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으아악!”
맨살을 거머쥔 손에 코이가 높은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곧이어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은 그는 크게 뜬 눈으로 애슐리를 올려다봤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이. 하지만 애슐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두 손을 다 넣고 코이의 양쪽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한탄했다.
“아, 헤어지기 싫다.”
다음 수업이 다가오고 있었다. 코이는 얼굴이 빨개져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애슐리가 더듬고 있는 엉덩이를 내려다봤다. 그의 말에 공감했지만 엉덩이에 신경이 쓰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코이의 반응에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코이, 넌 아무렇지도 않아?”
“으힉!”
벌이라도 주는 듯 힘을 주어 꽉 쥔 엉덩이에 코이가 다시금 자지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하아, 하아, 저절로 가빠진 숨을 어쩌지 못하고 헐떡거리며 바들바들 떨던 코이는 눈앞이 핑핑 도는 것을 느끼며 머뭇머뭇 대답했다.
“나, 나도, 시, 시시, 싫어.”
“그렇지?”
애슐리가 엉덩이를 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렇다고 해서 놓아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대신 부드럽게 주물럭거리며 머리 위에서 한숨을 내쉰 애슐리가 중얼거렸다.
“계속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나, 도.”
이번에는 코이도 늦지 않게 대답했다. 그는 자꾸만 엉덩이로 향하려는 신경을 귀로 집중하려 애쓰며 애슐리의 말에 반응하려 애썼다.
“나도, 헤어지지 않고 계속 함께 있고 싶어.”
이번엔 더듬지 않고 말하자 애슐리가 코이를 내려다봤다.
“정말?”
환해진 얼굴에 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헤어짐이 아쉬운 것은 코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날 헤어지고 난 뒤 얼마나 허전하고 외로웠는지 모른다. 애슐리도 그렇다니 그의 마음에 작은 용기가 생겼다.
“저기,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애슐리가 손을 멈추고 그를 내려다봤다. 그래 봤자 여전히 엉덩이 위에 올려져 있는 두 손에서 신경을 거두려 애쓰며 코이가 말을 이었다.
“저…… 우리, 졸업하면…….”
애슐리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코이, 너도 그런 생각을 했어?”
“어? 어…….”
얼떨결에 대답했던 코이가 뒤늦게 눈을 활짝 떴다.
“너, 너도?”
애슐리가 곧이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렇구나.”
벅찬 기쁨에 빛나는 코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애슐리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역시 사랑하는 사이라 마음이 통하는구나.
“코이.”
“애쉬.”
둘은 거의 동시에 다음 말을 내뱉었다.
“결혼하자.”
“같이 살자.”
단숨에 말을 쏟아 낸 둘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
“……뭐?”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다음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코이와 미간을 찌푸린 애슐리가 서로를 응시했다. 뒤늦게 각자의 말을 알아들은 그들의 표정이 돌변했다.
“겨, 겨겨겨 결혼?”
금세 새빨갛게 달아오른 코이가 말을 더듬으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애슐리는 더더욱 마음이 상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코이는 지금 그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폭탄선언에 놀라 그만 자신도 모르게 물러날 뻔했지만 애슐리가 곧바로 엉덩이를 붙잡아 실패했다.
“왜? 나와 결혼하기 싫은 거야?”
애슐리가 따지듯 물었다. 여전히 그의 팔 안에 갇힌 채로 코이는 당황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게 아니라.”
우린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코이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어쩌지 못하고 다급하게 덧붙였다.
“결혼이라니, 아직 이른.”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애슐리가 말꼬리를 잡아채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이르다니? 나하고는 결혼을 안 하겠다는 거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코이는 열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얘기는 아니지만, 하고 그는 황급히 머릿속을 정리해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내놓았다.
“저기, 아, 안 하겠다는 건 아닌데, 너무 급하니까, 이, 일단 같이 사는 것부터…….”
“그래서, 여차하면 나랑 헤어지겠다는 거야? 코이, 정말로 진심이야?”
“아니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코이는 궁지에 몰려 버렸다. 무슨 말을 해도 애슐리는 빈틈을 찾아내 공격을 했다. 이게 바로 버팔로 고등학교 아이스하키 팀 에이스의 실력이구나. 코이는 실감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빠져나갈 길이라고는 없었다. 코이는 애슐리와 헤어질 생각도 없었고 결혼하기 싫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솔직히 털어놓자 애슐리는 굳은 얼굴로 명령했다.
“생각해, 그럼. 지금 당장.”
“어…….”
“코이, 빨리 대답해. 나랑 결혼할 거야 말 거야?”
“하하하 할게!”
박력에 밀려 코이는 그만 다급하게 소리치고 말았다. 애슐리가 뚫어져라 코이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코이는 부랴부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말했다.
“결혼 하, 할게, 너랑 결혼할게.”
“코이.”
그제야 애슐리의 얼굴이 풀리며 환한 미소가 번졌다. 엉덩이에서 떨어져 나간 손이 코이의 몸을 끌어안더니 빈틈없이 꽉 붙잡았다.
“내 거야, 평생.”
“응, 으응.”
코이는 얼떨떨해하며 대답했다. 자신이 결혼을 승낙했다는 게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더 믿어지지 않는 건 애슐리가 자신에게 청혼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나랑 살고 싶어? 평생?”
코이가 조심스레 물은 말에 고개를 든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물론이지, 넌 아냐?”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 어느 때보다 애슐리는 진심이었다. 그 사실을 실감한 순간 코이의 맥박이 조금씩 빨라졌고, 급기야 온몸이 터져나갈 것처럼 들떴다.
“나도, 그래.”
코이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도 너랑 살고 싶어. ……평생.”
뒤의 단어는 너무나 벅차 입에 담는 것도 힘들었다. 그 말을 들은 애슐리가 만면에 가득 웃음을 떠올리더니 고개를 기울여 코이에게 키스했다. 코이는 눈을 감고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사랑해, 애쉬.
벅찬 감동에 손끝까지 저려 왔다. 그는 온몸을 애슐리에게 밀착하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뇌었다.
사랑해. 사랑해, 애쉬.
수업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귓가에는 벌써 웨딩 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애슐리는 코이의 입안을 핥고 빨아들이며 몇 번이고 했던 다짐을 되새겼다. 품 안에 들어온 이 작은 몸을 죽을 때까지 놓치지 않을 거라고.
*
“버팔로!”
앨의 기합 소리에 치어리더들이 뒤따라 함성을 지르며 대열을 정비했다. 음악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코이는 열심히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치어리딩 팀이 아무 부상자 없이 홈커밍 경기 응원을 무사히 마쳤다.’
소문은 알음알음 퍼져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단원의 지원이 이어졌다.
물론 새 단원이 들어오자 코이의 역할은 즉시 끝났다. 하지만 에리얼을 비롯한 치어리딩 팀 아이들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네가 해 줄 일이 있어.”
코이에게는 치어리더로서가 아닌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바로 치어리더들의 뒤치다꺼리였다. 응원 도구를 정리하거나 음악을 준비하거나 하는 허드렛일들이었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했고, 새로운 사람을 뽑느니 그들은 익숙한 ‘자매’를 선택했다.
그것은 코이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 활동을 이어 간다면 점수는 무난하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다른 누구에게 얼마든지 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코이를 선택했다. 아마 코이의 사정을 알고 배려해 준 게 분명했다.
코이는 기쁘게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였고, 수업이 끝나면 짬짬이 그들의 연습 시간에 맞춰 열심히 뒷수발을 들었다.
“자, 여기 물.”
미리 차갑게 식혀 놓은 페트병을 하나씩 나눠 주자 한창 연습하다 지친 아이들이 숨을 몰아쉬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코이.”
“아, 살 것 같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개운한 소리에 코이는 뿌듯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홈커밍 파티도 끝나고, 시즌은 한창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버팔로 고등학교는 이번 해에도 역시나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올해는 모두들 특히 더 열심히 했으니까.
코이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애슐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그 후로 잘되어 가고 있었다. 너무나 잘되어 가서 불안할 정도로.
치어리더들의 연습이 끝나면 잠시 뒤 아이스하키 팀의 연습도 끝난다. 코이는 시간에 맞춰 뒷정리를 한 후 부랴부랴 애슐리의 차로 향했다.
“애쉬!”
코이가 소리치자 차에 기대어 서서 그를 기다리던 애슐리가 몸을 바로하고 환하게 웃었다. 활짝 벌린 팔에 코이는 주저 없이 뛰어들어 가 안겼다. 막 샤워를 끝낸 애슐리의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코이를 어서 만나고 싶어 부랴부랴 샤워를 마치고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머리 말리고 와도 되는데.”
“금방 말라.”
애슐리는 그렇게 말한 후 코이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코이는 기쁘게 웃으며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행복해.
“가자.”
고개를 든 애슐리가 말했다. 코이는 응, 하고 환한 얼굴로 애슐리의 차에 올라탔다. 곧이어 애슐리가 차를 출발시키고, 당연하다는 듯이 한 손으로 코이의 손을 잡았다. 일상적인 행복이 그들 사이에 그렇게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