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하아, 하아.
코이는 숨이 턱에 닿은 채 모터홈으로 돌아왔다. 떨어지기 싫어 몇 번이고 키스를 반복하면서 너무나 오래 시간을 지체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고 미루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옮기는 그를 보고 결국 애슐리가 먼저 결단을 내렸다. 이러다가는 바로 그의 아버지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언젠가 스스로 밝힐 때가 오겠지만 지금은 절대 안 된다.
“코이, 집까지 바래다줄게.”
차에서 몸을 떼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코이는 기겁을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냐. 혼자 갈게, 혼자 갈 수 있어!”
“헤어지기 싫어서 그래.”
애슐리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코이의 집 앞까지라도 함께 걸으며 헤어지는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물론 그것은 코이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현실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창피하단, 말이야.”
코이는 어렵게 고백했다.
“우리 집, 정말 못살아. 보여 주기, 싫어.”
간신히 털어놓은 코이는 결심을 하고 그를 올려다봤다.
“혼자 갈게. 이번엔 정말 갈 테니까.”
코이는 다시 한번 애슐리에게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이번엔 돌아보지 않고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달렸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을 때, 천만다행히도 아버지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불이 꺼져 있는 모터홈으로 들어가 급히 샤워실로 향했다. 한 사람이 간신히 설 수 있는 공간이 전부인 샤워실에서 그는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옷을 벗고 먼저 세탁을 했다. 비누를 묻혀 손으로 벅벅 문지르며 셔츠를 빤 후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까지 마찬가지로 빨래를 끝낸 다음에야 비로소 몸을 씻기 시작했다.
학교 샤워실에서 씻었는데도 비누칠을 전신에 두 번이나 하고 머리를 또 감았다.
막 수전을 잠갔을 때, 문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돌아온 것이다.
코이는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선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가 취해 있다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쪽이 좋다.
뒤늦게 그는 급하게 들어오느라 수건도 갈아입을 옷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해하며 두리번거리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가까이에서 멈췄다. 코이는 귀를 바짝 곤두세운 채 움직임을 멈추고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두려움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 순간 코이는 두 눈을 꼭 감고 가슴 깊은 곳에서 애슐리의 이름을 불렀다.
도와줘, 애쉬.
“……으흠.”
간절히 되뇌었을 때, 얇은 샤워실 문 밖으로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코이는 화들짝 놀라 또다시 굳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코이, 씻고 있니?”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자 코이는 멈칫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그는 잠시 멍해졌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다시 그를 불렀다.
“코이?”
“어, 어, 네, 네.”
당황해 말을 더듬으며 황급히 대답한 그는 대충 빤 옷들을 품에 안고 샤워실의 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문에서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 서서 코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흠뻑 젖어 있는 코이의 모습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니, 코이?”
“어, 어, 네.”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하고 만 코이는 황급히 덧붙였다.
“괘, 괜찮아요. 씨, 씻으세요, 전 다 씻었으니까…….”
허겁지겁 그를 스쳐 간 코이는 서랍에서 수건을 꺼내 급히 몸을 문질렀다. 뒤늦게 한기가 느껴져 잘 때 입는 낡은 셔츠와 반바지를 서둘러 걸쳤다.
그리고 그는 다시 젖은 옷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대충 빨랫줄에 옷을 널어 둔 뒤에야 비로소 조금 정신이 들었다.
술은 안 드신 거 같은데…….
코이는 망설이다 자신이 막 나왔던 모터홈을 돌아봤다. 어두운 전등이 깜박거리는 집 안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마른침을 삼켰지만 그의 선택지는 달리 없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조심스레 움직여 안으로 향했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아버지가 움직이는 것이 어슴푸레한 불빛에 비쳐 보였다. 코이는 잠시 문 앞에 멈춰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불빛 아래서 한동안 서성거리는 것 같더니 이윽고 샤워실로 사라졌다.
지금이야.
코이는 황급히 모터홈으로 들어가 곧바로 자신의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가슴은 계속해서 두근거렸다.
샤워실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유독 요란하게 귀를 때렸다.
아버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그는 침대 위에 웅크려 있는 코이를 발견하고 멈칫했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코이는 심상치 않은 침묵에 또다시 불안해졌다.
……후.
문득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달각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웬일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돌아오자마자 술병을 꺼내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그리 길지 않았다. 언제나 만취 상태가 되어 곯아떨어졌던 아버지는 글라스에 따른 술을 두 잔도 마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자신의 침대로 가 누운 다음에야 비로소 코이는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괜찮니, 코이?〉
뒤늦게 아버지의 음성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다니, 너무 이상했다.
그에게 코이는 공기나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있어도 없는 것과 매한가지였고 가끔 그가 코이를 상대할 때는 예외 없이 술에 취해 폭력을 행사할 때뿐이었다.
그래서 코이는 언제나 그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애썼고 최대한 없는 존재처럼 지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어서 어른이 되어 독립하는 것. 대학 또한 그가 독립할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였다. 성적만 잘 맞춘다면 장학금이라거나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성적이 잘 나온다면 얘기지만.
망쳐 버렸던 대입 시험이 떠올라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괜찮아, 다시 보면 돼. 그동안 열심히 돈을 모았잖아.
물론 그 돈은 모두 자신의 독립 자금이었다. 대학에 갈 등록금으로는 터무니없이 모자라지만 쓰러져 가는 집의 월세 정도는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차를 사도 좋다. 낡고 오래된 차라도 있기만 하면 그 안에서 생활도 하고 일을 하러 다니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면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게 될 거야.
이렇게 두려워하며 잠을 청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잠들려 애썼다. 하지만 눈을 감자 저절로 생각은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애쉬 이름을, 불렀어.
심장이 조심스럽게 콩닥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샤워실 안에서 혼자 두려움에 떨며 자신도 모르게 불렀던 이름을 되새기자 가슴이 두근거려 저절로 숨이 가빠졌다.
예전에는 이럴 때 부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아버지의 매질이 끝나기만 바라야 했던 지난날을 떠올려 보면 이 상황은 꿈만 같았다. 내게도 이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생겼어.
애쉬, 애쉬, 애쉬.
이름을 되뇔수록 더 가슴이 뛰고 그를 보고 싶어졌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나 그리워지다니.
이래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사는 건가 봐.
코이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온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맥박 소리에 온몸이 진동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졸업하면, 애쉬와 같이 살 수 있을까.
*
결혼해야겠어.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애슐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코이를 그렇게 보낸 뒤 혼자 집으로 와 곧바로 샤워실로 향했으나 내내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코이한테 청혼하자. 헤어지지 않고 내내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야.
자신이 코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도 그것뿐이었다. 결혼하면 코이를 감금할까 말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결혼반지의 의미란 애초에 구속을 뜻하는 거니까.
코이가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거야.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위험한 환경에서 합법적으로 코이를 탈출시킨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더 이상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함께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저릿할 정도로 강한 쾌감이 느껴졌다.
애슐리는 눈을 감고 물줄기를 맞으며 허물어지는 입꼬리를 어쩌지 못한 채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결혼이란 얼마나 완벽한 제도인가.
그는 인간이 만들어 낸 이 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 역시 인간이므로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애슐리는 어느새 결혼반지는 어디서 사야 할지, 신혼여행을 어디로 가면 좋을지 등등을 두서없이 떠올리다 종내 한적한 시골의 2층집에 개와 고양이를 한 마리씩 키우며 노년을 보내는 둘의 모습까지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
“음음음, 음음음음.”
아침에 눈을 뜬 코이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콧노래에 고개까지 끄덕이며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아침이 이렇게 설레고 기분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는 일상적인 모든 것들이 온통 그를 들뜨게 했다.
발걸음도 가볍고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는 모습에 그만 부끄러워졌으나 싫진 않았다. 서둘러 집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코이.”
순간 그토록 행복했던 기분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코이는 잊고 있던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는 아직 침대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로 멈춰 섰던 그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반쯤 몸을 일으킨 아버지가 그를 보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