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 화 (92/216)

92 화

"……뭐?"

애슐리는 잠시나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 오늘 하루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코이의 치어리딩 유니폼을 보고 화를 냈던 것, 2달러를 주는 코이,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이로 승리했던 경기, 모두의 앞에서 키스하고 고백했던 일, 드디어 코이가 마음을 인정하고 사귀게 된 것까지.

마지막에 있었던 한 시간의 장렬한 자위는 삭제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모두 없었던 걸로 하자고? 

방금 전 함께 식사를 하고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손까지 잡고 있었는데?

운전하는 동안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남은 손으로 코이의 손을 쥐고 있었던 애슐리는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릴 들은 거지?

“……끝내자는 얘기야? 시작도 안 했는데?”

“아, 아냐, 그런 얘기가 아니라!”

코이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사귀는 건 맞아. 그건 맞는데, 비밀로…… 하자고…….”

"왜"

사그라드는 코이의 말꼬리를 낚아채듯 애슐리가 물었다. 

애슐리의 이런 반응은 너무 당연한 것이라 코이 또한 그를 이해했다. 만약 입장을 바꿔 애슐리가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면 분명 그도 침울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만약에 둘이 사귀는 걸 아버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 뒤는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사실대로 얘기하면 애슐리는 분명히 불쾌해하겠지.

사귀고 있는 상대의 가족으로부터 부정당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기분을 느낄까?

물론 애슐리라면 비참함을 느끼기보다는 화를 낼 것이다. 혹시나 그래서 자신과 헤어지기라도 할까 봐 코이는 두려웠고, 또 애슐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혹시나 그가 상처를 입을까 봐 무서웠다. 

애슐리는 너무나 멋지고 완벽한 아이인데 자신과 사귀게 되었다고 아버지에게서 나쁜 말을 듣는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애쉬가 그런 취급을 당하는 건 싫어.

코이는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저기……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왜?”

“그게…….”

대화는 이어지질 않고 계속해서 반복되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애슐리가 먼저 탈출을 시도했다.

“그걸 어떻게 비밀로 해? 그 많은 애들 앞에서 키스하고 고백했는데?”

“그, 그건.”

코이는 황급히 말을 받았다.

“진짜라고 생각하는 애는 없을 거야.”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건, 왜냐면.”

코이는 주저하다 결국 대답했다.

“내가, 나잖아.”

애슐리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코이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자기비하를 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걸. 너도 예전 같으면 그랬을 거 아냐.”

물론 예전엔 그랬겠지만 지금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 안달을 내는 건 코이보다 애슐리 쪽이니까. 

그리고 애슐리는 자신이 코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전광판에 자신이 코이의 남자 친구라고 써서 전국 프리웨이 곳곳에 걸어 두고 싶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그는 대체 코이가 지금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드디어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남들이 어떻게 보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중요한 건 네 마음이지.”

코이가 애슐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뭘까. 

혹시, 하고 애슐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말해 봐, 코이. 내가 남자 친구인 게 부끄러워?”

상상도 못 한 말에 코이가 놀라 펄쩍 뛰며 부정했다.

“뭐?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왜?”

“네가, 남자 친구인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코이는 어렵게 말을 고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그냥…… 내가, 준비가 안 돼서 그래. 조금만 시간을 주면 안 될까?”

애슐리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무슨 준비?”

“그러니까…….”

코이는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릴 뿐 속 시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뭔가 숨기는 게 있어. 애슐리는 눈치챘다. 오늘 하루는 완벽했다. 

방금까지는. 그런데 마지막을 이렇게 망쳐 버린 데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라면 정말로 실행해 버리겠어.

이번에는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그는 너무나 많은 배려를 했다. 그런데 돌아온 게 이거라니. 뭐? 사귀는 걸 숨겨?

“어서 말해, 이유가 뭔지. 거짓말하거나 대충 얼버무리면 나도 참지 않아.”

애슐리는 마지막 경고를 한 후 입을 다물었다. 

코이는 진퇴양난에 빠져 버린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했다가 돌아올 반응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버무리거나 거짓말을 하면 그래도 역시 화를 낼 것이다. 결국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소리로 고백했다.

“아버지가…….”

“뭐?”

코이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울먹거리며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너하고 만나지 말래.”

이번에는 곧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애슐리는 지금껏 여러 여자 친구를 사귀었지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며 헤어지라고 말했던 보호자는 처음이었다.

“……뭐?”

애슐리가 사이를 뒀다가 다시 묻자 코이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네 페로몬 때문에 발현하면 어떻게 하냐고…… 절대 널 만나면 안 된다고 그랬어. 들키면, 혼날 거야, 많이.”

급기야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코이가 말을 이었다.

“미안해, 애쉬. 나도 네가 좋은데…… 정말 정말 너무 좋은데, 우리 아빠는, 굉장히 무서워. 화가 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혹시나 만약에, 우리가 사귀는 게 알려져서 아빠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제야 애슐리는 코이의 말을 알아들었다.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절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혹시, 코이. ……그 남자가, 널 때려?”

순간 코이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애슐리는 참지 않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코이, 내 얼굴 봐 봐. 정말이야? 그래서 그런 거야? 그 남자한테 맞을까 봐, 무서워서?”

머뭇거리던 코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을 본 애슐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껏 애슐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경멸하며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조차도 애슐리를 때린 적은 없었다. 

물론 그는 살면서 폭행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잔인하게 상대를 파멸시키는 방법을 수없이 알고 행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 애슐리는 누군가 맞고 산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쓰레기 같은 부모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맞닥뜨린다는 건 별개의 얘기다. 더욱이 그게 코이의 아버지라니.

“난, 괜찮아.”

코이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진 술에 취했을 때만 조심하면 괜찮아. 요즘엔 계속 안 맞기도 했고…… 내가 걱정하는 건, 너야.”

코이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아버지가 너 싫어하는 거 알면, 너도 날 싫어하게 될까봐, 무서워서.”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

코이가 삼켜 버린 뒷말을 애슐리는 알 것 같았다. 그제야 자신이 그를 무섭게 몰아세우고 다그친 것이 후회가 됐다. 

코이가 대답하려 하지 않았을 때 왜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까. 캐묻지 않는 것도 배려인데.

남자 친구라고 떠들어 대 놓고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하지 않았다니.

애슐리는 어마어마한 가책을 느꼈다. 동시에 그에 대한 죄책감과 연민이 고개를 들어, 어깨를 쥐었던 손에 힘이 빠졌다.

“내가 널 싫어하게 될 리가 없잖아.”

한층 누그러진 어조로 말하자 코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눈물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나한텐 너뿐인데, 네가 날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난 어떻게 해.”

훌쩍거리는 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애슐리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코이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코이에 대한 안쓰러움과 애정으로 그는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래, 그럼.”

한참 만에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차인 걸로 하자.”

“뭐?”

뜻밖의 말에 코이는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을 닦아 주며 애슐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너한테 고백한 거잖아, 그건 무를 수 없어. 사귀지 않는다고 말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테고. 그러니까 이게 가장 나아. 내가 혼자 널 좋아하는 걸로 하자고.”

“말도 안 돼.”

코이는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 누가 그런 말을 믿는단 말인가. 코너 나일즈가 애슐리 밀러를 찼다고? 차라리 코너 나일즈가 사자의 엉덩이를 찼다고 하면 그걸 더 믿겠다.

"대신, 코이. 조건이 있어."

연신 고개만 젓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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