 집으로 돌아간 친구 녀석들을 떠올리자 씁쓸해졌다. 혼자 남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경기에 대해 코멘트를 할 게 있는 것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퇴출이라니. 이런 일을 예상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

답은 곧 나왔다. 때마침 울린 휴대 전화의 벨 소리를 듣고 발신자를 확인한 애슐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감독과는 얘기가 잘되었나요?

건너편에서 들려온 사무적인 음성에 애슐리는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야? 규정을 바꾼 건.”

아버지의 비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 어차피 내년부터는 그만둘 생각이었잖아요?

그런데 굳이 규정을 바꿔 가면서까지 ‘그만 두게 만든’ 이유가 뭐냔 말이지.

답은 알고 있다. 그 남자는 그저 애슐리의 인생을 멋대로 헤집고 싶을 뿐이다.

넌 내 손안에 있다는 걸 과시라도 하듯이.

“아버지의 날에 꽃이라도 보낼 걸 그랬나?”

애슐리가 빈정거렸으나 그녀는 여전히 차분하게 대답했다.

-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더 위로가 된다면 맞는다고 해 드리죠.

애슐리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참고 대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낼 상대는 아버지였다. 물론 애슐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아버지를 만나는 것만큼 불필요한 일은 없을 테니까. 대신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냉정하게 말문을 열었다.

“어쨌든 아버지 뜻대로 됐으니 축하한다고 전해 드려. 왜 굳이 시즌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는지는 뻔히 알겠지만.”

-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기계적인 응답에 애슐리는 한껏 비꼬아 물었다.

“다시 아이스하키 팀에 넣어줘.”

- 안 됩니다, 아시겠지만.

간단히 거절한 그녀는 “또 없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마치 놀리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그저 자신이 맡은 일을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애슐리 역시 알고 있었다.

“없어.”

-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전화가 끊기고, 애슐리는 잠시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다 다시 그것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긴 복도에 울려 퍼지는 자신의 발소리가 어쩐지 처량하게 들렸다.

*

“애쉬!”

여느 때처럼 치어리딩 팀의 연습이 끝난 뒤 코이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레벌떡 달려왔다. 차에 기대어 서서 그를 기다렸던 애슐리는 활짝 두 팔을 벌렸고, 코이는 당연하게 품에 뛰어들었다. 마치 자석의 양극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둘은 찰싹 맞붙었다.

“보고 싶었어.”

애슐리가 속삭였다. 코이는 그를 온힘을 다해 끌어안고 두꺼운 가슴에 뺨을 비볐다.

“나도.”

애슐리가 웃으며 그의 정수리에 얼굴을 문질렀다. 계속해서 이렇게 있고 싶었다. 하지만 어서 떠나지 않으면 누군가 그들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많이 기다렸지? 오늘은 연습이 없었다면서. 먼저 가도 괜찮았는데.”

서둘러 조수석에 오른 코이는 애슐리가 운전석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그를 괜히 기다리게 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운을 떼자 애슐리는 시동을 걸며 대답했다.

“별로 안 기다렸어. 감독님이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어, 그래? 무슨 얘기?”

경기에 관한 건가, 하고 생각하는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나 다음 경기부터는 못 나가게 됐어.”

“뭐? 왜?”

너무나 태연히 흘러나온 말에 코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코이를 내버려 두고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규정이 바뀌어서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한 선수는 경기에서 뛸 수 없대. 뭐 여기랑 몇 개 주만 그렇게 된 모양인데, 아무튼 규정에 어긋나니까 난 더 이상 안 되는 거지.”

“그런…….”

코이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애슐리가 아이스하키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는 알고도 남았다. 경기를 뛸 때마다 그는 평소보다 더 빛났고, 행복에 차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니.

“갑자기 왜 그런 규정이 생긴 거야? 지금까지는 괜찮았잖아.”

“뭐…….”

애슐리는 신호를 살피는 척 시간을 끌었다가 대답했다.

“나도 몰라.”

“너무하다, 정말.”

코이는 진심으로 속상해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규정이었다. 알파나 오메가라는 사실이 경기에 얼마나 영향을 준다고 못 하게 하는 걸까.

“이건 차별이잖아.”

코이가 그답지 않게 분통을 터뜨렸다. 평소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는 그였지만 애슐리에 관해서만은 참지 않았다.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처사였다.

“애쉬, 소송을 걸면 안 되는 거야? 발현했다고 경기에 뛰지 못하게 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애슐리는 감독에게서 이 거지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이후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걸 수는 있지만.”

자신을 위해 화를 내는 코이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저절로 입가가 허물어졌다.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난 마흔이 넘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될걸.”

“아…….”

애슐리의 말에 코이는 또다시 풀이 죽었다. 애슐리는 그런 코이 덕에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졌지만 계속해서 그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하고 고민하던 코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엉덩이 만질래?”

“푸핫.”

웃음이 터져 나와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놀란 코이가 황급히 물었다.

“괘, 괜찮아?”

애슐리는 사고가 나지 않도록 차의 속도를 줄였으나 얼굴에 머금은 웃음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네 엉덩이를 만지면 기분이 좋아질까?”

여전히 웃음이 가득한 음성에 코이는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아, 안 돼?”

물론 좋아지겠지. 애슐리는 생각했으나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네가 내 아나콘다를 만지는 건 어때?”

코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만 찢어질 듯이 크게 뜨는 것을 보고 애슐리는 가벼운 어조로 덧붙였다.

“농담이야.”

그렇게 말하고 애슐리는 코이의 손을 잡고 있던 한 손을 풀고 대신 그의 허리로 가져갔다. 코이는 그가 만지기 좋게 슬쩍 한쪽 엉덩이를 들었고, 애슐리는 한 손에 딱 들어맞는 그의 엉덩이를 천천히 주물럭거렸다.

“기분은 좀, 어때?”

조심스러운 물음에 애슐리는 “좋아.” 하고 대답했다. 사실 그가 원한 건 도롯가에 차를 세우고 코이에게 키스하는 것이었지만 모처럼 코이가 제안한 것을 굳이 거절하는 것도 좋지 못했다. 키스는 다음에도 할 수 있으니까.

한편으로 코이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슐리가 엉덩이를 만지는 것에 이제 익숙해져 그쯤은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아나콘다 공격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왜 그걸 잊고 있었지? 애슐리는 단지 참고 있는 것뿐인데.

지금이라면 그쪽이 더 위로가 될지도 몰라…….

문득 떠올렸을 때, 애슐리가 불쑥 말을 꺼냈다.

“코이.”

“응.”

서둘러 대답하자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추수감사절 때, 우리 집에 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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