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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93/216)

93화

“어, 응.”

코이는 힘껏 젓던 고개를 멈추고 시선을 고정했다. 애슐리는 똑바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당부했다.

“네 아버지가 무슨 이유로든 널 위협하거나 하면 즉시 연락하고 내 집으로 와. 알겠지?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게.”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물러날 수 없었다. 애슐리는 어떻게든 코이에게 확답을 받아야 했다. 

“응?” 하고 다시금 재촉하는 말에 한동안 눈만 깜박이던 코이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코이는 어쩔 수 없이 거듭 다짐했다.

“그렇게 할게.”

“그래.”

그제야 애슐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표정을 풀었다. 어쨌든 그가 납득해 주어서 다행이다. 코이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대처 방법은 아무래도 동의할 수 없었다.

“애쉬, 그래도 내가 널 찼다고 하는 건…….”

“코이.”

조심스레 꺼낸 말을 애슐리가 가로막았다.

“이미 끝난 얘기야, 이 방법 말고는 없어.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네가 대안을 제시해 봐.”

코이는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가 날 찼다고 하면?”

“내가 고백했는데?”

즉시 튀어나온 반박에 코이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애슐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고백해 놓고 내가 널 차면 정말 쓰레기다, 안 그래? 그게 더 나쁜데?”

“어…….”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코이는 얼굴이 빨개져 미안, 하고 작게 사과했다. 그런 그가 귀여워 애슐리는 다시 입술에 키스했다. 부드럽게 닿았던 입술을 슬며시 떼자 코이가 그새 몽롱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애슐리는 미소를 지으며 슬쩍 그의 입술을 핥았다. 

코이가 금방 온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에리얼의 경우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있고 굳이 정정하는 것도 우스워 그냥 내버려 뒀지만, 이제 자기 입으로 자기가 차였다고 떠들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것도 꽤 볼썽사납긴 했다. 하지만 지금 코이의 얼굴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는 있었다.

알아, 코이?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뿐이야.

짓궂게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문 뒤 물러난 애슐리가 이번에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코이, 네 아버지를 신고할 생각은 없어?”

그때까지 멍해 있던 코이의 표정이 곧 현실로 돌아왔다.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난, 시설에 가게 돼.”

공부를 계속하지도 못할 거고 대학 진학도 불가능해진다. 무엇보다 애슐리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애슐리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강요하지 못했다.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를 그런 위태로운 상황에 던져 놓을 수밖에 없다니, 애슐리는 속이 타들어 갔다.

만약 우리가 어른이었다면 지금 널 데리고 달아났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잘난 척해 봤자 애슐리는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단지 부자 아버지를 둔 것뿐, 부와 권력은 그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고작해야 전화하고 집으로 오라니.

애슐리는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실감하며 자기혐오에 빠져들었다.

“미안해, 코이. 지켜 주지 못해서.”

한탄하듯 중얼거린 말에 코이는 즉시 부정했다.

“아냐.”

그는 더없이 진지하게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난 너만 있으면 돼.”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애슐리는 웃음이 나왔다. 자조감이 섞인 웃음을 지으며 애슐리가 속삭였다.

“나도 그래.”

이번에는 입술이 닿기 전에 먼저 코이가 눈을 감았다. 

애슐리는 그에게 입술을 겹치면서 혀를 밀어 넣으려 시도해 봤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든 그가 코이의 입술에 묻어 있는 타액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주며 물었다.

“코이, 네가 냄새를 맡지 못하는 건 혹시 아버지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조심스레 말을 고르는 애슐리의 모습에 코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아버지한테 맞아서 이렇게 된 건.”

“그러면…….”

더 물으려던 애슐리는 입을 다물었다. 코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굳이 캐묻지 말자. 어쩌면 코이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상처일지도 모른다. 

애슐리가 발현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의 곁에 남기로 결심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코이는 지금까지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로 결심하고 애슐리는 그를 놓아주었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코이.”

그는 다소 쉬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더 늦으면 아버지가 알게 될 거야. ……지금, 너한테 내 페로몬 향이 엄청나게 묻어 있어.”

“그, 그래?”

코이는 당황해 자신의 팔을 코로 가져갔다. 반사적으로 코를 킁킁거렸던 그는 자신이 아무런 향기를 맡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다시 팔을 내렸다.

“저기, 그럼…… 갈게.”

“그래.”

코이는 한 번 더 애슐리를 바라본 뒤 차의 문을 열었다. 조수석에서 내리는 그를 따라 애슐리 또한 운전석에서 나왔다. 의아해하며 인도에 멈춰 선 코이를 마주 본 애슐리가 말했다.

“이번엔 내가 널 보고 있을게.”

항상 멀어지는 애슐리의 차를 보는 것은 코이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애슐리가 한 말에 코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애슐리가 자신의 뒷모습을 봐 준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벅차 저절로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애쉬.”

“잘 가, 코이.”

애슐리가 한 손을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코이 또한 활짝 웃은 뒤 돌아섰다. 

누군가 자신을 뒤에서 지켜봐 준다는 게 얼마나 안심이 되는 일인지 그는 처음 알았다.

애슐리가 그곳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코이는 그 어느 때보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몇 걸음 가다 뒤를 돌아보았는데 여전히 애슐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는 얼굴에 코이는 다시 돌아섰다가 또 몇 걸음 가지 않아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애슐리는 언젠가 보았던 영상을 떠올렸다. 상처 입은 야생 동물을 방생시킬 때 모습이 딱 저랬다. 

몇 번이고 돌봐 준 사람을 돌아보던 새끼 동물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을 때, 코이가 또다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애슐리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안심하고 가라는 듯이.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코이는 잠깐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다짜고짜 온 힘을 다해 달려오는 그를 보고 애슐리는 의아해져 차에 기대어 서 있던 몸을 바로 했다.

“왜…….”

무슨 일인지 물으려 입을 연 순간, 바로 앞까지 달려온 코이가 발돋움을 해 뛰어올랐다.

눈을 크게 뜬 애슐리의 목을 꼭 끌어안고 그대로 입술에 키스했다.

애슐리는 흔치 않게 당황했다.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했다. 코이가 먼저 키스라니. 그것도 저기서부터 달려와서 나한테 뛰어들었어.

뇌가 정지한다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한 채 그저 멍하니 눈만 휘둥그렇게 뜬 애슐리에게 꾸욱 입술을 눌렀던 코이가 뒤로 물러났다. 

그의 발이 바닥에 닿으면서 저절로 팔이 풀리고, 둘은 잠자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금세 코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한 짓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그 순간 애슐리가 그의 팔을 잡아 곧바로 끌어당겼다. 힘없이 끌려가 버린 코이를 품에 안은 애슐리가 그대로 다시 입술을 겹쳤다.

아.

덮칠 듯이 몸을 기울인 애슐리 탓에 크게 허리를 젖힌 코이가 무심코 입술을 벌렸고, 애슐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으.”

맞물린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입 안에 들어온 혀가 난잡하게 그의 혀를 문지르고 핥아 올렸다. 

코이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온몸을 긴장시켰다. 타액이 뒤섞이는 미끈한 감각에 정신이 완전히 나가 버렸다. 

거친 숨이 연신 흘러나와 저절로 어깨와 가슴이 들썩거렸다. 

애슐리는 그의 혀를 혀로 감아 애무하며 한 손을 내려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동시에 코이가 바짝 긴장했다. 

만약 한 팔로 허리를 끌어안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좋아해, 코이.”

코이의 아랫입술을 지근거리며 애슐리가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코이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코이는 머뭇거리다가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그의 목뒤로 가져갔다.

“으응……!”

코이가 애슐리의 목을 끌어안는 순간 갑자기 애슐리가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부서져라 강하게 끌어안았다. 

신음을 참지 못해 벌어진 입 안으로 그가 다시 혀를 밀어 넣었다. 입 안에서 혀가 뒤엉키며 입술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전신을 애슐리에게 밀착한 채 코이는 정신없이 키스에 빠져들었다.

이게, 정말로 키스구나.

몽롱한 가운데 그는 간신히 깨달았다. 지금껏 애슐리가 코이를 얼마나 봐줬는지, 그리고 그가 마음먹는다면 코이를 뼈까지 발라먹는 건 일도 아니라는 사실 또한.

그렇게 생각하자 코이는 두려움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편 가슴 한구석이 기대로 떨리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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